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이윤지 기자
 일러스트 | 이윤지 기자

 방학 때 무엇을 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거창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인턴, 연구, 스타트업 등 주변 친구들은 방학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뒤처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하지만 꼭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세계에 빠져들어 따뜻한 방학을 보내는 것도 좋다. 영화와 책, 드라마, 웹툰 등 다양한 작품에 둘러싸여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이정표이자 세상을 넓게 바라보게 해줄 간접 경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춥고 답답한 겨울 방학을 슬기롭지만 조금은 게으르게 보낼 수 있도록 카이스트신문 문화부가 방학에 몰아보기 좋은 콘텐츠를 추천하고자 한다.

 

이번 겨울은 이탈리아에서 보내 보아요, <나폴리 4부작> - 이도현 기자
 성장은 어디서든 통하는 소재다. 나의 전부인 것 같았던 익숙한 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향할 때의 낯설고 이질적인 감정은 모두가 겪어온 과거이자 혈관 깊숙이 새겨진 기억이기 때문이다. 성장의 기억은 아름다운 포장지로 싸여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괴로웠다. 심지어는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벽을 맞닥뜨리고, 설레면서도 불안한 변화를 끌어안아야 한다. 엘레나 페란테 작가는 이탈리아 나폴리의 두 소녀 ‘레누’와 ‘릴라’가 어렸을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을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로 이루어진 ‘나폴리 4부작’으로 담아낸다.

 레누와 릴라의 우정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둘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이지만, 상대방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둘의 관계가 완벽하지 않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배경과 시대가 다르더라도 독자는 그들의 성장과 우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엘레나 페란테 작가는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를 통해 이탈리아의 어두운 현대사를 조명한다. 파시즘의 청산과 공산주의, 경제 성장으로 사회가 위협받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레누와 릴라가 평생을 겪어내야 했던 폭력적인 남성우월주의를 강조한다. 등장인물들이 격변하는 사회에 맞서는 모습을 읽다 보면 이탈리아의 현재와 과거를 모두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나폴리 4부작은 2,4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 때문에 좀처럼 첫 장을 넘길 용기가 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첫 시작을 해낸다면, 엘레나 페란테 작가의 유려한 글과 레누와 릴라의 밀도 높은 삶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직접 살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마지막 장을 덮기 아쉬울 정도로 몰입할 수 있다. 마스크에 가려진 이번 겨울이 고되게 느껴진다면 겨울방학을 뜨거운 이탈리아의 여름 속에서 보내는 것은 어떨까. 나폴리 4부작은 당신을 이탈리아로 초대할 매력적인 초대권이 될 것이다.

 

고민의 무게를 덜어줄 시트콤, <그레이스 앤 프랭키> - 이도현 기자
 시트콤은 가볍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현실의 상황에 갇혀 스스로 고민에 무게를 더할 때 시트콤은 그 고민의 무게를 덜어준다. 시트콤에서 하나의 에피소드는 특정한 갈등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트콤에 등장하는 갈등의 경우, 실제라면 한없이 무거울 상황이더라도 어이없을 만큼 명쾌하게 해결되고 모든 등장인물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시트콤이 매력적인 이유는 갈등이 반드시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평생을 함께 산 각자의 남편이 서로 연인이었음을 고백한 후,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함께 살며 겪게 되는 일을 그려낸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긴 법정 싸움만을 남긴 채 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뜨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레이스와 프랭키, 그들의 전남편과 자식들은 싸움과 연대를 피하지 않으며 결국에는 서로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되어준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시트콤을 보다 보면 내가 가진 장애물도 결국엔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를 갖게 된다.

 그레이스는 이성적이고 우아하지만 까칠한 캐릭터이고, 프랭키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지만 손이 많이 가고 엉뚱한 캐릭터다. 각각의 캐릭터가 즐기는 주종만 살펴보더라도 이 둘이 얼마나 다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레이스는 음식은 거의 손대지도 않고 늘 마티니를 마신다. ‘보드카 마티니 스트레이트로, 아주 드라이하게. 그리고 올리브는 2개.’ 자신만의 레시피로 독한 보드카를 즐기는 그레이스와 달리 프랭키는 늘 기름지고 달콤한 음식과 함께 잔에 소금을 잔뜩 바른 마가리타를 주문한다.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둘이지만, 새로운 사랑에 도전하고 노인 여성을 위한 바이브레이터 사업까지 성공시키며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가 된다.

 시트콤이 현실의 고민을 모두 지울 순 없다. 하지만 추진력이 필요할 땐 그레이스의 마티니처럼 독하게, 즐겨야 할 때는 프랭키의 마가리타처럼 자유롭고 달콤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레이스 앤 프랭키> 같이 유쾌한 삶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방백남녀> - 이지현 기자
 웹툰을 보면서 감정의 여운을 느껴본 적이 아직 없다면, 고태호 작가의 <방백남녀>를 꼭 한 번 보길 추천한다. 이야기는 두 주인공 ‘민남주’와 ‘여주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어릴 적 축구 선수를 꿈꿨던 민남주는 모종의 이유로 고등학생 시절 축구를 포기했다. 민남주는 주변 사람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과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분투한다. 여주혜는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며 내면에 사람에 대한 불신이 깊게 자리 잡았다. 결국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둘은 토익 학원에서 우연히 불쾌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둘은 서로의 모습에 비친 자신을 보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한 마음에서 되레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성격, 취향, 경험, 상황 모두 전혀 다른 둘이지만 서로의 빈 곳을 담담하게 채워주며 각자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간다. 

 방백. 연극 기법의 하나로 등장인물의 독백이 관객에게만 들린다는 가정이 깔린 대사를 말한다. 의미 그대로 웹툰 <방백남녀>에는 두 주인공의 방백이 스토리 진행의 주요 요소로 쓰인다. 날 것 그대로의 솔직한 방백은 독자가 두 주인공 모두에게 효과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고 작가는 작년 6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틀에 한 편꼴로 영화를 본다고 밝혔다. 작품을 그릴 때는 배우처럼 캐릭터에 몰입하여 감정을 관찰한 뒤 스토리를 전개한다고 한다. 그 덕에 연재 당시 독자들 사이에 “작가의 성별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정도로 심리 묘사를 잘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이렇게 먹먹하게 그려내냐” 등의 반응이 있었다. 고 작가 특유의 뛰어난 감정 묘사는 또 다른 작품인 ‘당신의 과녁’에서도 볼 수 있다. 

 

눈과 귀가 즐거운 파리로 초대합니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 - 이지현 기자
 미국의 마케터 에밀리 쿠퍼가 프랑스 파리의 한 마케팅 회사로 발령을 받는다. 원래는 에밀리의 상사가 갔어야 했던 일이지만, 상사의 출산 휴가로 인해 파리에서 일할 기회를 에밀리가 대신해서 얻게 된다. 발랄하고 당돌한 주인공 에밀리와 함께 파리를 즐겨보고 싶다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추천한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제작자 대런 스타가 제작에 참여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물이다. 현재 시즌 2까지 제작 및 공개되었으며 시즌 3, 4 제작도 확정되었다. 주인공 에밀리를 중심으로 파리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통해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대한 고정 관념을 보여준다. 이 부분의 묘사가 부정확하다는 점과 파리에 대한 과한 미화 등으로 본 시리즈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파리 전경을 담은 영상미와 에밀리 쿠퍼를 맡은 릴리 콜린스의 연기력은 본 시리즈물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되어준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의상이다. <섹스 앤 더 시티>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스타일리스트   패트리샤 필드가 의상 연출에 참여했다. 특히 에밀리의 매력적인 의상들은 파리와 함께 어우러져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드라마화된 웹툰들 - 김서경 기자
 2021년 하반기 웹툰 원작의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이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웹툰을 즐겨보던 독자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고, 시청자는 원작을 드라마와 비교해 보며 보는 재미를 더할 수 있었다. <유미의 세포들> 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드라마화되었는데, <알고있지만,>, <D.P.>, <나빌레라> 등 다양한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쌈,마이웨이>라는 작품이 그동안의 경향과 반대로 드라마에서 웹툰으로 재해석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데, 이 역시도 기대가 크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기업에서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콘텐츠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콘텐츠보다도 각색이 다양한 콘텐츠가 ‘몰아보기’에 적합한 이유는 연출의 의도를 확실히 비교하면서 재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웹툰 시장이 성장하기 전에도 소설과 영화로써 표현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웹툰으로의 각색이 신선한 이유는 직접적으로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연출이 가미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웹툰으로 모든 스토리를 접했기 때문에 드라마를 볼 때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연출 방식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기도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쯤 영상 매체로 각색된 작품을 다시 보면서 이야기를 곱씹으며 다양한 각도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특히나 작품을 보고 애정을 갖게 된 시청자및 독자들은 여운을 오래오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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