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이윤지 기자

    재즈에서 보컬이 하는 역할은 타 장르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재즈의 보컬은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여겨진다. 특히 즉흥 연주(improvisation)라는 재즈의 음악적 특성이 보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점에서 그렇다. 보컬에서의 즉흥성을 가능하게 하고 이를 예술로 승화한 몇몇 주역들이 있었기에 재즈 보컬은 고유의 기능과 위력을 갖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빌리 홀리데이는 단연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손꼽힌다. 성량이 크거나 가창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음색과 프레이징*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블루스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평가받던 호소력 짙은 빌리 홀리데이의 음색에는 그녀의 인생 그 자체가 녹아들어 있었다. 

 

한 작은 소녀가 만들어낸 ‘빌리 홀리데이 스타일’

    빌리 홀리데이의 본명은 엘리노어 페이건이다. 엘리노어는 19세의 미혼모 세이디 페이건에게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클레런스 홀리데이는 세이디와 엘리노어를 거의 돌보지 않았으며 벤조 연주가로서의 꿈을 찾아 모녀를 버리고 떠났다. 엘리노어를 양육할 능력이 없었던 세이디는 한동안 엘리노어를 외가에 맡겼다. 엘리노어가 조금 자란 뒤에는 어린 나이에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이처럼, 거의 방치되다시피 지냈던 엘리노어는 학교를 많이 빼먹은 일로 감화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엘리노어가 감화원에서 풀려난 뒤에 세이디는 엘리노어를 데리고 거처를 옮긴다. 돈을 벌어야 했던 세이디는 엘리노어를 사람들에게 맡긴 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당시 겨우 10대 초반이었던 엘리노어는 창부의 집에서 일하고는 했다. 심지어는 몇 차례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 일로 경찰에게 오히려 불량 청소년으로 몰리면서 감화원에 재입소하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던 유년기는 그녀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그 속에서 엘리노어에게 재즈는 행복이었다. 빌리의 평생 친구였던 메이 반스의 말에 따르면, 어린 빌리는 루이 암스트롱 노래를 좋아해서 줄곧 따라 불렀으며 가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빌리에게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크게 있지 않았다고 메이는 회상했다. 다만, 암스트롱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두 박씩 끊어 부른 뒤에 부르르 떠는 비브라토 창법 등을 따라 하며 그 뒤에 슬쩍 자신의 스타일을 첨가하는 식이었다. 암스트롱의 스타일이 그녀의 출발점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1956년의 한 인터뷰에서 엘리노라는 자신의 스타일은 아주 어릴 적 루이 암스트롱 특유의 느낌을 따라 하던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베시 스미스의 묵직한 소리를 동경하여 이를 적절히 절충하여 ‘빌리 홀리데이 스타일’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할렘에서 빛났던 천재 소녀의 목소리

    어린 엘리노어는 생계를 잇기 위해 할렘의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1928년부터 1년간 네스트 클럽에서 일하던 엘리노어는 길 건너편의 포드와 제리의 클럽으로 옮겼고, 이때 예명인 빌리 홀리데이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이웃이었던 색소폰 연주자 케네스 홀란과 팀을 이루어 133번가의 여러 클럽으로 공연하러 다녔다. 점차 명성을 얻은 빌리는 더 많은 클럽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그러다 1932년 말, 빌리는 코번스 클럽에서 가수 모네트 무어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33년, 무어의 노래를 듣기 위해 코번스 클럽에 왔던 프로듀서 존 해먼드는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마치 재즈의 즉흥 연주자처럼 같은 곡을 매번 다르게 노래하는 17세 소녀의 모습은 존 해먼드를 놀라게 했다. 그 길로 해먼드는 빌리가 베니 굿맨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음반 데뷔를 할 수 있도록 빌리를 베니에게 소개한다.

    그렇게 그녀가 18세의 나이로 처음 녹음한 곡이 ‘Your Mother’s Son in Law’이었다. 스튜디오 마이크를 생전 처음 보는 어린 소녀가 처음 보는 뮤지션들의 반주에 과감하고 능숙하게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은 빌리의 천재성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첫 음반 녹음 이전에 빌리의 경력은 여러 클럽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른 것이 전부였으며 전문적인 지도를 받아본 경험도 전무했다. 빌리가 즐겨 듣던 루이 암스트롱과 베시 스미스의 음반이 그녀에게 주어진 가르침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빌리의 보컬은 이미 완성형이었다. 루이 암스트롱을 제외하면 빌리처럼 자유자재로 부를 수 있었던 재즈 보컬리스트는 없었다. 빌리는 단순히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루이 암스트롱이 트럼펫을 부는 것과 레스터 영이 테너 색소폰을 부는 것 마냥 목소리만으로 즉흥 연주를 이뤄내고는 했다.

    존 해먼드와 계약을 맺은 빌리는 계속해서 녹음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맘때쯤부터 레스터 영과의 음악적 인연도 시작되었다. 레스터는 빌리에게 ‘레이디 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이에 빌리는 장단을 맞추며 레스터를 ‘프레즈’라고 불렀다. 빌리는 카운트 베이시와 함께 빅밴드 보컬로도 활동했다. 이때 빌리는 종종 칙 웹 밴드의 보컬로 활동하던 엘라 피츠제럴드와의 경쟁 구도를 이루기도 했다. 베이시의 밴드에서 해고된 후에는 아티 쇼의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빌리 홀리데이는 최초로 백인 밴드 리더와 함께 풀타임으로 미국 남부 지역을 순회공연 다닌 흑인 여성 가수가 되었다. 남부 순회공연은 빌리에게 궂은일들의 연속이었다. 무대 위에서 관객의 야유와 비난을 대면해야 했고 다른 밴드 구성원들과 다른 장소에서 식사하고 머물러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티 쇼는 그녀를 항상 보컬리스트로서 존경하고 두둔했다.

흑인 인권에 대해 노래하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려요. 잎사귀엔 피, 뿌리에도 피…”

    이번 달 4일에 국내 개봉한 영화 ‘빌리 홀리데이’는 인권 운동가로서 빌리 홀리데이를 재조명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The United States vs. Billie Holiday’로, 빌리 홀리데이가 1947년에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법정에 선 재판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 재판을 비롯해 미국 정부가 빌리에게 가했던 압력은 인종 차별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장면들은 극적인 구성을 위해 꾸며졌지만, 영화에서 등장하는 FBI 마약단속국의 해리 앤슬링어와 빌리에게 붙여진 감시원 지미 플레처 등은 실존 인물로 알려졌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노래가 바로 빌리 홀리데이의 대표곡 중 하나인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이다. 이 곡은 흑인 ‘린치’에 반대하는 노래로, 미국의 여러 주에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린치’란, 정당한 법적 수속에 따르지 않고 잔인하게 형벌을 행하는 일을 말한다. 리볼버로 위협하는 백인에게 도끼로 맞서다가 정당방위로 살인을 행한 흑인에게 성폭행이나 절도 등의 추가적인 죄목을 허위로 덧붙이고서는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을 거치고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주로 남부 지역에서 꽤 큰 규모로 흔하게 이루어졌으며 주동자들은 그것을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린치 장면을 담은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었을 정도로, 그 시대는 폭력과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상한 열매’는 1930년의 한 린치 사건을 기록한 사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아벨 미어로폴이 직접 시를 쓴 뒤에 멜로디를 붙인 곡이다. 이 곡은 편곡자 대니 멘델존의 손을 거쳐 다듬어진 뒤, 카페 소사이어티의 주인 바니 조지프슨에 의해 빌리에게 전해졌다. 빌리가 처음 그 노래를 받던 자리에 있었던 조지프슨과 허조그는 입을 모아 그녀가 처음에는 그 노래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며 회상했다. 사실 그때 빌리는 정치에는 문외한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처음으로 ‘이상한 열매’를 불렀을 땐 시에 대한 이해나 절절함이 없었고 노래를 익히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다 나름의 감흥이 생겼으며, 빌리는 노래에 몰입하게 되었다. 훗날 그녀는 이 노래의 심상이 인종 차별로 인해 폐 질환을 치료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상기시켰다고 밝혔다.

    조지픈슨의 증언에 의하면 어느 한 날, 빌리가 무대에서 ‘이상한 열매’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이에 청중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청중의 영혼을 울린 것이다. ‘이상한 열매’로 쇼가 끝나는 날이면, 조지픈슨은 아무리 청중이 크게 호응하더라도 인사를 하지 않도록 빌리에게 지시했다. 실내등은 모두 꺼버렸고, 바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의 서비스를 중지시켰다. 웨이터들도 일제히 서비스를 중단했다. 조지픈슨은 그 노래가 충분히 이해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이상한 열매’는 빌리 홀리데이의 전매특허가 되어갔고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곧 그녀의 사진이 <타임> 지에 실렸으며 이는 미국에서 잡지에 가장 처음 실렸던 흑인 사진이기도 했다.

마약 중독, 쓸쓸했던 말년

    화려한 음악 활동의 이면에는 마약 중독과 고독이 빌리 홀리데이를 항상 따라다녔다. 1959년 5월 31일, 빌리는 구급차에 실린 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했다. 간 경화와 심장병이 심각했지만 빌리는 끝까지 자신의 건강을 살피지 않은 채 술과 마약에 매달렸다. 의식을 되찾은 직후에도 간호사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웠고 맥주 광고를 보고는 주변인들을 졸라 맥주를 마셔야 했다. 결국 그녀의 병실 쓰레기통에서 코카인이 발견되었고 이로 인해 그녀는 그해 6월 12일 마약 소지 혐의로 구속된다. 중환자인 점이 인정되어 구치소로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세 명의 경관이 그녀를 병원에서 감시했다. 모든 치료 과정은 경찰에게 보고되었으며, 한 편으로는 마약 중독 환자인 빌리를 구속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탄원서 서명 운동이 일기도 했다. 이런 논란 속에서도 그녀는 틈만 나면 담배를 찾았고 결국 며칠의 혼수상태 끝에 7월 17일, 그녀는 수감자의 신분으로 44세에 삶을 마감했다. 빌리 홀리데이의 죽음은 1천 명이 넘는 팬들이 모여들게 했다. 여러 불행한 예술가들이 그렇듯 레이디 데이의 음악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 더 큰 인정을 받기도 했다. 많은 음반이 사후에 발매되었으며 4개의 그래미상도 모두 사후에 수여되었다.

 

    빌리의 삶은 화려하고, 짧았으며, 고독 그 자체였다. 유년은 처참하게 불행했으며 평생 마약 중독에 시달렸고 세 번의 결혼은 모두 돈과 마약으로 망가졌다. 그와 동시에 빌리 홀리데이는 재즈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컬리스트이다. 평론가 존 부시는 그녀에 대해 ‘미국의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놓았다’고 평했다. 감정에 따라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그녀만의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팬들을 포함한 많은 대중이 종종 빌리의 비극적인 삶에 그녀의 음악을 대입하여 생각하고는 하는데, 인간 빌리의 삶을 떼어놓더라도 그녀의 노래는 그 자체로서 당대 및 후대 재즈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뮤지션들의 뮤지션, 빌리 홀리데이는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프레이징*

음악의 흐름을 유기적인 의미를 갖는 자연스러운 악구(프레이즈)로 구분하는 일

참고문헌 |

<빌리 홀리데이 :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 도널드 클라크,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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