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쿠데타로 집권하고 광주 학살 등 각종 범죄와 인권유린을 자행한 전두환 씨가 지난 23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연희동 자택에서 숨졌다. 피해자와 유족을 향한 사죄는 끝내 없었다. 전 씨의 장례는 5일간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국가장 도입 이후 사망한 전직 대통령 중 국가장을 치르지 못한 건 전 씨가 처음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독재자이자 학살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로 유신 체제가 붕괴할 당시, 전 씨는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전 씨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 수사를 맡던 중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을 장악했다.

    당시는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전 국민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센 상황이었다. 실제로 유신헌법 폐지,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와 운동이 수없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 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 검열 강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 계엄령을 내리는 등 쿠데타를 감행한다. 전 씨는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에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대통령 취임과 퇴임, 그리고 구속까지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 씨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내각을 장악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같은 해 10월에는 대통령 7년 단임제와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8차 개헌을 단행하고, 개정 헌법에 따라 시행된 1981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열었다.

    하지만 집권 후에도 1986년 문귀동 경장이 권인숙 당시 학생운동가를 성고문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1975~1987년 부랑아 선도의 명목으로 노숙자와 고아, 통금시간 위반자 등을 불법 감금·노역, 폭행 및 살인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등 전두환 정권의 반인륜적 범죄 행위는 끊임없이 자행되었다. 결국, 고 박종철 열사가 수사관들의 물고문 끝에 사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어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노태우 씨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시국사범 석방, 헌법상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 및 정당 활동 보장, 대학 자율화 등을 약속한다. 이는 1987년 10월 29일, 국회의 표결과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된 현행 헌법이 공포되면서 마침내 실현된다.

    전 씨는 1988년 제12대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1995년 구속됐다. 1심은 전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한 2심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서 전 씨는 경비와 경호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모두 박탈당했다. 대법원은 반란수괴, 내란수괴, 내란목적 살인,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총 13개 죄목에 대해 전 씨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 씨에 대한 특별사면을 결정하면서 전 씨는 출소하게 된다.

사면 후에도 망언은 계속돼

     사면 후 전 씨는 연희동 자택에서 경호를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 나가는 한편, 자신의 범죄를 부인하고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는 등 망언을 일삼았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한 2003년 SBS와의 인터뷰나 2008년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며 한 “전 재산 29만 원” 발언은 듣는 이들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2017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왜곡 서술을 담은 <전두환 회고록>을 출판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법원은 북한군 개입설 등 33곳의 내용에 대한 전면 삭제를 지시했다. 회고록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에 대해 고인의 유족이 전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도 있었다. 관련하여 1심은 지난해 11월, 전 씨의 혐의를 인정하며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전 씨가 항소하면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법적 책임은 묻기 어려워졌지만

    하지만 지난 23일, 전 씨가 자택에서 사망하면서 법원은 지난 29일로 예정된 기일을 연기했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해당 재판은 피고인의 사망을 이유로 공소가 기각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 씨가 생전에 내지 않은 미납 추징금 956억 원 역시 환수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빚이나 세금은 가족들이 상속 포기를 하지 않는 한 망인의 재산과 함께 상속되지만, 벌금과 추징금은 법적으로 상속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범죄로 축적한 재산임을 알면서도 제3자가 불법 재산을 취득한 경우 환수 대상이 되는 만큼, 검찰은 추가 환수 여부에 대해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전 씨의 잔여 추징금 환수를 위한 일명 <전두환 추징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한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5월 단체는 전 씨의 사망일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전 씨를 규탄했다. 5·18기념재단 정동년 이사장은 기자회견에서 “그동안의 재판이 대한민국 헌정사를 유린하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책임자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심판’이 되기를 기대해 왔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마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며 “5월 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만고의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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