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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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드보이>는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을 15년 동안 감금한 인물을 찾아 떠나는 스릴러 장르의 복수극이다. 오대수는 자신을 직접 감금했던 사설 감옥의 관리자 박철웅을 먼저 찾아간다. 누가 자신의 감금을 의뢰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오대수는 박철웅의 이를 하나씩 뽑는다. 차마 똑바로 보기 어려운 이 장면에서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1악장이 흘러나온다. 클래식 음악이 잔인한 장면과 어우러져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겨울’  1악장은 매서운 바람을 표현한 격렬한 음악적 진행이 특징적이어서 영화 <존 윅>의 결정적인 대결 장면에서도 매번 쓰였다. 이처럼 유명한 클래식 음악들이 영화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때로는 장면의 내용과 전혀 다른 맥락의 클래식 음악을 삽입해 전혀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본 기사에서는 음악이 영화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며, 영화 음악으로 자주 사용되는 클래식은 영화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영화 음악의 발전과 기능

 무성영화 시절에도 영화음악은 존재했다. 영사기로 영화를 틀어 놓고 동시에 라이브로 반주 음악을 연주하여 영화를 보조했다. 주로 영사기의 소음을 가리거나 조용한 영상의 단조로움을 덜기 위해 연주가 이루어졌다. 그러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면서 영화음악은 그 역할이 확대되었고 동시에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화의 청각적 요소로서 대사, 음향효과, 그리고 배경 음악이 그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영화에 소리를 입힐 수 있게 되자,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더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영화가 비로소 시각에 청각까지 더해진 종합예술로서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에는 다양한 음악이 쓰인다. 영상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어울리는 기존의 곡을 사용하기도 하고, 새롭게 알맞은 곡을 창작하기도 한다. 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방식도 활발히 발전했지만, 최근에도 여전히 영화에 클래식 음악이 활용되고 있다. 어떤 음악을 사용하든 결국에는 영화 연출가의 의도를 관객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다. 

 1940년대에 활동한 미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 아론 코플란트는 영화 음악의 기능을 5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는 시공간적 배경을 확인시켜주는 기능이다. 어느 악기를 사용해 어떤 멜로디를 연주하는지는 시대적 배경이나 장소를 연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5음 음계를 사용하는 것이 그중 한 방식이다. 두 번째는 인물 내면의 심리나 장면 속 상황에 숨겨진 의미를 담는 기능이다. <시민 케인>의 아침 식사 장면에서는 케인과 그의 첫 부인과의 관계가 조금씩 소홀해지는 수년의 과정을 버나드 허만의 음악을 사용하여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세 번째는 단지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순수 배경 음악의 기능이다. 네 번째로 영화 전반에 연속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장면들을 연결할 때 공통으로 음악을 사용하거나 약간의 변주를 주면 장면 간에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마지막은 감성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기능이다. 영상만으로 관객에게 호소할 수 없는 부분을 보완해주는 것이 음악이라는 것이다. 특히 클라이맥스나 엔딩 장면에 사용되는 음악은 관객에게 큰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아론 코플란트의 이론 외에도, 영화 음악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매우 극적인 장면에서 오히려 느리거나 차분한 음악을 사용하여 긴장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역설적인 음악의 사용이 감정을 더 확장하는 것이다. 영화 <플래툰>에서 주인공이 총을 맞는 장면에서 오히려 아주 느린 음악을 넣은 것이 한 예다. 화면 변화 없이 음악을 갑자기 중단하여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관객들에게 가까운 시간 내로 무언가 사건이 발생할 것임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클래식의 역할

 영화 음악 감독들이 많이 쓰는 음악 중 하나가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특히 오케스트라 편성의 클래식을 사용하여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동에 울림을 더한다. 클래식 음악이 표현하는 감정선을 그대로 활용하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 자체가 가진 특성을 잘 활용하여 장면과 잘 어울리도록 연출하기도 한다. 
영화 <그린북>에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가 조성을 변화시키며 등장한다. 주인공인 흑인 연주가 돈 셜리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가르쳐주던 것을 이야기할 때는 조성이 유지된다. 그러다 레닌그라드의 학교에 입학하면서 흑인으로서 차별을 경험하기 시작했던 이야기를 할 땐 A#이 사용되며 조성이 변화한다. 이처럼 클래식 음악의 선법*적 대립은 장면의 분위기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다. 

 장면마다 어울리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클래식 음악을 선별해 삽입하는 경우도 많다. 영화 <적과의 동침>은 폭력적인 남편 마틴에게 학대당하는 로라의 탈출기를 다룬다. 마틴이 섬뜩하게 로라를 폭행하는 장면마다 집안에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5악장이 음산하게 울려 퍼진다. 이후 로라는 마틴에게서 도망치지만, 결국 마틴은 로라의 거처를 발견하고 다시 마틴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환상교향곡> 5악장이 함께 재등장한다. 즉, 인물의 두려움을 증폭해서 표현하는 동시에 장면 간의 연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 다른 영화 <트루먼쇼>에서는 주인공 트루먼이 행복한 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빠르고 쾌활한 리듬이 평범하지만 행복하고 반복적인 트루먼의 일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트루먼이 유일하게 사랑을 느끼는 대상인 실비아가 등장할 때는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1번> 중 2악장 ‘로망스’가 매번 재생된다. 아름다운 곡으로 유명한 ‘로망스’는 트루먼이 실비아에 대해 느끼는 애틋한 감정을 잘 살려준다. 실제로 쇼팽이 이 곡을 작곡할 때 연모하던 여인이 있다고 알려져 곡과 영화 장면이 더욱 어우러진다.

 

클래식, 주제를 암시하다

 앞에서 밝힌 기능들 외에도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기 위해 클래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말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는 주인공 앤디가 교도소의 방송실에서 무단으로 모차르트의 노래를 틀어 내보낸다. 정확히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이다. 앤디의 친구 레드는 이때를 회상하며 노랫말의 뜻은 몰라도 아름다웠고, 쇼생크 교도소의 모두가 자유를 느꼈다고 말한다. 즉,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자유의 가치’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자유로의 갈망이 담겨있던 모차르트의 노래를 통해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SF 영화인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등장하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 1악장은 그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미래에 누리게 될 많은 과학 기술들이 가진 맹점에 대해 다루는 영화인만큼, 기술에만 의존한 시스템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삽입곡을 통해서도 꼬집는 것이다. 

 

 클래식은 말없이 인간의 감정을 투영하는 음악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앞으로 영화를 감상할 때 익숙한 선율이 들린다면 한 번 더 귀 기울여보라. 화면뿐 아니라 음악에 담긴 연출 의도는 무엇일지 추리하는 재미를 배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선법*
음계를 구성하는 음들 중 으뜸음을 바꾸는 것. 중세 음악에서 쓰던 교회선법에서 유래되어 발전한 개념

참고문헌 |
<영화음악의 기능 이론들에 대한 비교 연구>, 이수일
<영화 속 클래식 음악의 기능분석>, 강은수, 안수환
<뮤직 파라디소>, 심광도, 도서출판 피플파워 
<시네마 클래식>, 김성현, 아트북스

 

©박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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