모튼 틸덤 - 「이미테이션 게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멍청하게도 처음에 나는 이미테이션 게임이 작전명이라던가 적어도 영화에서 언급한 것보다는 거창한 장면을 포함한 이름일 줄 알았다. 존재성 판단에 대한 질문이 사람에게 향하리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고. 다만 실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에니그마 해독과 그에 크게 기여한 앨런 튜링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거와 교차하여 편집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웠고. 내가 파악한 게 맞다면 크게 세 개의 타임라인이 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튜링의 소년 시절, 2차 세계대전이 치러지는 에니그마 해독의 시간, 그리고 동성애 유죄 판결로 자살하기 직전의 현재. 일반적인 전개였다면 튜링의 소년 시절은 일찌감치 보였던 그의 수학적 천재성 혹은 암호학에 있어서의 그의 흥미를 사전적으로 드러내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장치적으로 말하자면 그게 일반적이었을 거라는 말이다. 앨런 튜링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숨길 것 없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2022년이 도래한 현 시점에도 동성애라는 것은 장애나 죄악이 아니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2014년? 더하면 더했지 성향에 대한 반감이 없었을 시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자 혹은 감독은 그의 성향이 에니그마 해독에 필수적이자 가장 중요했던 기계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튜링의 인생 전반을 좌우하게 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으니 튜링의 소년 시절을 암호학에 뛰어난 모습보다는 튜링이 어떻게 현재의 튜링이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보여줬을 것이다. 그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튜링은 죽기 직전, 약의 영향으로 신경이 쇠약해지며 외로움을 호소한다. 그것은 크리스토퍼를 잃은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집착. 작중 크리스토퍼는 튜링의 첫사랑이었으나 감정에 대한 목소리를 내보기도 전에 잃어버린 조력자이다. 더 나아가면 그는 튜링의 버팀목이자 그의 존재성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구원자의 일종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말. 그것은 튜링의 삶과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튜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해서 일러준다. 튜링은 그 말 때문에 자립이 가능했다. 그 말은 조앤이 에니그마 해독에 뛰어들게 된 계기이자 튜링의 삶을 사랑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삶의 지향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튜링이 내밀었던 손을 잡았던 조앤이 이제 다시 튜링에게 손을 내밀 때, 경사에게 제 존재를 물으며 조용히 저물어가던 튜링이 답 없이 미소짓도록 만든 것이다.

 당연하지만 에니그마 해독은 영화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중간중간 위에 언급했던 튜링의 소년 시절과 지워진 튜링의 기록을 추적하는 형사의 뒤를 따라가는 현재가 교차된다. 처음에 튜링이 고립되었을 때, 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그를 배척하는 모습과 과거 시절이 연이어 나오며 자연스럽게 나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다른 출연작인 셜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엔 닥터 스트레인지였고. 어쩜 그는 이런 고고하고 외로우나 번뜩이는 사람을 연기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을까. 하지만 세 배역 중에서 앨런 튜링 역의 컴버배치가 가장 잘생겼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초록빛 눈의 그는 잘생김과 별개로 사람을 몰입하도록 만드는 데 분명 큰 기여를 했다. 고립되었던 튜링이 컴버배치가 연기했던 다른 역인 셜록과 다르면서도 비슷하다고 느껴진 건 그보다 좀 더 인류애가 있는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일 테다. 그는 정말 조앤을 사랑했다. 다만 에로스적 사랑, 성애는 제외하고. 그는 어쩌면 휴를 비롯한 동료들을 전부 사랑했을 것이다. 동료에게 느끼는 애정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이가 있다면 나와 보길 바란다. 다만 많은 영화 혹은 이야기들에서 진정한 사랑이라 불리는 것은 튜링에게 크리스토퍼가 유일했을 것 같다. 그것이 인간이었든, 컴퓨터였든 간에. 괴물이라 불리는 이의 연약한 내면을 엿보는 일은 언제나 자극적이고 가슴 아프다. 까칠해 보이는 이의 여린 면을 발견했을 때 많은 이들이 측은지심 내지는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튜링은 본인에 대한 고양감에 인류애가 없는 셜록과는 달리 정말 표현과 감정의 인식이 서툴 뿐인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반짝이던 시절의 종말 같던 마지막 장면은 어찌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가. 해독에 성공하고 전쟁이 끝나며, 모든 기록을 불태우며 즐겁게 웃는 이들의 얼굴이 역설적이게도 내겐 슬펐다. 튜링은 그 이후에 행복했을까. 잃어버린 크리스토퍼를 홀로 다시 만들고, 발전시키며, 사랑을 계속했을까. 내가 그의 인생을 평가할 자격도, 그럴 기회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튜링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인간 크리스토퍼가 죽기 전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 그리고 에니그마 해독을 이어갔던 시절이 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경사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 튜링은 묻는다. 그토록 청명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으로, 고고하고도 쓸쓸하게.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질문만으로 인간인지 기계인지 맞혀보는 이미테이션 게임을 제안했으니. 경사는 판단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튜링의 눈에는 고독이 있었다. 슬픔이 있었고, 아름다웠던 기억과 사랑과 아픔이 혼재했다. 나는 새파란 경사의 눈동자와 교차되는 튜링의 녹색빛 눈동자의 틈바구니에서 속절없이 절망했다. 색감! 배우의 눈동자는 연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연기와 타고난 생김새.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캐스팅은 완벽했다고 나는 감히 찬탄하는 것이다.

 존재성의 회의와 결여만큼 인생을 무너뜨리는 것이 또 있을까. 미친 괴짜 수학자의 뒷모습에서 인간의 끝을 바라보는 기분은 공허했다. 그래, 공허했다. 복잡하고 온갖 생각이 들게 하는 감정선을 원했던 거라면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 슬픔이나 쓸쓸함 같이 단순한 한 단어로는 도저히 형용하지 못하는 감각들. 가장 미래인,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들에서 체포된 튜링과 경사의 대화가 짧게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들이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다. 눈동자. 그것만으로 전해지는 경사의 경외와 튜링의 공허. 단순한 얼굴만이 잡힌 구도와 이상하리만치 푸른 빛의 화면이 주는 느낌. 그것은 꼭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가라앉는 북해의 빙하를 떠올리게 했다. 튜링의 가장 화려하고, 위대하고, 온 열정을 쏟았던 순간은 따뜻하고 노란빛의 색감으로 연출하고, 소년 시절은 채도가 낮지만 깨끗하게, 현재는 차가운 느낌의 푸른 빛이 전반적으로 감돌도록 표현한 것마저 미치도록 마음에 든다. 자살의 기록이 나열되는데도 노란 불꽃 사이로 사라지는 그의 위대함과 찬란히 웃는 튜링과 동료들의 얼굴이, 늘 역설이 그래왔듯 감정을 극대화하고. 그 대비감. 너무 좋다. 갑자기 급격히 어휘가 단순해졌는데, 사실 최고의 표현은 단순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너무 좋았다. 역설은 언제나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한다. 최고로 슬프게 하기도 하고, 눈물 한 방울 없이 우주가 부서지는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한다.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영국은 여전히 국교가 성공회니 만약 미국에 태어났다면. 동성애가 죄가 아닌, 괴짜의 천재성에 어쩌면 조금 더 기회가 돌아오는 이 시대의 어느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만약이라는 희망을 부여하는 것이 가장 의미 없다는 것을 알지만 생각이 흐르는 것을 멈추기는 어렵다. 애초에 결핵으로 크리스토퍼가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의 소년 시절부터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부질없는 가정과 상상이 멋대로 흘러 지나간다. 하지만 그의 삶은 끝났고, 이 영화의 시선으로 재조명된다. 이 영화에서 그려낸 튜링의 삶과 그 일면에는 생각할 만한 요소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영화 자체도 연출, 구도, 장면과 플롯 구성, 관계성, 서사와 감정선 등이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본 영화가 명작이라 불리는 이유를 인정할 만큼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가끔 보면 자기네들끼리 다 해먹나 싶은 영화제나 시상식이더라도 그 드높은 권위가 생겨난 이유를 조금은 수긍하게 만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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