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밋밋한 것들은 별로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은 파란색이나 노란색 같은 원색이었고, 영화나 책도 줄거리가 꽉 찬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음식도 계란이나 그냥 물보다는 불량식품과 주스가 더 좋았다. 마라탕의 알싸함과 진한 향신료 맛을 좋아했고, 기대하고 먹었던 첫 평양냉면에서는 육수인 듯 아닌 듯한 애매함과 국물과 면이 따로 노는듯해 실망감만 느꼈다. 그래서 음식이든 영화든 책이든 첫인상이 깊지 못하면 굳이 다시 찾아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맛있고 자극적인 것들이 세상에 많은데 굳이 밋밋하다고 느낀 것들을 다시 찾아볼 여유도 없었다.

 나한테는 ‘벌새’도 그런 잔잔하고 밋밋한 영화였다. 그 영화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친구의 자취방에서 영화 ‘메기’를 보다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하필 새벽 1시에 영화를 보기 시작해 하품을 연거푸 하고 있던 나에게, 친구는 “이 영화가 처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고 좀 잔잔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메기’에는 뜬금없는 장면들의 연결이 있긴 했지만, 나름 웃긴 대사도 많아 그렇게 잔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본 더 잔잔하고 밋밋한 영화였던 ‘벌새’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영화에 관해 얘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본 지 2년이 넘어가는 그 영화를 꽤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벌새’의 주인공인 은희를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액션이나 코믹 영화 주인공들과 반대로 내 주변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 같은 그 주인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났다.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1994년의 서울에서 사는 평범한 여중생이다. 정말 평범하게도, 은희를 정말 좋아하는 ‘베프’와 남자친구가 있고, 부모님과 한 명의 언니, 한 명의 오빠가 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모두가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일들이 은희에게 연달아 툭, 툭 일어난다. 은희의 ‘베프’는 은희를 배신하고, 남자친구는 다른 여자애랑 같이 다닌다. 그리고 은희의 가족들은 귀를 다친 은희에게 무심하다. 은희가 크게 느꼈을 이런 일들이 영화에서는 잔잔하고 밋밋하게 보였지만, 오히려 영화의 그런 잔잔함이 은희에게 더 공감할 수 있게 만들었나 보다. 답답함과 슬픔을 느껴도 결국 하루를 똑같이 잔잔하게 보내게 될 때, 은희를 생각보다 더 많이 떠올렸다.

 ‘벌새’는 그런 잔잔하고 밋밋한 영화였지만, 은희 말고도 아직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은희의 한문 선생님이 가르쳐준 사자성어인데, 한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으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라는 글귀다. 이것도 은희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기도 한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감정에 관해 관심을 가져줄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 항상 성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낯선 이가 나를 알아줄 수도 있다.’ 이런 말을 전해주는 사자성어 같았다.

 밋밋한 첫인상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위로를 해줬던 영화 ‘벌새’를 떠올리며 내가 지나쳤던 밋밋하고 슴슴한 매력의 무언가가 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게 평양냉면일지도, 아직 못 만난 새 친구일지도, 책이나 영화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벌새’처럼 다시 돌아보며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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