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마다 황금빛의 흐릿한 광망이 감은 눈두덩이 위로 은은하게 일렁였다. 눈꺼풀이 따듯해지는 이 시간이 나는 좋았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차창을 내리고 흐릿하게 맺힌 노란 점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길에 조용히 늘어선 산수유나무가 빈틈없이 화사했다.

 

거리는 꽤 한적했다. 늘 지날 때마다 도무지 고요할 줄을 몰랐던 상록동 왕복 4차선이 웬일로 넓게 느껴졌다.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차선을 옮긴 것은 서부영화에서나 본 거리의 무법자 흉내를 내보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아무래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십오 년 전에 여일에게 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을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나는 그림쟁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오랫동안 지켜 왔던 직업을 떠나보냈다.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했다. 그 무렵, 택시 기사 일을 시작하겠다고 알렸을 때, 주변사람들은 모두 나를 붙들었다. 여일이도 그랬다. 자기 때문에 이러는 줄 알면서도 기어코 나를 말렸다. “택시 일 해볼까 하는데…….” 하고 말을 꺼내자마자 요즘 택시는 예전하구 다르대. 강우야, 난 괜찮으니까 좀만 버텨보자.” 하고는 매달렸다.

 

그럴 만도 하다. 이전의 나는 집을 잃어버린 소라게처럼 속이 물러 터져서 모래 속 하나 파헤치지 못했다. 하지만 십오 년간 거칠고 성미 급한 아재비들을 맞닥뜨리면서 이 직종에 맞는 껍데기를 찾았다. 나는 단단해졌다. 도로에서 만만찮은 상대를 만나면 그러려니 하고 비킨다. 보복할 만한 깡도 되지 않을뿐더러 별 거 아닌 일로 갈등을 빚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미끈한 스포츠카보다는 경운기의 덜컹거리는 여유와 바퀴가 토해내는 흙먼지 냄새가 더 좋다. 다만 오늘처럼 고요한 날 손님마저 뜸하니 가로수만이 늘어선 길이 쓸쓸했다.

 

유턴해서 왔던 길을 반대로 돌아 나가던 참이었다. 하얀 레이스가 치렁거리는 양산을 쓴 여자가 팔을 내밀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척 설레는 기분으로 여자를 향해 차를 몰았다.

 

오늘 참 화창하네요.”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늘의 첫 손님은 말이 없었다.

오늘 날씨는 상록동 날씨 중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날이에요.”

여자는 말이 없었다.

어디로 가세요?”

, 가물치마을이요. 일광면 용천리

나는 벌리고 앉은 다리로 무릎 박수를 치며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여자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거울 속 여자를 응시한 채로 물었다.

일광이면구장군?”

.” 여자는 말했다.

 

월척을 낚았다. 나는 입가에 번지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흥에 겨워 건들거리는 어깨를 감추지 않았다. 구장군 까지는 거진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가물치마을이면 그보다 더 깊숙한 시골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시골 마을에 가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는 여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으면서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말하던 목소리가 생생했다. 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서 숨죽여 여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나를 마주보며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소리가 목구멍을 통해서 나올 때마다 그녀의 아래턱이 위아래로 잘게 흔들렸는데, 손깍지를 빼버리면 훨씬 더 큰 폭으로 흔들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부엌 옆에 달린 작은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그 날은 집 안에서도 휭휭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람이 센 날이었다. 온몸으로 강풍을 받아서 이따금씩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부엌 옆 작은 창문이 그녀의 턱을 받치고 있는 투박한 손깍지와 너무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창문이 깨지면 집안은 유리 조각들로 난장판이 될 것이고, 강풍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면 나는 또 한 번 몸을 움직여 그것들을 줍고 유리 조각에 찔려 피를 봐야 할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끔찍한 상상에서 빠져나와 여일에게 빙그레 웃었다. ‘괜찮을 거야.’ 목구멍에 수분이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은 그녀의 비틀어진 목소리가 그렇게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부엌 옆 낡은 창문도 새 것으로 바꾸었고, 낡은 소파도 가죽으로 바꿨다. 나 같은 법인 택시기사들의 통장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돈이 잘 모이지 않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생각이 여일의 수술비에까지 미치자 자신이 초라해졌다. 매일이 오늘 같기만 한다면 그깟 수술비도 거뜬히 모일 테였다.

 

*

 

날이 어둑해지고 상록동에만 늘어선 노란 산수유길도 끝났다. 손님을 내려주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일 게 분명했다. 신호를 기다리며 여일에게 문자했다.

 

먼저 자

많이 늦어? 조심해서 와. 내일 나 병원 가는 날.’ 그녀가 답장했다.

 

날은 깜깜했지만 쌍라이트가 비추는 마을은 낯익었다. 창문을 내리자 알싸한 향이 선선한 바람을 타고 차안으로 흘러들었다. 어디선가 일찍 깨어난 개구리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개굴개굴 소리를 냈다. 두 줄기 광선에만 의지한 채 느릿하게 택시를 몰자 타이어가 바지락바지락 흙 밟는 소리를 냈다. 이따금씩 바퀴가 길가에 듬성듬성 난 풀포기 사이를 지날 때마다 서걱거리는 거친 바람소리도 지났다. 어릴 적 살던 마을 같았다.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은 거스름도 받지 않았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던 어린 시절이 색채를 잃고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완전히 멀어졌을 때 조금의 아쉬움을 남기고 택시는 속도를 냈고 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이나 자동차의 통행은 거의 없었다. 공허가 다시 밀려올 때쯤 그것을 잊어버릴 만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갓길에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것이 택시임을 확인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후미등만이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브레이크 위에 올려진 발에 힘을 주었다. 택시의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내 두개의 동공은 상황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안개 때문에 더욱 뿌연 불빛 사이로 다급한 발걸음의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더니 별안간 우뚝 섰다. 길쭉했다. 안광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다행이구나, 사람이야.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내가 차를 세운 쪽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그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떠나면서 비친 헤드라이트 불빛에 무언가 비쳤다.

 

저 남자는 누구고 어떤 목적이 있어서 저러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겼다. 내 두 발바닥으로 그 자리를 밟고 섰을 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질겁하면서 다리를 질질 끌어 뒷걸음질 쳤다.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밟고 있는 이 기분 나쁜 질척거림, 그것은 비도 진흙도 아니라 사람의 피였다.

 

밤중에 택시를 몰면서 헤드라이트 빛이 반사 되어 마치 레이저를 내뿜는 것처럼 보이는 맹수들과 종종 조우했다. 그것은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한밤중에 야외에서 빛나는 두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보다 더 섬뜩했다. 등덜미가 한두 군데 따끔거리기 시작하여 온 몸이 바늘에 찔린 것 같이 따가웠다. 땀이 솟고 온 세상이 빙빙 돌았다. 염산을 삼킨 것처럼 내장 속이 타들어갔다. 나는 도로가에 주저앉아 창자를 가득 채운 불쾌하고 찜찜한 약품 기운을 내려 보내기 위해 애써보았다.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입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무거운 쇳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내장이 수직으로 강하하고 택시 라이트와 도로가의 조명이 희미해지고, 교통 소음도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

 

한 갈래로만 이어진 국도인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 택시를 쫓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검은 잔상이 눈앞에 맴돌았다. 외길을 한참 달려 국도가 끝나는 즈음에서 그 놈을 찾았다. 나는 그 놈을 따라 고속도로를 올랐다. 택시는 잡힐세라 질주했다. 참으로 뻔뻔한 놈이었다. 고속도로에는 신호조차 없었다. 나는 그 놈의 미약한 후미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 각막이 시리고 쑤셔왔다. 도로 위에는 그 놈과 나, 둘만의 택시가 질주할 뿐, 달무리에 가려진 불투명한 달빛만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택시를 따라 나는 휴게소로 빠졌다.

 

그 놈은 생각보다 더 정신 나간 놈이었다. 놈은 휴게소 뒤편 차량정비소 쪽으로 숨어들어가 택시를 세워 두고는 담배를 무는 게 아닌가. 나는 바닥에서 누군가 두고 간 뾰족한 쇠붙이를 발견했다. 그것을 주워 들고 그 놈의 차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뾰족한 날을 수직으로 세워 남자의 택시 타이어 위로 내리쳤다. 한번, 두 번

 

당신 뭐요!”

 

가쁜 숨을 내쉬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더벅머리에 큰 매부리코를 가진 남자였다. 가늘고 길게 이어진 눈꼬리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는데도 그 끝이 칼로 자른 것처럼 날카로웠다. 게다가 광대는 무척 발달하여 가뜩이나 큰 얼굴이 더 넓적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덩치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는데, 몸매가 울퉁불퉁해서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실낱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한걸음씩 다가왔다.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 양 옆으로 깊은 팔자주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콧망울의 양 옆에서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아주 길고 굵은 주름 이었다. 주름 말고도 뼈가 튀어나온 곳들이 만드는 그림자가 얼굴 곳곳에 드리워져 섬뜩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기괴한 석상 같았다. 그가 내 바로 앞에 섰을 때 그의 택시기사 조끼 가슴팍에 붙은 서상진이라는 세 글자로 눈이 갔다. 손에 쥔 담배는 스스로 타 들어가면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남자를 응시했다. 이윽고 남자의 양 볼에 깊숙하게 파여 있던 팔자주름이 꿈틀거리고 닫혀있던 입술이 열렸다.

 

혹시 돈 필요하세요?”

?”

 

나는 흰자위가 보일 만큼 눈꺼풀을 치켜뜨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장 널 경찰에 신고해 버릴 수도 있어.”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세게 움켜쥐자 남자는 벽으로 밀려났다. 나는 그대로 남자를 밀어내며 엄지손가락으로 남자의 쇄골 위 움푹 파인 부위를 짓눌렀다. 그는 내가 이런 태도로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다지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기분 나쁘게 찢어져 있는 그 눈으로 내 조끼에 달린 이름표를 흘깃하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사람, 피를 아주 많이 흘리고 있었어요.”

나는 남자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들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 조용히 있었다.

난 냉장고에 갇힌 코끼리처럼 운전석에 가만히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심장이 피를 몸 밖으로 계속해서 퍼 낼 동안 잠자코 기다렸어요.”

왜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지?”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남자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가장입니다. 내가 직업을 잃으면 내 5명의 아이들은 죽습니다.”

어리석은 남자로군라고 생각했다.

경찰에 신고 되어도 잘리는 건 마찬가지야.”

여긴 인적이 드문 곳이라 그럴 일은 없어요, 저 신고하려고요? 아저씨, 다 알고 왔잖아요. 우린 같은 택시 기사잖아요. 안 그래요?”

서상진이란 자는 사연이 있는 남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그의 비루한 욕심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억 배는 더 불쌍한 사람이에요. 약국엘 갔는데고작 백 원이 모자랐어요. 약국엘 갔는데그 많은 약들이 있는데, 그 중에 그 약만 이천 백 원이라니. 제기랄,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택시에서 60초를 기다리면 미터기에 백 원이 올라가요. 결국 내 아내는 그 60초가 모잘라서 죽어버렸어요. 약국에서 나와서 집으로 걸어가는데, 길바닥에 동전이 있더라구요. 난 그걸 줍고 되돌아서 뛰었어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죠. 그리고 다행히도 그걸 살 수 있었어요. 이미 늦어 버렸지만요. 고작 60초가 모자랐던 그 날에, 내 세상은 멸망했어요.”

 

날 이해하나요?” 남자는 덧붙였다.

 

이해라는 말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강요하는 단어였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냈다. 눈으로 대강 보아도 내가 가진 재산보다는 많을 터였다.

세상은 불쌍한 사람들끼리 돕고 사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아저씨

나는 여전히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엄지손가락에 더 힘을 주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사정이 딱하다는 것은 잘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고민스러웠다. 숨이 떨어진 시체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었다. 혹여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저 돈을 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제 어떻게 될까. 서상진이라는 자의 가정은 위기를 모면한다.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반드시 써야 할 곳이 있었다. 저 정도의 돈이라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것뿐인가, 서상진을 구원하고 내 소중한 사람도 치료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상황이었다. 현재에 만족하면서 성실히 살아온 나이지만 깊은 속마음에서는 이런 날을 몰래 꿈꿔왔었다.

 

나 자신이 우습고 같잖다고 생각했다. 딱 십오 년 전, 여일이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고생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택시 기사라는 직업으로 천만 원이라는 수술비를 마련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누적되어 온 사랑과 믿음의 덩어리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몰라보게 두터워져 있던 그 덩어리들이 다행히도 나에게 유일한 하늘이 되어 주었다. 돈을 받는 것이 과연 하늘에게 부끄러운 일인가. 나는 생각했다. 더욱 이 거래를 마다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 발목을 부여잡고 있던 회심의 잔뿌리들은 나의 발길질에 무참히 떨어져나갔다. 나는 남자의 목을 움켜쥐던 손을 뿌리쳐 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니 이강우씨, 복 받으실 거예요. 모든 일 잘 풀리시라고 제가 기도할게요. 정말요.”

안 그래도 쳐진 그의 눈꼬리가 굽어지며 광대뼈까지 내려왔다. 그는 웃고 있었다. 팔자주름이 더 패이고 광대가 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입술이 양 옆으로 벌어지고 삐뚤빼뚤한 덧니가 드러났다.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나는 수치심에 휩싸였다.

 

차에 타려 할 때 남자는 급하게 나를 불렀다.

근처에 기사 식당 좋은데 있는데, 가시죠. 출출하지 않아요?”

근처라면 나도 아는 곳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는가 싶었다.

가시던 길 가세요, 아저씨.”

 

다시 운전석에 앉았을 때는 이미 해가 뜬 후였다. 다 떨쳐냈다고 믿었던 잔뿌리 조각들 중 끈질긴 몇 개만이 남아있었지만 내 비겁한 믿음은 이번에도 제 몫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각들은 말라 비틀어지고 가늘어져서 언젠가는 마음의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서 가벼운 입김에도 날아가 버릴 것이었다.

 

*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의사는 여일의 상태는 더 나빠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골수 이식을 해줄 사람이 생겼는데 아직은 확실치 않다고 말했다. 의사가 하는 말 중에 보호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과 사실을 전달해야 하는 직업적 도리에 의한 것은 각각 얼마나 차지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앉아 있었다. 여일의 상태는 확실히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급성골수성백혈병은 잘 가다가도 어떤 작은 자극에도 크게 심각해질 수 있는 병이었다. 십오 년 전에 그녀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매일 밤 신을 원망했다. 그 후로 나는 기적을 믿지 않게 되었다. 여일은 내가 택시 운전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자, 세상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내 마음속 깊은 곳 단단한 영역 깊숙이 자리 잡은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몇 년 전에 골수이식을 해주겠다던 사람이 한 번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는 신이 내린 두 번째 밧줄이었다. 첫 번째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때 난 의사가 뱉어 내었던 단조로운 음성을 내가 만들어낸 달콤한 허상으로 투영해서 바라보았다. 나는 헌 동아줄에만 의지한 채 들뜬 일주일은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의사는 그 자가 마음을 바꿨다더라고 알려 주었다. 들은 바로는 죽었다고 했던가. 그 때의 일은 신이 내리는 동아줄에 대한 믿음을 모조리 굴복시켰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의 기회가 튼튼한 금동아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난 후 여일과 보낼 행복한 시간들을 그려보았다. 저 멀리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일이 다가온다. 그녀 뒤로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우리의 공간은 더욱 청초하다. 내 앞에 선 여일은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단 아래로 내려가 여일을 맞는다. 그리고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그녀의 왼손 손가락 끝을 가볍게 잡는다. 여일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대는 것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다.

 

실제로도 이것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가장 큰 문제였던 수술비가 해결되었고, 골수이식자만 생긴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에게 내려올 동아줄이 금동아줄이기를 빌어볼 뿐이었다. 병원을 나서서 나는 여일의 수척한 손을 잡고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우리는 자주 걷던 공원을 걸었다. 날씨는 차분했다. 여일은 내 손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등에 뭐야?”

어제 서상진의 택시를 부수려고 집어 들었던 쇠붙이에 긁힌 듯 했다. 상처가 꽤 깊었다.

흉 지겠어. 강우야, 조심 좀 하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일은 천만 원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될 것이었다. 나는 어제의 일을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것은 내 머리가 어제의 일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는 반증이었다.

어제 첫 손님이 말이지. 가물치 마을로 가는 손님이었어.”

여일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빙그레 웃고 있었다.

거기 꽤 멀었을 텐데

멀기도 멀고, 힘든 길이었지.”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조금 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일이가 어깨에 기대라고 했다. 어색했다. 이전에 여일과 살을 맞댈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나는 영혼과 신체가 분리된 기분이었다. 내 영혼은 내 신체가 여일에게 기대는 상황을 바라보기가 어색했다. 눈을 감았다.

 

구름이 드문드문 있는 푸른 하늘이 눈앞에 보인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공원의 한복판에 있는 작은 화단 위에 내가 누워 있다. 저 멀리 여일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걷고 입맞춤을 한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하지만 몸 전신이 화단 풀밭에 밀착되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다시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이 있던 곳을 쳐다보면, 여일은 사라지고 그녀와 함께 걷던 남자만이 있다. 갑작스럽게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서상진이다. 그가 다가오고 귀에 작은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 ‘돈 필요하세요? 돈 필요하세요? 돈 필요하세요?...’ 그리고 머리 위에서 서상진이 얼굴을 들이민다. ‘그 돈으로 아내 살릴라구 그래?’ 팔자주름이 움푹 들어가서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때 보았던 그 표정, 간담이 서늘하다. 나는 두 팔을 뻗어 서상진의 머리를 움켜쥐려 하지만 서상진은 점점 멀어진다. 아니, 서상진은 계속 그 자리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몸이 화단 아래로 점점 가라앉고 있다.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상아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는 낡은 방 안이다. 약품 냄새가 콧속으로 꾸역꾸역 들어와 후신경을 자극한다. 쇠붙이들과 유리병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천정에 매달린 백색의 창백한 샹들리에가 이 공간을 더욱 음침하게 만들고 있다.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는 문 너머에 누군가 있다. 문이 열리고 그가 다가온다. 검고 진득한 액체를 흘리며, 한 방울, 한 방울, 그리고 질퍽거리는 발소리를 내면서. 그 시체의 얼굴이다. 시체가 다가올수록 나는 도망치려 온몸을 버둥거리지만 몸 어느 부위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약통을 찾았다. 그리고 서둘러 뚜껑을 따고 입으로 가져간다. 검은 시체의 형상이 흐릿해진다. 눈꺼풀이 스르르 닫히려 하고, 이제, 암전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 나는 죽어가고 있다. 저 멀리 새어 들어오는 빛 너머 여일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린다.

 

가아아앙우우우야,

 

음절들이 합쳐져서 단어를 이룬다.

가앙으우우, 강으으야, 강우야, 강우야, 괜찮은 거 맞아?”

눈을 뜨자 여일이 얼굴을 들이밀곤 물었다.

어딜 그리 쏘다녀?”

? 아니. 그게 아니라, 택시운전기사가 하는 일이 쏘다니는 거 아님 뭐 길래.”

멋쩍게 웃는 나를 보는 여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난 말고, 손에 상처도 그렇고, 너 조심해라,”

출출한데 밥이나 먹자.” 난 그녀에게 말했다.

 

*

 

모처럼 출근하는 날이었다. 백미러에서 대롱거리는 헝겊 인형은 춤을 익살스럽게도 추었다. 자주 가는 기사 식당이었다. 기본 돼지국밥을 시키고 언제나 그랬듯이 눈은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향했다. 뉴스는 내 한 쪽 귀로 흘러 들어간 후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어서 반대쪽 귀로 나왔다.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깍두기 그릇이 뒤집히고 옷에 붉은 국물이 튀었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택시에서 내립니다. 시체를 확인한 남자는 주저앉습니다. 남자는 네 발로 기어 시체로 다가가서 몸을 뒤집니다. 지폐 뭉치를 안주머니에 챙기고 남자는 비틀거리며 차에 탑승합니다. 날이 어둡고 안개가 끼어 본 영상정보로는 차량번호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본 차도와 이어지는 인근 구장국도의 CCTV영상정보를 통해 피의자의 차량 번호를 확보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멀어져 가는 택시의 뒷모습입니다. 차량번호 4871인 것으로 확인되어 현재 경찰 조사 중에 있습니다. 해당 사건은 지난 주 수요일 새벽 한 시께 구장군 국도 3호선 우회도로 상록IC 진입교차로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뉴스는 그렇게 보도하고 있었다.

 

4871은 내 차 번호였다. 나는 그 돈이 서상진의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제 나는 뺑소니범에 시체를 뒤져 돈까지 갈취한 악질범으로 몰리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돼지국밥 뚝배기에 머리를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뇌를 지져버리면 기억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직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국밥 그릇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이 연기가 되어 점점 검게 물들었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보다도 더 커져버린 시커먼 어스름은 머리부터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심장이 가려웠다. 가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몸 전체로 퍼졌다. 나는 가게를 뛰쳐나와 택시에 몸을 던지듯이 올라탔다.

 

헝겊 인형은 백미러에 매달려서 축 늘어져 있었다. 인형은 여일이 직접 만들어서 선물한 것이었다. 입을 표시하느라고 도리어 실로 꿰매어 놓은 인형은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동그란 단추 눈을 하고서는 나를 응시 할 뿐이었다. 아마 여일도 이 뉴스를 봤을 것이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서 나물을 다듬고 빨래를 개면서 두 눈으로 두 귀로 똑똑히 보고 들었을 것이다. 이강우, 넌 이제 어떡할 셈이냐. 그녀는 꽤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의 자초지종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수술을 안 하겠다고 뻗댈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나의 결백을 믿어 줄지도 몰랐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밥은 먹었어?”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가 아직 모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연습한대로 그녀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하지 못했다. 말들이 목젖에 힘없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먹다 만 것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뚝배기에 박아버리고 싶어져서 뛰쳐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아예 뇌가 소멸해버린 기분이었다.

, 그 돈 말야.”

여일이 운을 뗐다. 나는 잠자코 들었다. 그래, 그녀는 그 소식을 알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돈이 뭐 어쨌다고?,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속으로 외쳤다.

아냐, 됐어. 밥 아직 안 먹었다고? 꼭 챙겨 먹어.”

 

- “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이번엔 의사였다. 의사는 그 골수 기증자가 마음을 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나보다도 더 신난 듯했다.

 

*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마쳤지만, 달이 질 때까지 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차 안에서 그날을 곱씹었다. 이제 그 놈의 얼굴만 생각해도 폭발적인 괴로움이 몰려왔다. 그 졸렬한 미소, 그것은 나에게 깊은 수치심과 어떤 분노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붉은 실타래가 꼬이고 엮여서 시작과 끝을 찾을 수 없는 혼란이 나를 잠식했다.

 

저절로 태어나 공짜로 누리는 가벼운 산책이길 바랬으나, 세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질수록 사십 년 동안 마주한 인생은 세상과의 고단하고 오랜 주도권 싸움이었다. 거대한 세상에게 패배할 때마다 나는 나의 소중한 것들을 반납하면서 적당히 길들여진 어른으로 자라났다.

 

살면서 이런 위기감을 느낄 때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포기했다. 이제 더 남은 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여일의 수술뿐이었고, 꿈꿀 수 있는 것은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뿐이었다. 여일이는 지금, 어떻게, 잘 있을까. 생각은 내 머리를 스쳤고 곧 봄비처럼 조용히 가늘게 지나갔다.

 

어둠 속의 여인은 골똘히 생각한다. 프라이팬에 올려 지기를 기다리는 물고기처럼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침을 질질 흘리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 예상하건데, 그녀의 머릿속은 사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작자에게 큰돈이 생겼던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 어리석음은 누구의 몫인가. 그녀는 눈을 감고 사내를 회상한다. 창문을 훌치는 빗소리에 웃고 힘없이 고개 숙인 길가의 민들레에 눈물 흘리던 사내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뺑소니에 돈까지 훔친 그 작자는 내가 알던 사내가 아닐 터인데. 만약 두 사람이 하나라면 누가 진짜인가. 프라이팬이 달궈지고 식용유가 적절한 온도로 데워지는 중이다. 여인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답을 찾으려 애쓴다. 누가 사내를 괴수로 만들었는가. 여인은 엉거주춤 일어나 문고리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문고리에 걸린 올가미에 자신의 머리뼈를 통과해 줄을 턱 아래로 조여 맨다. 여인의 하중이 급작스럽게 중력 방향으로 쏠린다. 온 체중을 실어 늘어진다. 물고기는 끓어오르는 기름 속에 던져졌다. 조직들이 뜨거운 팬 위에 오그라들며 타들어간다. 여일은 살면서 보여주었던 모습 중 가장 추한 모습으로 매달려 죽었다.

 

다음 날, 그 놈을 잡을 기회가 찾아왔다. 눈 뜨자마자 그 놈이 같이 가자고 했던 식당 옆 골목에 차를 대고 대기했다. 그 놈이 올 지 안 올 지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보는 것이었다. 사람이 차 옆을 지나칠 때마다 그들이 내 차의 번호판을 엿볼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시간이 흐르고 저녁시간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식사 무리인 듯싶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는 복잡한 배경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맙소사, 그 놈이었다. 그 놈은 나를 쳐다보았다. 휘몰아치는 머릿속은 당장이라도 그 놈을 족쳐버리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 명치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그저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몇 배의 돌덩이들 속으로 남자를 파묻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그 역겨운 놈의 택시를 쫓아갔다. 놈은 그날의 현장을 지나쳐 계속 달렸다. 우리는 마침내 가물치 마을 깊숙한 오솔길을 지나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도달했다. 길이 더 없었으므로 나는 차에서 내렸다. 놈은 내리지 않았다. 내가 트렁크에서 꺼낸 목각을 집어 들고 놈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놈은 차에서 내려 뒷걸음질 치더니 커다란 바위 옆으로 붙어 섰다. 멀리서 바라본 높은 갈대밭은 물새를 품고도 고요하다. 그 남자의 표정이 그러했다. 그 내부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다음 장면을 상상하면서, 재빠르지만 성급하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표적은 남자의 목 오른쪽 면 중앙 부위였다. 나는 재빨리 양 손으로 목각을 쥐어짜듯이 붙들고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목각이 바람을 가르고 남자가 기대 서 있던 바위에 부딪혀 두 조각으로 부서졌다. 동시에 남자는 커다란 몸집을 방패삼아 나의 가슴으로 돌격했다. 나는 일 미터 정도 날아가 철푸덕, 소리를 내며 진흙 바닥에 던져졌다. 그야말로 이전투구였다. 놈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나는 고개가 뒤로 젖혀져 머리통을 진흙에 처박았다. 피 맛은 짭짤했다. 그것을 삼키자, 말라 있던 식도가 습해지고 심장이 식도에 걸린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놈은 내 가슴 위에 올라타서 양 손으로 축축한 셔츠 옷깃을 조여 누르고 있었다. 더 압박할수록 목구멍은 더욱더 심하게 펄떡댔다. ‘돈 필요하세요? 이강우씨, 이강우씨육십초에 백 원, 백이십 초에 이백 원, 삼백 원……. 사백 원흐흐흐, 그 더러운 돈으로 아내 살릴라구 그래? 이강우씨?’ 꿈속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움을 남기지 않고 긁어모았다. 그리고 피와 타액을 적절히 혼합한 한 줌의 가래침을 입안에 저장한 다음, 그 놈의 얼굴을 향해 뱉어 내었다. 그가 방심한 사이에 나는 자유로운 오른손을 위로 뻗어 조각난 목각을 실수 없이 단 한 번에 쥐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그것을 남자의 목으로 관통 시켰다.

 

쇄골 위로 찐득한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것은 목을 타고 흘러서 내 턱 밑에 조금씩 고였다. 나는 여전히 내 위에 올라타 있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오른쪽 목에 나무를 박고 내 위에서 삐걱거리고 있는 남자는 꼭 태엽 인형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동력이 다한 태엽인형처럼 느린 속도로 목을 덜그럭거렸다.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조금 뒤 멈추었다. 영원히.

 

오오, 서상진그대도 조금은 슬픈 자군요. 마음이란 행복의 풍선 속은 텅 빈 것 같지마는 투명한 그대 마음속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수북하군요. 나는 볼 수 있거든요. 그대여, 그리할지라도 인생 슬프지 않은 자 어디 있을까요. 웃으시구려. 그리고 편히 잠드오.’

 

*

 

나는 휘청거리면서 일어섰다. 발밑에서 진흙이 삶은 감자처럼 으깨어졌다.

 

시체를 등지고 서서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찬 공기의 촉감과 뱃속의 허기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나보고 밥을 꼭 챙겨 먹으라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입 속으로 아무런 음식물도 우겨 넣지 않았다. 그 전화 이후로 하루 동안 여일은 소식이 없었다. 나를 기다리느라 밤을 새웠을 것이다. 나의 전부는 그녀이고 그녀의 전부도 나이기에.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랬었다. 함께 개울에서 다슬기를 잡았다. 그 해 여름, 우리는 넙덕한 수경에 고개를 박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개울을 활보했다. 수경으로 바위를 들여다보면 다슬기가 따닥따닥 붙어 있었는데, 그걸 들여다보면서 손을 갖다 대면 계속해서 헛손질을 하고 비켜가는 것이었다. 여일이는 재주도 좋았다. 해가 질 무렵 서로의 망을 확인했는데, 그녀의 것은 푸짐하고 내 것은 텅 비어 초라했다. 그 때 우리는 행복했다. 지금보다는 훨씬. 나는 나의 불행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나의 시간은 서상진을 만났던 시각에서 멈추었다. 비참하지만 어딘가 싸한 그 자의 웃음이 그려졌다.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느낀 감정은 모욕감이었다. 그 놈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나를 조롱하고 경멸하는 그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몸짓에서 멈추어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굳어버렸다. 이제 아무도 저 자의 태엽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야 나의 태엽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것이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먼동이 트려 할 무렵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차갑고 습한 공기를 밀쳐내었다.

 

나는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팔을 들어 올려 바람에 가누었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양 쪽 발은 진흙 위에 고정된 상태로 팔을 휘저으며 두 다리를 번갈아 가면서 찌그러트렸다. 몸의 장단에 맞추어 시야가 팩팩 돌아갔다. 공기가 뺨을 스치고 찬 볼이 점점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보다는 몸 전체가 마르고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모래 탑처럼 폭삭 내려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가뭄이 든 흙바닥처럼 피부 표면이 쩍쩍 갈라지고 몸 속 깊숙한 곳의 수분도 점차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제 해는 완전히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이 올 것이고 사람들의 하루는 흘러갈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춤을 추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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