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출간된 벅민스터 풀러의 저서 <우주선 지구호 사용 설명서>는 전 세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미래학 분야의 고전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풀러는 지구를 인간이 승선한 거대한 거주 기계에 비유하고 ‘우주선 지구호’를 조종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으로 ‘종합적인 성향(comprehensive propensities)’을 강조한다. 세분화되고 파편화된 전문 지식에 매몰되지 않고 전체를 아우르고 종합하는 총체성을 획득할 때 인류는 보다 성공적이고 지속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풀러는 총체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의 예로 과거 광활한 바닷길을 지배하던 해적의 비유를 든다. 해적은 천문항법, 선박술, 해양학, 경제학, 생물학, 지리학, 역사 등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종합해 드넓은 바다 위에서 항로를 개척하며 살아간다. 자신을 엔지니어, 발명가, 수학자, 건축가, 지도제작자, 철학자, 시인, 우주생성론 연구자, 안무가, 미래학자, 총체적 디자이너 등으로 부른 풀러는 스스로 총체성을 획득한 인간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부적응자로 중퇴했지만 명예박사 학위 47개, 특허 28건, 저서 30권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갖고 있고, 분과별 장벽을 넘나들며 백남준을 포함한 전위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총체성은 풀러의 책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가치이다. 기후 위기, 국제 분쟁, 인구학적 변동 등 현대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은 더 이상 세분화된 전문 지식과 기술이 아닌, 다양한 분야를 횡단하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학계에서는 ‘융합,’ ‘통섭,’ ‘다(간)학제’ 등의 키워드가 교육과 연구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되며 유행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도 무전공, 무학과 제도로 통해 신입생이 다양한 분야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최근에는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융합인재학부를 신설했다. 융합적인 성격의 연구와 융합형 교육이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다학제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다양한 연계 전공 프로그램이 생겨나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찾고 있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전문화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은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복수의 전공 분야를 가진, 보다 경쟁력 있는 전문가를 길러내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융합 자체가 목적이 되어 여러 분야를 단순히 늘어놓는, 즉 융합을 위한 융합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세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갖고 지칠 줄 모르고 질문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과 도구를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어린아이의 총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있다. 인류세의 위기를 맞아 우리 교육의 목표는 ‘우주선 지구호’의 조종사가 될 자질과 능력, 즉 지구와 전우주의 생명체와 무생물에 대한 관심과 책임, 연대감을 키워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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