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
수명을 전달할 수 있는 세계, 짧은 수명을 갖고 태어났으나 부유한 부모에 의해 다른 이들의 수명을 사 연명한 소희와 긴 수명을 갖고 태어났으나 부모의 강요로 어린 시절부터 수명을 팔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우재. 두 사람의 장례식을 마치 결혼식처럼 표현하여 결혼식의 구성 요소를 재현해 죽음을 대하는 담담한 태도를 나타냈다.

EXT. 숲 - DAY
울창한 숲속 작은 목조주택 하나가 있다. 한 여자가 주택 앞 나란히 심어진 나무들을 보고 있다. 나무들은 서로 다른 종으로, 어떤 나무는 키가 작고 잎이 뾰족하지만 어떤 나무는 키가 크고 잎이 넓적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나무들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목수는 여자의 뒤로 걸어가 묻는다.

목수: 마음에 드세요? (소희가 만지고 있는 나무를 보며)
소희: 조금은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목수 : 재질이 고민되시면, 크기 먼저 결정하시는 건 어떠세요?
소희: 그건 생각해뒀어요.
목수 어느 정도인가요?
소희: 가로 150센티미터에 세로 200센티미터, 높이는 40센티미터 정도요.
목수: 퀸 사이즈군요. (즉답한다.)
소희: 네, 맞아요. (그가 바로 알아차린 것을 놀라워하며) 조금 뒤척이더라도 비좁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목수: 퀸 사이즈라면 많이 작업해봐서 빠르게 할 수 있죠. 그러니 나무는 조금 더 고민해보셔도 돼요.
소희: 그러면……. (수첩을 몇 번 넘기더니 열흘 후의 날짜가 적힌 페이지 아래 “나무 결정하기”라 작성한다.)

INT. 차 안 - DAY
소희는 차 뒷좌석에 앉아 점점 멀어져가는 숲을 창문 너머로 바라본다. 손에는 항상 함께하는 수첩을 들고 있다. 운전석에는 소희와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었던 기사가 있다.

소희: 뭐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고르기 어려워요. (오늘 본 나무를 상상하는 듯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말은 점점 느려진다.) 제일 오래 잠들 곳이니 단단해야 할 텐데. (조금 미소지으며) 소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차 안의 분위기는 무거워진다. 기사는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다.
기사: 수첩은 몇 장 남았나요?
소희: 백 장, 조금 넘게. (이미 알고 있지만 구태여 수첩의 마지막 장을 펼쳐 날짜를 확인한다.)
기사: 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소희: 네?
기사: 그 남자, 찾았습니다. (머뭇거리다가)
소희: 살아있대요? (놀란 목소리로 물어본다.)
기사: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며칠 전에도 일하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희: 그 남자 먼저 보러 가죠.

EXT. 허름한 주택가- DUSK
소희: 계세요? (문을 두드리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누구 안 계세요? (조금 더 세게 두드리자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기사: 들어가 보시죠.

소희는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남자의 모습. 지붕 없는 마루에누워 자고 있다. 소희는 남자 옆에 조심히 앉는다. 소희의 긴 머리카락이 실수로 우재의 드러난 손에 닿는다. 우재는 손을 움찔 떨며 눈을 뜬다. 뒤척거리다가 이내 일어나고는 옆에 있는 소희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우재: 뭐……! 뭐야?
우재: (CONT'D) 누구야! (소희 뒤 건장한 기사를 보고 베고 있던 목침
베개를 치켜든다.) 빚 갚은 지가 언젠데…….
소희: 수명을 팔아 빚을 갚은 건가요?
우재: 누구냐니까! (자신이 수명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자 더 놀란다. 치켜든 베개를 더 위협적으로 가리킨다.)
소희: 십 년 전, 당신에게 수명을 산 사람이에요.
우재: 뭐……? (놀란 표정이 화난 표정으로 바뀌며 베개를 잡고 있던 손이 떨린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베개를 바닥으로 세게 내던진다.) 너 때문에 몇 달 뒤에 죽게 생겼는데……!
소희: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우재: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희: 죄송해요……. (죄책감에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더 깊게 숙인다.)
우재: 수명은 바닥났을 거고, 죽을 날 받아 두고 미안한 마음이라도 들었어?
소희: 그래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맞아요.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그런데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계속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우재: ……왜? (소희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죄책감을 갖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풀어져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소희: 잠깐 얘기할까요?
우재: 그래……. 뭐. (문을 연다.) 들어와. (소희를 방 안으로 안내한다.)

INT. 우재의 방 안 - DUSK
소희: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일하신다고요?
우재: 그런 것까지 조사했어?
소희: 들었어요. 일을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도.
우재: 어차피 돈이 다 떨어져서, 내일부터는 나가야 해.

소희는 가방에서 봉투를 찾아 내민다. 우재는 별 기대 없이 봉투를 열었으나, 안에는 천만 원짜리 수표가 있다.
우재: (CONT'D) 뭐야……!
소희: 단 하루의 수명도 이 돈으로 갚을 수 없겠지만……. 필요하신 만큼 쓰라고 담았어요. 부족하면 연락하시고요. (명함을 내민다.)
우재: 너 돈 많아? 그렇게 수명을 사고도? 소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우재: (CONT'D) 이런 거 필요 없어.
(흥분한 목소리로) 그 돈으로 내가 너한테 판 수명 1년만 사줘. (책상 반대편에 앉아 있는 소희에게 가까이
몸을 붙이며) 요즘 수명 1년에 1억도 안 해. 살 수 있잖아. 그 정도 돈은
있잖아……!
소희: 죄송하지만, 수명을 사고파는 것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아요.
우재: 뭐? (기가 찬 목소리로) 너는 남들에게 빼앗은 목숨으로 살아놓고 이제 와서는 수명을 살 수 없다고?
소희: 맞아요. 제가 이때껏 타인의 삶을 짓밟고 살아왔다는 걸 아는 만큼 다시는 사고 싶지 않아요. (강한 어조로) 제 수명도 백일 남짓 남았지만, 오십일은 드릴 수 있어요. 머지 날들은, 저 역시 인생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죄송합니다.
우재: 오십 일 갖고 뭘 한다고……! 1년만 사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소희: 저에게 1년이 있었다면 드렸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에게 1년을 사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1년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재: 다른 사람 따위 알 바 아냐! 그게 미안하면, 백 살 넘게 살 수 있는 사람한테서 사면 되잖아. (화난 목소리로 소리친다.)
소희: 일 년이든 하루든, 누구의 목숨도 빼앗고 싶지 않아요. 우재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안을 걸어 다닌다. 소희의 결심이 굳은 것을 느꼈기에 돈이라도 받기 위해 화난 감정을 애써 삼킨다.
우재: 수명이 안된다면 돈이라도 줘.
(천만 원을 꺼내 지갑에 쑤셔 넣는다.)
소희: 그래요. 얼마가 필요하죠?
우재: 1억.
소희: 다시 준비해서 찾아올게요. 수명은 살 수 없도록 카드로 드릴 겁니다. (옷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재: 그래. (소희를 붙잡으며) 그리고 네 오십일도 받아야겠어.
소희: 수명 전달을 위한 서류도 준비할게요.
우재: 고맙다.

소희는 자신이 우재를 찾아온 이유를 떠올리고는 망설이다 결국 입을 뗀다. (MORE)

소희: 남은 시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 돈을 준 거고요.
우재: 네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소희: 저는 제가 바라는 죽음을 맞는 것. 그걸 위한 준비가 더없이 행복해요.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도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어요.
우재: (뜸을 들이다가) 그만 가.

소희는 우재의 집에서 걸어 나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에게 말한다.

소희: 일정이 앞당겨졌어요.
기사: 알겠습니다.

소희는 신경질적으로 수첩에서 오십 장을 뜯어내 버린다. 이내 바람이 불어 우재의 집 마당에 떨어져 있던 종이들이 나풀나풀 날아간다. 한 장 한 장 모두 소희가 꾹꾹 눌러쓴 하루만큼의 생명이다.

INT. 우재의 집 - DAY
소희는 허리를 숙여 어제 자신이 충동적으로 찢어버린 종이 중 아직 마당에 남아 있는 한 장을 집는다. 미련이 남은 얼굴로 종이의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이내 구겨서 던져버린다. 기사는 소희의 옆에 수명 전달 관련 서류와 수표 열 장이 담긴 봉투를 들고 묵묵히 서 있다.

소희: 우재 씨. (마당에 서서 이름을 부른다.) 우재 씨? (MORE)
소희: (CONT'D) (마당을 걸으며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계세요?
기사: 부재중인 것 같습니다.
소희: 그럴 리가 없는데……. 한 번 들어가 보죠. (조심히 우재의 방문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본다) 

방 안에도 우재는 없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다 마신 술병 몇 개가 위태롭게 서 있다. 소희가 준 수표는 이미 현금으로 바꾼 듯 천 원권과 만 원권 몇 개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소희: (CONT'D) 그새……. (빈 술병을 하나 들어 좌우로 약하게 흔들어본다. 완전히 비어있다.) 그렇게도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리 없어요. (초조한 표정으로 방 안의 물건들을 훑어본다.) 한 번 우재 씨를 찾아보죠.

EXT. 우재의 마을 / MONTAGE - AFTERNOON
우재의 마을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니는 소희의 모습을 짧게 연결한다. 소희는 이곳저곳을 지나쳐 드디어 우재가 있는 곳을 찾는다. 시간은 어느새 해 질 녘이 되고 시끌벅적한 술집 앞에서 소희는 술집 앞에서 싸움이 붙은 우재를 발견한다.

EXT. 술집- DUAK
소희는 우재의 뒤편으로 뛰어가 주먹을 치켜든 우재의 몸을 붙잡는다.
우재: 이거 놔……! (취한 발음으로 귀찮다는 듯이 소희의 손을 떨쳐내려 한다.)
소희: (CONT'D)
소희: 그만해! (우재를 가로막고 선다.)
소희: (CONT'D)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 사람, 죽을 날 얼마 안 남았어요. (지갑에서 적잖은 양의 현금을 꺼내 상대방에게 건넨다.)
주민: 뭐? (현금을 확 채가 돈을 세어본다. 금액에 놀란 표정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 (우재의 어깨를 퍽 치고 퇴장)
우재: (소희의 어깨를 잡고 말을 꺼내려다 술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손을 거칠게 뗀다.) ……따라와.

EXT. 술집 뒷골목 - NIGHT
희미하게 빛이 드는 골목길 안쪽 어두운 곳에 우재는 비딱하게 기대선다. 빛줄기를 받은 소희는 상대적으로 밝게, 우재는 어둡게 보인다.
우재: 그깟 돈 안 줘도 해결할 수 있었어. (짜증난 목소리로)
소희: 내가 준 돈으로 해결했겠지.
우재: 어차피 네가 1억 주기로 했으니까 상관없어.
소희: 얼마를 받아도 술 먹고 돈 물어주면 금방일걸?
우재: 그러면 너한테 더 달라고 하면 되지. 너 돈 많잖아. (뻔뻔한 목소리로)
소희: 이렇게 쓸 거면 더 줄 생각 없어.
우재: 이 돈, 내 수명 판 값이잖아. (상기된 목소리로) 내가 어디에 쓰든 무슨 상관이야? 속죄라며? 나한테 이렇게 대하고 편하게 눈감을 수 있겠어? (빠르게 쏘아붙인다.)
소희: 어.
우재: 뭐라고? (당황한다.)
소희: 약속한 1억과 수명 50일은 줄게. (새로 발급받은 카드 한 장을 꺼내 주고는 시계를 흘깃 본다.) 이제 수명 전달 기관은 닫았을 테니까, 다시 약속 잡고.
우재: ……그래. (재빨리 카드를 챙겨 뒷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돌아가려는 우재의 뒷모습을 보고 수명에 집착하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소희는, 망설이다 결국 우재를 불러 세운다.

소희: 너는 그토록 수명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이대로는 몇 년을 더 살아도 불행할 거야.
우재: 뭐? (갑작스러운 소희의 말에 뒤돌아본다.)
소희: 하루라도 더 살아서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생각해보긴 했어?
우재: 네가 무슨 상관인데? 나는 그냥 너한테 빼앗긴 걸 돌려받으려는 것뿐이야. (격해진 목소리로)
소희: 난 내 짧은 수명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단 하루도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너도 아마 끊임없이 느꼈을…… 무언가에게 쫓기는 듯한 기분이었어. (숨을 내쉬고는) 내가 너를 찾고, 관을 맞추고, 드레스를 준비하고, 그런 건 전부……, 더이상 무언가에게 펜을 쥐여주고 내 삶을 멋대로 써 내려가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야. (우재를 마주 보고)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소희의 말을 들은 우재는 동요한 표정이다.
우재: ……갈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소희: 그래.
우재: 약속한 수명은?
소희: 모레 다시 봐.

소희는 일어나 골목을 나선다. 우재는 소희가 사라진 골목길에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EXT. 목수의 작업실 - AFTERNOON
정교하게 재단된 나무와 제법 모양을 갖춘 목조품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는 목수의 작업실, 소희는 한 퀸
사이즈 침대 프레임 위에 조심스럽게 앉아 나뭇결을 매만지고 있다.

목수: 전부터 그 나무를 좋아하시네요.
소희: ……따듯해 보여서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이 침대의 주인은 누군가요?
목수: 결혼을 앞둔 신혼부부에게 주문받았어요.
소희: 그렇군요.
목수: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소희: 사실 일정이 앞당겨져서…….(말끝을 흐린다.) 오십 일 후까지 가능할까요?
목수: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편히 둘러보세요. (퇴장한다.)

소희는 침대 프레임의 나무를 한참 바라보고는 힘없이 침대에 몸을 기댄다.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카메라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는 소희를 비춘다. 소희의 눈꺼풀이 감기고 장면이 전환된다.

INT. 호텔 / MONTAGE - DAWN
술에 취해 퀸 사이즈의 새하얀 침대에서 뒤척이는 우재. 술의 영향으로 불쾌한 듯 일그러진 표정이다. 우재의 눈이 번뜩 뜨이는 것으로 장면이 시작된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우재는 어디가 불편한 듯 계속 뒤척거리고, 우재의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술집과 어두운 거리의 모습이 어지럽게 오간다. 즉 우재가 눈을 감을 때 우재의 모습이 페이드아웃되며 씬을 짧게 비추고, 우재가 거칠게 숨을 내쉴 때 씬이 끝난다. 점점 장면의 길이가 짧아지고 우재의 숨소리도 더 거칠어져 가다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INT. 호텔 - MORNING
우재는 불쾌한 얼굴로 전화를 받는다.

우재: 여보세요? 학생 수명 산다는 글 보고 연락드렸어요. (전화 너머 잡음이 섞여 들린다.)
우재: 어디예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

EXT. 고등학교 앞 - AFTERNOON
하교 시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몰려나온다. 우재는 고등학교 앞 벤치에 앉아 수명을 팔겠다고 연락한 학생을 기다린다. 이내 한 남학생이 우재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아직 앳된 모습이 역력한 얼굴이다.

학생: 글 올린 분 맞죠? (우재의 옆에 앉는다.)
우재: ……몇 살이에요? (학생의 모습이 어린 자신을 연상시켜 신경이 거슬린다.)
학생: 열여덟 살이요. (불편한 표정으로)
우재: 수명은 몇 년 남았어요?
학생: 오십 년은 남았을걸요. 왜요? (우재의 질문에 더욱 불편해한다.)
우재: 아니, 그냥. (조금 망설이다가)
왜 파는 거예요?
학생: 하……. (짜증난다는 듯이) 안 살 거면 갈게요.

벤치 옆에 둔 가방을 다시 메고 일어나려는 학생을 우재는 붙잡는다. 그리고 소희에게 받은 오백만 원을 건넨다.
우재: 살게요. 내가 지금 현금은 이거밖에 없고, 카드밖에 안 되거든요. 그니까 백화점 가서 긁고 바로 중고 매장 가서 팔아요.
학생: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가방을 열어 봉투를 넣는다.)
우재: 음……. 반년.
학생: 그러면 천만 원이요.
우재: 왜 그렇게 싸게 받아요?
학생: 싸게 파는 것도 문제예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다.)

수명의 거래는 불법이기에 수명 전달 시에 제출하는 서류 중에서는 전달의 동기 등을 작성하는 서류가 있다. 학생은 이런 거래가 익숙한 듯 쉽게 서류에 거짓말을 채워간다. 그 모습이 우재에겐 과거의 자신을 떠오르게 만든다.

우재: 뭐라고 썼어요? (서류를 잡아채고는 쭉 읽는다.) 우재는 제 오랜 친구입니다……. 친구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학생: 뭐 하시는 거예요? (불쾌한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잡아챈다.)
우재: 그렇게 허술하게 써도 돼요? 나이도 여섯 살이나 차이나는데 친구라고 쓰면 들키잖아요.
학생: 인터넷에서 본대로 쓰는 거예요.
우재: 직원이 의심할걸요? 아, 누나 남편이라고 쓰는 건 어때요? 스물넷이니까 결혼하긴 이른가? 친척이라고 하기엔 성이 다르네. (자신 역시 수없이 써본 서류이기에 끊임없이 거짓말이 나온다.)
학생: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쓰세요.
(빈정거리는 말투로 펜과 서류를 준다.)
우재: 줘봐요.

우재는 서류에 익숙한 듯 거짓말을 써내려 가려고 한다.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상황을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수명을 빼앗는 입장이 되어 겪고 있다. 신경이 거슬리다 못해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다. 우재는 펜으로 어렵게 한 줄을 썼다가 볼펜으로 그어 없애기를 반복한다. 별생각 없이 옆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학생은 몇 분이 지나고서야 이상함을 느끼고 우재를 본다.

학생: 뭐예요? 그렇게 펜으로 그어 놓으면 어떻게 제출해요? (화가 난 목소리로)
우재: 그러게. 이러면 어떻게 제출하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난다.) 서류가 그렇게 돼서 수명은 못 사겠네요.

학생은 몇 마디 짧게 욕을 하더니 가방에서 도로 봉투를 꺼낸다. 우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더니 봉투를 받지 않고 그대로 학생을 떠난다.

학생: 저기요. 안 가져가세요? (뒤에서 우재를 부른다.)

걸으면 걸을수록 마음은 복잡해지기만 한다. 점점 빠르게 걸으면서 우재는 더욱 표정을 구긴다. 아직 마음을 지배했던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학생:  (CONT'D) 저기요! (우재의 걸음걸이를 맞춰 뛰느라 조금 헐떡대는 목소리로)

카메라는 학생을 비춘다. 교복을 입은 어린 모습, 혹시나 우재가 돈을 거저 줄까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 섞인 의아한 표정, 일 년쯤은 쉽게 여기는 목소리, 서투른 거짓말로 당연한 듯 작성하는 서류, 모두 우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 뿐이다. 우재는 더이상 학생의 눈을 마주 보고 설 수 없어 도망친다.

EXT. 수명 전달 기관 앞 - MORNING 
이른 아침, 수명 전달 기관 앞에 서있는 우재의 앞으로 소희의 차가 멈춰 선다. 카메라는 수명 전달 서류를 찬찬히 읽으며 다시금 결심을 굳히는 소희의 옆얼굴을 비춘다. 이내 소희는 차에서 내려 우재에게 말을 꺼낸다.

소희: 들어가자. (MORE)
우재: 그……. (망설인다.)
소희: 왜?
우재: 생각해봤는데. (잠깐의 정적) 50일은 조금 과한 것 같다.
소희: 그러면 얼마나 필요한데? (의외의 말에 놀란 표정으로)
우재: 모르겠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나한테 남은 두세 달 만에 행복해지는 게 가능할까. (말을 잇는다.) 어차피 안되는 거라면…… 그냥 너한테 수명을 받고 지금처럼 돈이나 쓰면서 사는 게 나을까.
소희: 아니야,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어. (바뀐 우재의 태도에 기뻐하며 미소 짓는다.) 잘 생각했어. 정말로……. (우재의 손을 어색하게 잡는다.) 내가 도와줄게.
우재: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흔들리는 목소리로)
소희: 네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네가 원하는 마지막이 무엇인지. 하나씩 찾아갈 수 있도록 옆에 있어 줄게. (곰곰이 생각하다가) 너만 괜찮다면…… 나랑 같이 초대장도 쓰고 사진도 찍자. (MORE)
소희:  (CONT'D) 그러다 보면 네가 바라는 스스로의 마지막 모습도 점점 분명해질 거야.
우재: 딱히 부를 사람도 없고, 애초에 장례식을 치러줄 사람도 없는데.
소희: 왜 없어. (웃는다.)

소희는 준비해 온 수명 전달을 위한 서류를 본다. 이내 소희는 우재를 이끌고 수명 전달 기관을 향해 걸어간다.

우재: 왜? (의아한 얼굴로)
소희: 난 짧은 시간이나마 시간이라도 네게 주고 싶어. 일 년이라는 시간보다는 훨씬 짧겠지만……. (결단한 표정으로)
우재: 뭐……. (고민하다가) 정 주고 싶으면 줘.
소희: 음……. 너는 70일 정도 남았지?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해본다.)
우재: 맞아.
소희: 그래, 그럼.

INT. 수명 전달 기관 안 - MORNING
병원 검사실과 같은 풍경의 결벽적으로 깨끗한 조용한 수명 전달실 안. 우재와 소희는 타원형의 긴 기계
안에 함께 누워있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죄책감과 긴장감으로 소희의 손과 어깨가 불안하게 떨린다.

우재: 괜찮아?
소희: ……응. (초조한 표정으로)

우재와 소희는 기계음이 시키는 대로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눕는다. 우재는 소희가 긴장한 것을 눈치채고 소희를 흘깃 쳐다본다.

우재: 곧 끝날 거야. 알잖아.
소희: 너는 괜찮아……? (떨리는 목소리로)
우재: 별로 좋지는 않아.

소희는 이 비좁은 곳에 누워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수명을 주었을 어린 우재의 모습을 떠올린다.

소희: 미안해. (애써 담담하게 말한다.)
우재: 뭐가. (무심하게 답한다.) 네가 나한테 수명을 주는 건데, 미안할 게 뭐 있어.
소희: 전부 다. (눈을 감고서는) (MORE)
소희:  (CONT'D) 내가 조금 더 빨리 너를 찾아서, 네가 빼앗긴 시간을 돌려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재: 네가 가져간 시간은 겨우 1년인데, 뭐……. (조금 뒤척거리다 역시 눈을 감는다.) 됐어…….
소희: 다 끝나면……. (나지막이 속삭인다.) 같이 드레스 보러 갈래?
우재: 그러던가. (속삭인다.)

이내 기계장치의 불이 꺼지고 작동이 시작함에 따라 웅웅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이로써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눈감을 수 있다.

INT. 드레스 샵 - DAY
화려하고 값비싼 드레스들이 걸린 드레스 샵에서 소희는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드레스룸에서 걸어 나온다. 우재는 멋쩍은 듯 앉아 있다.

소희: 어때?
우재: 모르겠어.

소희는 우재 옆에 걸터앉는다.

소희: 재미없어?
우재: 아니, 진짜 모르겠어서 그래.
소희: (CONT'D)
소희: 중요한 옷인데 좀 더 신경 써서 대답해봐.
우재: 언제 입으려고?
소희: 마지막 날에 입을 드레스야. (무덤덤하게 말한다.) 자, 재미없으면 너도 골라볼래?
우재: 드레스를?
소희: 아니. (웃는다.) 뒤쪽에 턱시도도 있어.

이번엔 반대로 소희가 우재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고, 우재가 턱시도 하나를 입고 드레스룸에서 걸어나온다. 서로 드레스와 턱시도를 고르는 장면들이 짧게 이어지고 장면이 전환된다.

EXT. 드레스 샵 앞 - AFTERNOON
둘은 각각 쇼핑백 하나씩을 들고 드레스 샵을 나선다.

우재? 드레스도 준비하고 있었어?
소희: 평소에 생각하던 것 중에 하나야. (여전히 미소 짓고 있지만, 조금 쓸쓸해 보인다.) 내 마지막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내가 정말 행복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우재: 바빴겠네. (조금 말을 멈췄다가) 그런데 나한테 오십 일이나 주려고 했어?
소희: 오십 일이든 백 일이든 거기서 거기지. (애써 담담하게 대답한다.) 이거 볼래? (매일의 계획을 적는 수첩을 펼쳐 보여준다.)

우재는 소희의 수첩을 첫 장부터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초반 페이지에는 우재를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담겨 있다. 중반부터는 관을 맞추고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을 정하는 등의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 있다. 마지막 나날들을 충실히 또 행복하게 살아가는 소희의 모습에 우재는 다시금 소희의 삶을 빼앗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오늘의 계획을 담은 페이지가 되어 우재는 손을 멈춘다.

우재: 나무 고르기……? (의아한 표정으로 수첩에 적힌 오늘의 계획 중 “나무 고르기”라 적힌 항목을 가리킨다.) 이건 뭐야?
소희: 직접 볼래?

EXT. 나무가 빽빽이 자란 숲의 한가운데 - DUSK
소희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숲을 거닌다. 우재는 처음 보는 숲의 모습에 두리번거리며 소희를 따라 걷고 있다. 이내 소희는 자신이 목수의 작업실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나무를 찾고는 멈춰 선다.

소희: 어때?
우재: 음……. 얇네. 하얗고.
소희: 그게 다야? (가볍게 웃는다.)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나무가 따듯하게 느껴졌어. (나무를 껴안는다.)

우재는 부드러운 소희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는다.

우재: 관은 어떤 모습이야?
소희: 퀸 사이즈 침대.
우재: 특이하네.
소희: 그렇지? 어딘가에 묻히는 건 답답해서. (나지막이 말을 이어간다.) 유명하다는 장례식장은 다 가봤지만, 여기 숲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 침대 위에서 잠들듯이 눈감아도 된다는 것도 좋고. 우재는 머뭇거리다 소희가 안고 있는 나무의 옆으로 가 조심스럽게 나무를 만져본다.

INT. 소희의 저택 현관 - AFTERNOON
초인종 소리와 함께 저택의 문이 열린다. 두 팔을 걷은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소희의 뺨은 힘을 많이 써 조금 상기되어있다.

소희: 왔어? (소희는 우재를 안으로 안내해준다.)

INT. 소희의 저택 거실 - AFTERNOON
청소를 막 시작한 거실은 군데군데 쌓인 박스로 어지럽다.

우재: 어디부터 도와주면 될까? (방이 여섯 개는 되어 보이는 넓은 집을
둘러본다.)
소희: 내 방은 다 치웠고, 막 거실부터 치우고 있었어.
우재: 그래. (양 소매를 걷어 올리고 멀뚱히 소희를 쳐다본다.)
소희: 아, 전부 박스에 담아주면 돼. (우재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마워.
우재: 됐어, 무거운 것도 없는데.
소희: 대부분은 진작에 정리했어. 여기 있는 것들은 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들 뿐이라서.
우재: 그런 걸 전부 버려도 돼?
소희: 응, 어차피 들고 들어갈 것도 아니고.
우재: 관도 침대 모양으로 만들었으면서, 짐 몇 개 좀 못 갖고 들어갈 건 뭐 있어.
소희: 그러게. (웃는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들이 전부 소중히 아끼던 거라면 아쉬워서 어떻게 눈을 감겠어. (좋아하던 책을 기계적으로 박스에 담으려다, 제목과 표지를 보고 조금 멈칫하며) 청소하면서 하나, 하나 버리다 보면 내 안에 남아있던 미련도 하나씩 사라져서……. (책을 박스에 넣는다.) 그날 역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꽉 찬 박스를 닫아버린다.) 버리는 그 날로 그것과 내 추억은 끝나버리잖아? (박스가 잘 밀봉되도록 테이프를 붙이며) 누구나 몇 번, 아니 몇십 번씩은 죽음을 겪는 거지. (박스를 들어 한곳에 모인 박스 더미에 가져다 둔다.)

많은 것을 소유해본 적 없는 우재지만, 소희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소희 (CONT'D): 너도 청소할 때 불러. 도와줄게. (빈 유리 수조를 옮기려 하지만, 무거워서
들지 못한다.)
우재: 됐어. (수조를 대신 들어서 옮겨준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소희: 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게 있으면 대신 결정해줄 수 있어. 어때?
우재: 글쎄……. 그런 게 있을까. (박스를 옮기는 양 말끝을 흐린다.)
소희: 많을걸. (다 안다는 듯이) ……됐다. (이내 마지막 박스를 닫고는 거실의 청소를
마친다.)
우재: 끝났어?
소희: 서재가 남긴 했어. (조금 망설이다가)

소희가 왜 망설이는지 짐작이 가는 우재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다.

우재: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게 있으면 도와줄게. (조금 흘러내린 소매를 다시 걷으며) 가자.
소희: ……그래. (마지못해 우재와 함께 서재로 걸어간다.)

INT. 소희의 저택 서재 - AFTERNOON
박스와 정리 중인 물건으로 어지러웠던 거실이나, 대부분 물건이 사라져 을씨년스러웠던 복도와 달리 서재는 잘 관리되어 있다. 책장은 정렬된 책으로 꽉 차 있으며 책상에 놓인 노트 등이 방금이라도 사람이 다녀간 듯한 느낌을 준다.

소희: 여기 물건은 끝내 못 치우겠더라. (책장에 다가가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책장의 책들을 하나씩 훑어본다.) 그래서 부모님이 쓰시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우재: 그러게……. (방안을 둘러본다.)
소희: 오늘은 치워야지. (우재를 보고 서서) 이 집은 내가 죽어도 새로운 주인을 맞을 텐데, 다른 사람이 마구잡이로 부모님의 책을 버리는 건 마음 아프잖아.
우재: ……그래. 어디부터 치울까.
소희: 책장만 정리해줄래? 책은 도서관에 기부할 생각이어서.

우재는 왼쪽 칸부터 몇 권씩 책을 잡아 박스에 넣는다. 소희는 책상에서 부모님의 노트나 필기구를
조심스레 정리해 박스에 넣는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린다.

소희 (CONT'D): 아마 박스를 수거하려고 부른 사람들일 거야. (우재를 보며) 갔다 올게.
우재: 그래.

소희가 방에서 떠나고, 우재는 계속 책을 정리한다. 우재의 시선은 우연히 소희가 짐을 넣던 박스에 닿는다. 박스 제일 위에는 파일철이 있는데, 투명한 커버 아래 우재의 이름이 보인다. 우재는 놀라 파일철을 꺼내서 읽어본다. 백 장은 족히 되는 파일철은 모두 소희가 우재를 포함해 자신에게 수명을 판 사람들을 찾았던 기록이다. 이름, 나이, 마지막으로 발견한 위치 등이 적혀 있다. 소희가 얻은 대부분 수명은 부모님의 것이고, 기록 속 사람들에게 얻은 수명은 각각 최대 1년 정도이다. 다만 소희에게 수명을 팔았던 사람들은 보통 빚이나 생계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명을 팔았기 때문에 너무 이른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우재를 제외한 모두의 기록은 전부 소희가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끝난다. 우재는 용서를 빌기 위해 간절히 쫓았던 사람들의 죽음을 계속 목도했을 소희에게 연민을 느낀다.

소희: ……봤어? (어느새 우재 앞에 다가와 있다. 흔들리는 표정. 우재가 들고 있는 파일이 무엇인지
본 듯하다.)
우재: ……미안. (종이를 다시 정리해 넣어둔다.) 내 이름이 보여서.
소희: 아냐. (책상을 향해 걸어가 의자에 앉아 서랍장에서 한 일기장을 꺼낸다.)

우재는 책상에 몸을 살짝 기대앉아 소희와 일기장을 바라본다.

소희 (CONT'D): 일기장이야. 장례식을 치르고 서재를 정리하다 우연히 찾았어. (일기장의 표지를 넘긴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됐어. 그전엔 내 수명이 전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건 줄로만 알았어.

일기장의 첫 페이지는 소희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소희는 24시간도 채 되지 않는 수명을 갖고 태어났다. 소희의 부모님은 결혼할 때 수명을 서로 맞춰 30년 남짓의 수명이 남아있었다. 부모님은 소희에게 모든 수명을 주고 죽을지 고민했으나 소희가 태어난 순간부터 보호자 없이 살아가게 놔둘 수 없었고, 결국 소희에게 각각 10년씩을 주어 소희가 20살이 될 때까지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또한 소희가 어릴 때 사람들을 수소문해 수명을 사서 주었고, 엄청난 돈을 쓴 끝에 4년의 수명을 더 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희가 수명을 받은 것은 5살, 우재에게였다. 이후로 일기는 끊겨 있다.

소희 (CONT'D):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지켜주고, 수명을 준 부모님께 항상 미안했고…… 사랑했어.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그런데 내가 받은 사랑이 실은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은 결과라는 걸 알게 되자, 부모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최대한 빨리 일기장 속의 사람들을 찾아 수명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늦었지. 십오 년이라는 시간 새 그들은 모두…….

일기장을 든 소희의 손은 조금 떨린다.

우재: 적어도 난……. (고민하다 말을 잇는다.) 네가 없었다면 1년을 더 살아도 똑같았을 거야. 관심 없는 일을 하고, 애정 없는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내가 무엇을 바라고 언제 행복한지 고민해보지도 못하고 죽었겠지.
소희: ……넌 계속 내가 미웠어? (망설이다가 물어본다.)
우재: 미웠어.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담담한 목소리로) 네가 수명을 받았을 때 너는 5살이었어. 내가 수명을 주었을 때 나도 5살이었고.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우린 그 기계 안에 있었겠지. 그때 나는 네가 밉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난 네가 걱정되었을 거야. 너무 컸던 기계 안에서 네 존재가 나에겐 따듯했을 거야…….

몇 년 동안이나 죄책감에 매몰되어 살았던 소희는 우재의 말을 듣고는 동요된 표정이다.

소희: 나는……. (북받친 목소리로) 아마도 나를……. (흔들리는 눈동자. 눈물이 조금 고인다.) 소희를 비추던 카메라는 우재의 등에 점점 가려진다. 우재는 소희를 껴안는다. 소희의 얼굴을 비추지는 않으나, 소희의 손이 우재의 셔츠를 세게 그러쥐는 것으로 소희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INT. 우재의 집 - AFTERNOON
어느 오후. 우재와 소희는 편한 자세로 누워 나른한 여유를 즐긴다. 소희는 미리 인쇄한 초대장에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이름을 펜으로 쓰고 있다. 우재는 소희가 쓴 초대장을 봉투에 넣고 있다.

소희: 누구를 부르지……. (고민하는 목소리로)

우재는 슬쩍 초대장을 본다. 한편에 쌓인 완성된 초대장이 벌써 스무 장은 되어 보인다.

우재: 충분하지 않아? (의아한 얼굴로)
소희: 단출하게 할 생각이면 괜찮지. 근데 친척분들이나 부모님의 친구들도 다 불러야 할지, 동창들은 누구를 불러야 할지 그런 게 고민이야.
우재: 그러게. (우재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이야기이기에 감흥 없는 목소리로)
소희: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우재: 뭘 어떻게 해.
소희: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싶은 사람들 없어?
우재: 그런 사람 없어.
소희: 공사장에서 만난 분들도?
우재: 그 사람들 얼굴을 왜 봐.
소희: 오랫동안 알고 지냈잖아. 사이 안 좋아?
우재: 그런 건 아냐. (고민하다가) 그 아저씨는…… 봐도 될 것 같고.
소희: 누군데?
우재: 나한테 일 주는 사람.
소희: 그래, 누구든 좋으니 꼭 얘기 나눠봐. (미소 지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건 아쉽잖아.
우재: ……응. (소희의 말이 조금 가슴을 찌른 듯 복잡한 표정이다.)
소희: 내일 시간 있으면, 같이 사진 찍으러 갈래?

INT. 사진관 - AFTERNOON
한적하고 아기자기한 거리 가운데 위치한 사진관. 소희는 스튜디오에서 영정사진을 위한 촬영을 진행 중이다. 우재는 밖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관을 둘러보며 소희를 기다리고 있다. 스튜디오에서는 사진 기사와 소희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사진 기사: 조금만 왼쪽으로 가볼래요? (이내) 왜 이렇게 표정이 딱딱해, 웃어 봐요.
소희: 이렇게요……?

찰칵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진 기사: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웃어 봐요.
소희: 자연스럽게……. 네!

몇 장 더 사진을 촬영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희와 사진 기사는 스튜디오에서 나온다.

사진 기사: 음……. 한 번 직접 봐요. (PC를 켜서 방금 촬영한 사진을 소희에게 보여준다.)
소희: 제 표정이 이렇다고요? (사진을 보고는 너무 딱딱한 자신의 얼굴에 깜짝 놀라서)
사진 기사: 다시 찍을까요? 이번에는 남자분도 들어와 보실래요?
우재: 네?

INT. 스튜디오 - AFTERNOON
자, 찍습니다, 하는 사진 기사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앉은 소희를 비춘다. 전보다 더 노력하는 듯 입에는 웃음이 걸려있긴 하나 여전히 어색하다. 우재는 소희의 긴장한 어깨가 보인다.

우재: 평소엔 자주 웃으면서. (혼잣말로)

소희는 자신 때문에 계속 기다리는 우재가 신경 쓰이는 듯 힐끗 쳐다본다.

소희: 너도 찍을래?
우재: 난 됐어. (팔짱을 끼고) 근데 이래선 사진 찍다가 죽겠다. (농담조로)
소희: 그래? ……나갈까? (미안한 듯)
우재: 카메라 있어? (뜬금없이 질문한다.)
소희: 카메라는 왜?

EXT. 바닷가 - AFTERNOON
초점이 잡히지 않아 흐린 렌즈. 이내 아까의 옷차림 그대로 해변에서 미소 짓고 있는 소희에게 초점을 맞춘다. 해변에 들어올 때 신발을 벗어 모두 맨발이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힌다. 이처럼 씬은 계속 우재와 소희가 가진 카메라의 시점으로 촬영된다.

소희: 어때?
우재: 아까보다 훨씬 잘 웃네.
소희: 그래? (멋쩍은 듯) 이리 와. 나 혼자 놀면 심심해.

우재는 소희에게 다가간다. 걸음 때문에 카메라는 계속 잘게 흔들린다. 이내 우재는 소희 앞에 선다. 소희의 손이 다가오더니 우재의 팔을 잡는다. 카메라의 흔들림이 우재의 당황을 나타낸다. 소희는 우재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카메라를 잡고 있던 우재의 손이 떨어져 카메라는 이제 우재의 목에 걸려 얕게 찰랑거리는 바다에 잠긴 두 사람의 발을 비춘다.

우재: 야……! (당황한 목소리로)
소희: 왜?
우재: 요즘 바닷물 차가워.
소희: 오자고 한 건 너잖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바다 좋아해?
우재: 모르겠어.
소희:내가 보기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소희는 우재의 목에서 카메라를 빼내 자신의 목에 걸고는 우재에게 렌즈를 향한다.

우재: ……어렸을 땐 자주 왔어. (과거를 회상하며 복잡한 표정으로)
소희: 그래?
우재: 어. 수명을 팔게 되면서 다신 오게 될 일이 없었지만…… 그전까지는 자주 왔어. (허탈한 목소리로) ……네 말 맞아. 바다 좋아해. 데려와 줘서 고맙다. (조금 웃는다.)

소희는 자신도 모르게 촬영 버튼을 눌러 우재의 미소를 담는다.

소희: ……무슨 소리야. 네가 데려왔으면서.

우재와 소희는 찬찬히 바다를 걷는다. 대화에 집중한 소희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목에 걸린 카메라는 잘게 부서지는 해수면을 비춘다.

우재: 네가 사진관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바다에 올 일도 없었을 거고……. (종아리의 절반까지 밀려오는 시원한 바닷물을 느끼며 느리게 말한다.)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사진관에 갈 일도 없었을 거고.
소희: 아냐. 네가 용기를 내서 나를 만나게 된 거고. 네가 궁금해서 사진관에 가게 된 거고. 네가 그리워서 바다에 오게 된 거야. 지금 네가 행복하다면 전부 너 스스로가 가꾼 행복이야.
우재: ……지금은 확실히 좋아. (망설이는 목소리로) 바다도 좋고, 누군가와 다시 오게 될 줄 몰랐던…… 여기에 오게 된 것도 좋고.
소희: 그러면 웃어 봐. (카메라를 든다.)
우재: 뭐? (소희의 행동이 재밌는 듯 표정이 밝아진다.)

소희는 조금씩 구도를 바꾸어 가며 몇 장의 사진을 찍는다.

소희: 오늘 많이 웃네.
우재: ……그래? (조금 놀란 목소리로) 그러네. (수긍한다.)
소희: 잘 어울려.
우재: 어쩌면 난 그때만큼 행복해 본 적이 없어서 그토록 죽는 게 아쉬웠을지도 모르겠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바다 저편을 바라본다.) 그렇잖아. 일찍 죽는 것도 억울한데,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다는 게. (고개를 돌려 소희를 마주 본다. 고개를 돌릴 때 조금 흐려졌던 초점이 다시 잡힌다.)
소희: 나도…… 이만큼 마음 편히 웃어 본 건 오랜만이야.
우재: 다행이네. (자신이 소희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INT. 우재의 집 - DUSK
우재는 자신의 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신과 부모의 흔적이 녹록한 집이다. 치운다고 치웠지만 여전히 곳곳에 어릴 때의 기억이 가득하다. 우재는 서랍을 열어 앨범을 꺼내 넘겨본다. 웃고 있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우재는 이내 앨범을 닫고 집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INT. 친구의 결혼식 - AFTERNOON
소희가 수첩의 한 페이지, 결혼식이라 쓰인 항목에 체크하는 것으로 장면은 시작한다. 소희가 수첩을 닫아 가방에 넣자 단정한 옷을 갖춰 입은 우재가 보인다.

소희: 와줘서 고마워. (우재를 향해 걸어간다.)
우재: 친한 친구야?
소희: 맞아. 내 수명까지 다 알고 있는 친구야.

소희와 우재는 함께 신부대기실로 걸어간다. 안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희의 친구가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고 있다. 이내 친구는 소희를 발견한 듯 반갑게 인사한다.

소희의 친구: 어? 소희야! (반가운 얼굴로) 옆에는 누구셔?
소희: 친구. 너 오늘 진짜 예쁘다. (환하게 웃으며)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소희의 친구: 아냐, 딱 맞춰 왔어. (우재를 흘깃 본다. 연인이라 생각하는지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 찍을래?
소희: 그래. (우재를 보며) 너도 옆에 앉아.
우재: 나도?

소희가 우재를 끌어 친구 옆에 앉힌다. 신부대기실 한쪽의 사진 기사가 하나, 둘, 셋, 찍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사진을 촬영한다.

소희의 친구: 진짜 오랜만이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초대장 잘 받았어. 너도 진짜 너다……. 그런 걸 다 계획하고.

우재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리를 피해준다.

우재: 밖에서 기다릴게. (소희를 향해)

EXT. 신부대기실 바깥 - AFTERNOON
우재는 신부대기실 바깥에서 벽에 기대 소희를 기다린다. 따로 문이 있지 않아 소희와 친구의 대화 소리가 모두 들려 온다. 밝게 친구를 축복하는 소희의 목소리에 우재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진다. 이내 소희가 신부대기실 바깥으로 나온다.

소희: 많이 기다렸지.
우재: 아냐. (복잡한 표정으로) 괜찮아?
소희: 괜찮아. 왜? (의아한 목소리로)
우재: 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나라면 마냥 행복을 빌어주지 못했을 것 같아서. 차라리 난 네가 수명을 사서라도 더 살았으면 좋겠어. 단 하루라도.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너는 그럴만한 돈도 있고, 행복해질 능력도 있잖아.
소희: 우재야. (걱정해주는 우재가 고마운 듯) 나는 누구의 행복도 빼앗고 싶지 않아. 하루라도 더…….
소희 (CONT'D): 누구나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을 거야.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살고 싶을 거야. 그 마음에 있어서 다른 이들이 나보다 특별히 더 간절하거나 덜 간절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그만큼 간절한 바람을 다른 사람에게서 어떻게 뺏겠어.
우재: 어떻게 확신해? 네가 더 간절할 수도 있잖아. 스물넷에 죽어야 하는 너와 백 살까지 산 사람이랑 어떻게 똑같이 간절하다는 건데? (우재의 말은 스스로의 수명에 대해 느끼고 있는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소희: 누가 더 간절한지 영원히 우린 알 수 없겠지. 그런데 난 간절함을 비교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 행복하게 생을 마칠 수 있다면 난 아쉽지도, 억울하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난…… 누군가가 마지막을 기다리며 느낄 감정은 살아온 시간과는 상관이 없을 거라 믿어.
우재: 조금이라도 더 살면, 더 행복해질지도 모르잖아. (북받친 감정으로 토해낸다. 어느새 우재는 자신이 아직도 버리지 못한 미련을 털어놓고 있다.)
소희: 그렇지 않다는 걸 이미 우리는 알잖아. (팔을 뻗어 조용히 우재에게 포옹한다.)

EXT. 목수의 작업실 앞 - DUSK
관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소희는 목수의 작업실로 향한다. 카메라는 숲속에 서서 카메라를 들고 며칠 전 바다에서 촬영했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소희를 비춘다. 소희는 카메라 화면을 끄더니 작업실 안으로 들어간다.

INT. 목수의 작업실 - DUSK
소희는 완성된 관을 바라본다. 여느 침대 프레임과 같지만, 아직 매트리스나 이불이 없어 휑한 모습이다.

목수: 어떠세요?
소희: 마음에 들어요. (죽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 흔들리는 목소리로) 정말…… 감사해요. (나뭇결을 한 번 쓸어내려 본다.)

그렇게 조금 멍하니 서 있던 소희는 이내 목수에게 장례식 초대장 하나를 건넨다.

EXT. 공원 - AFTERNOON
우재는 공원에서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우재에게 직업을 소개시켜 주고 은근히 우재를 도와주었던 남자다. 소희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결국 연락하게 되었다. 우재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감사의 말을 전한다.

INT. 소희의 저택 - NIGHT
청소를 마쳐 텅 빈 집 가운데, 소희가 목수에게서 받은 관이 놓여 있다. 흰 매트리스와 이불을 올려놓은 침대는 나름대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한참을 침대를 응시하던 소희는 이내 익숙해져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침대 위로 몸을 이끈다. 베개에 머리를 올려놓고 이불을 끌어안는다. 소희에게 침대 안이 너무 크고 차갑게 느껴진다. 혼자 있을 때면 이렇게 살이 에이는 듯한 외로움과 죄책감이 몰려온다. 소희의 표정이 불안함으로 가득 찬다. 소희는 동요된 감정으로 우재에게 전화한다.

우재: 여보세요? (한참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무슨 일이야?
소희: 우재야……. (망설인다.)
우재: 왜 그래? (소희의 목소리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소희: 관을 받았어. ……곧 익숙해져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그 안에 누워봤어. (흔들리는 표정으로) 그런데 나 혼자 눕기에는 너무 큰 것 같아. (눈물이 고여 입술을 깨물고는 전화를 끊는다.)

소희는 침대에 혼자 누워 한참을 더 뒤척거린다. 눈을 감으면 과거 기계에 누워 느꼈던 두려움이나 부모님의 일기장을 읽으며 느꼈던 죄책감이 생생히 떠오른다. 이내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우재였다. 소희가 문을 열자 우재는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거실에는 소희가 말한 관이 보인다.

우재: 그러게. (소희의 얼굴을 본다. 울음 때문에 상기된 뺨이나 불안한 표정을 눈치챈 듯하다.) 너 혼자 눕기엔 너무 크지.

소희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우재 역시 소희의 옆에 가만히 앉는다. 우재는 먼저 두 팔을 뻗어 소희를 조심스럽게 안는다. 이내 두 사람의 몸이 기울어지며, 하얀 이불과 하얀 베개의 관 위에 눕는다. 소희는 눈을 깜빡인다. 우재는 소희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소희의 눈에 시선을 맞춘다. 소희는 훨씬 홀가분한 표정이다. 암전.

INT. 소희의 집 - MORNING
둘은 편한 차림으로 마주 보고 앉아 식사한다.

우재: 요즘은 수첩을 잘 안 쓰네.
소희: 맞아. 실은 너한테 50일을 줄 줄 알고 다 뜯어내 버려서. 스무 장 정도 비어.
우재: 그랬어?
소희: 응, 그새 계획은 전부 오십일에 맞춰 놔서. 생각보다 여유롭네. (우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지금껏 네가 내 계획대로 살아왔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네 계획대로 살아보는 거 어때?
우재: 내 계획?
소희: 응. 네가 하고 싶은 거, 네가 행복한 거.

EXT. 여행 / MONTAGE
우재와 소희가 여러 여행지를 방문하는 모습을 짧게 연결하여 보여준다.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등의 일상적이고 다정한 모습들이다.

INT. 소희의 집 - NIGHT
여행에서 돌아온 후 마지막을 나흘쯤 앞둔 어느 밤. 풀지 않은 캐리어가 방 한 쪽에 있다. 방 가운데 놓인 퀸 사이즈 침대에 우재와 소희는 익숙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누워있다. 처음 침대에 누워 불안해하던 소희의 표정과 달리 한결 편안한 표정이다.

EXT. 숲 가운데의 장례식장 - AFTERNOON
우재와 소희는 숲 가운데 준비한 장례식장을 꾸민다. 꽃을 장식하고,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우재가 찍은 소희의 사진을 걸어놓는다.

소희: 어때? (꽃을 한쪽에 걸며)
우재: 조금 왼쪽으로 놓는 게 낫지 않아? (소희의 뒤에서 꽃을 살짝 왼쪽으로 민다.)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둘은 테이블에 기대 서로에게 몸을 가까이 붙인다.

소희: 긴장돼?
우재: 너는?
소희: 나는 조금.
우재: 긴장은 돼. 근데 아쉽지는 않아.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네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EXT. 숲 가운데의 장례식장 - AFTERNOON
화려하지 않은 흰 드레스를 입은 소희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과 포옹하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우재는 정장을 갖춰 입고 멋쩍게 테이블에 앉아 있다. 누군가는 소희를 보며 울기도 하고 누군가는 웃기도 한다. 이내 대화를 마친 사람들은 모두 테이블에 앉아 식사한다. 소희는 수첩을 꺼내 마지막 페이지에 무언가를 적는다.

EXT. 숲 가운데의 장례식장 - DUSK
사람들이 모두 떠난 숲은 조용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퀸 사이즈 베드. 그곳에는 소희와 우재가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누워있다. 그 표정에는 두려움도 아쉬움도 없다. 숲을 활보하는 바람에 소희의 머리칼은 조금 흩날린다. 잠을 청하려는 사람처럼 그들은 뒤척거린다. 소희의 입에는 여린 미소가 감돈다. 소희를 바라보는 우재의 표정에서도 아쉬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내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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