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과 관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1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연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할 일은 원인을 파악해내는 것이다." 그는 모든 운동에는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자연철학에 "무엇이 운동을 유지시키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질문에 대답한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갈릴레오다. 그 또한 처음에는 운동의 지속을 탐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운동 자체의 상태에 주목했다. 그렇게 갈릴레오는 물체는 근원적인 '운동의 양'을 지니므로, 운동은 저절로 유지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무엇이 운동을 유지시키는가?'라고 물었던 아리스토텔레의 질문은 틀린 질문이었던 것이다. 지속적인 원인이 없이도, 물체의 본성이 운동을 유지시킬 수 있으므로. 한 단어로 '관성'이니까 말이다. 갈릴레오는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표를 지워버렸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이 있다. 바로 같은 논리가 생물체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물음은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대부분의 삶에는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다. 살아가려는 경향은 내장된 본능이다. 우리는 30억년이라는 자연의 거름채 속에서 살아남았다. 이 속에서는, 닥치고 살아가는 유기체만이 생존했다. “무엇이 공을 굴러가게 하는가?”라는 질문이 의미가 없듯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도 보통 의미 없기 마련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은 삶에 대한 확증 편향에 가깝다. 그럼에도 질문을 던지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관성을 깨닫는 것이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이 원한 것은 도입에서 꺼낸 시답잖은 본성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다만, 살아가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우선 깨달아야한다. 그래야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관성을 인식했다면, 이제 질문을 달리해보자. "인간은 무엇으로서 살아가야하는가?"라고. 알베르 카뮈와, 톨스토이 그리고 나의 대답을 들어보자.

 

2. 인간은 무엇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 : 알베르 카뮈의 대답

카뮈는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철학자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실존을 추구하는 인간을 원했다. 그가 제시한 답은 반항하는 인간이다. 이 신명나는 반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시지프 신화>를 들여다보자.

 

<시지프 신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조리에 대해 논한다. 여기서 부조리라는 용어는 철학자마다 저마다 다른 정의를 내린다. 카뮈가 정의하는 부조리는 일종의 감정이다. 결함 투성이 이성과 비합리적인 세상 사이의 관계를 생각할 때 느껴지는 불쾌한 느낌 말이다. 이어서 그는 부조리에 반항하기 위해 3가지를 지양하라 말한다.

 

첫 번째는 이성의 절대화다. 비합리적인 세상은 결코, 결함이 가득한 이성에 의해 완벽히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상이 거짓된 규칙을 부과하는 기만이다.

두 번째는 신이다. 신이라는 절대자를 상정하고 숨음으로써, 이성을 죽인다. 이성의 한계는 실재한다. 다만, 그것이 벽에 부딪혀 저항하기를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에게 기대지 않거, 우리는 질문하기를 멈추지 말아야한다.

세 번째는 자살이다. 자살은 언뜻 보면 주체적인 행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살의 본질은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없애는 것이다.

이성의 절대화, , 자살 이 3가지의 공통점이 보이는가? 모두 비겁한 행위다. 이들은 부조리를 바라보는 것을 회피한다. 이성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 시야를 가린다. 안락한 신의 품으로 들어간다. 부조리를 칼처럼 단절시켜버린다. 그래서, 카뮈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인간은 비합리적이며, 신은 초월적이다. 하지만, 하나를 택해서는 곤란하다. 진리는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반항하는 것뿐이다.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대한 반항'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해야할 것은 직시.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부조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조리가 눈앞에서 꿈틀거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실존을 울부짖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멀어버린 두 눈이 의미하는 것, 그것이 반항하는 인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인간이 무엇으로서 살아가야 하느냐고? 우리는 죽기 전까지 매일을 사형수의 심정으로, 끊임없이 부조리에 반항하며 살아야 한다. 반항하는 인간으로서 숨셔야 한다. 카뮈의 답은 그렇다.

 

3. 인간은 무엇으로서 살아가야하는가 : 톨스토이의 대답

카뮈가 알싸한 맛이었다면, 톨스토이에게는 달콤한 향기가 난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꽤 많이 고민한 것 같다. 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소설에 본인의 답을 담았다.

소설에는 가난한 구두장이 세몬과, 그의 아내 마트료나, 의문의 남자 미하일이 등장한다. 책에서 반복되는 3번의 괴이한 행동들이 바로 책의 주제를 상징한다.

 

첫 번째는 세몬의 선행이다. 세몬은 발가벗고 눈에 파묻혀 있던 미하일을 우연히 목격했다. 하지만 그는 누굴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돈이 궁핍했고, 마냥 우울한 상태였다. 그렇게 그는 술에 절여진 상태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몬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만다. 미하일을 못 본 채 넘어가지 못했다. 세몬은 미하일에게 옷을 벗어주고 집까지 데려오게 된다.

두 번째는, 마트료나의 이해다. 세몬은 미하일을 집에 데려왔지만, 한 가지 관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바로 마트료나다. 그녀는 사 오라는 모피는 온데간데없고, 이상한 남자만을 데리고 온 세몬에게 화가 났다. 미하일을 당장 내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를 데려온 남편에게 화내고, 처음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마트료나도 결국 '이상한' 행동을 하고 만다. 미하일을 받아들이고, 잠자리를 내주고, 다 떨어져 가는 빵을 내주고야 만다.

세 번째는, 한 여자가 품은 사랑이다. 미하일은 세몬의 일을 도와주며 1년간 같이 살아간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여자도 '이상한'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두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모두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 엄마가 죽고, 고아가 된 두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없어 자신의 품으로 데려왔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세 가지의 이상한 행동들이 공통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톨스토이가 고민했던, 그리고 제시한 답은 사랑이다! 그는 인간이 사랑으로서만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떤 연유로 사람은 사랑으로 살고, 살아야 할까? 사실 사랑은 '이상한' 행위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호혜적 이타주의와 친족 이타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작중에도 '이상한 행동'들이 넘쳐난다.

세몬은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마트료나는 사랑으로 미하일을 보듬었다, 그리고 금방 굶어 죽을 거라 예상했던 두 아이는, 어느 한 여자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괴이한 행동들은 본인의 생존과 이득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울을 꺼내 비추면 재밌는 상황이 연출된다. 미하일은 세몬의 사랑 덕분에 몸을 녹였고, 마트료나의 사랑으로 집에 머물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는 아주머니의 사랑으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랑' 때문에 살 수 있었다. 톨스토이에게 인간은 나무였다. 그 나무는 자신을 위한 마음으로는 자랄 수 없었다. 타인의 사랑을 듬뿍 섭취해야지만, 듬직한 뿌리를 내리고, 연약한 꽃을 꺼내 보일 수 있었다.

 

톨스토이의 말마따나 인간은 사랑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나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랑은 삶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이 특정 대상을 향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한 태도로 변한다고 믿는다. 관심이 안에서 밖으로 향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존재를 실감하려는 삶의 태도로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실존하며 살기 위해,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까닭은

각각 자기 스스로의 일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톨스토이를 2가지로 분류하곤 한다. 하나는 '삶을 사랑하는 톨스토이'이며 다른 하나는 '청교도적 설교자로서의 톨스토이' . 이 소설에서는 후자의 모습을 역력하게 확인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말한 사랑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항상 하나님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쉽게 믿고 사랑할 수 없다. 그렇게 타고났고, 이렇게 자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톨스토이의 사랑을 추구할 수는 없는가? 아니다. 첫 번째 이유는, 톨스토이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인 메시지가 강하지만, 그 안에는 삶을 사랑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찾고, 따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본래 사랑은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믿음이고, 사랑은 삶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유신론적인 사랑일 필요는 없다. 그와 조금은 다르지만, 무신론적이고 종교적인 사랑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으로 살 수 있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4. 무엇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 : 나의 대답

 

, 이쯤에서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무엇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 뜬금없이 초반에 알베르 카뮈를 소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최근까지는 알베르 카뮈와 생각이 같았다. 반항하는 인간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래 반골 기질이 강한 터라, 하루하루 부조리와 투쟁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생각이 바뀐다. 세상에 대한 신념이 너무 공격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니체처럼 춤을 추면서, 모든 행위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매 순간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서, 나의 카뮈에 톨스토이가 적절히 섞여간다.

배합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원색과 섞여 그들과 같지만 다른, 독특한 신념이 자라났다.

 

나는 무엇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이렇다. 나는 매 순간 존재가 의미를 발생시키는 무엇으로 살아야 한다. 생각을 하다 보면, 존재라는 것이 항상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느낀다. 키보드를 계속 지켜보면서, 키보드라는 단어를 되뇌고 있으면 처음 보는 괴상한 물체가 앞에 나타난다.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본질로 여긴다. 존재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지속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의미를 발생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존재가 가치 있어지므로.

 

나는 존재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무엇으로 살아야 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여기서 무슨 의미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상투적인 말밖에 하지 못한다. 의미는 당신이 부여하는 것일 테니까. 나에게 의미는 이런 것들을 지칭한다.

 

매일매일 의무가 아니라 의지로 살아가는 매 순간

 

모르는 것을 공부하며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

 

숨이 터질 것 같을 때 이겨냈다는 승리감

 

통찰이 담긴 글을 읽고, 또렷해지는 눈빛

 

소중한 누군가가 생기고, 함께하는 일상

 

좋은 음악을 흐를 때, 느껴지는 꿈틀거림

 

내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지금 이 순간,

 

이것들 때문에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존재가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순간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기필코 깨어있는 상태로, 살아낼 것이다.

 

5.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으로서 살아야 하는가

 

사실 이 글이 다룬 명제는 2개밖에 없다. “죽지 못해 산다”, “삶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라는 뻔하디 뻔한 잠언들 말이다. 내가 부디, 두 문장에 담긴 참된 의미를 와닿게 설명했기를 바란다.

 

당신은 카뮈처럼 반항하고 싶은가? 아니면 카뮈에게 반항하고 싶은가? 톨스토이를 사랑하고 싶은가? 아니면 찢고 싶은가? 여기에 분명 정답은 없다. 초반에 힌트를 주었다시피, 답은 너에게 달렸다. 인간의 생은 본래 부조리하고 관성과 같다. 하지만 이를 명확히 깨닫고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인간의 생이 아니라, 당신의 삶이 된다.

 

너에게 이 말을 하고자, 또는 답을 묻고자, 글을 썼다. 당신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 나는 좋은 글을 읽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 정말 너무나도 좋다. 단 한 명에게라도, 내 글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서없는 글을 보내지만, 너 다운 대답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은 무엇으로서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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