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헤이세이, 레이와 등 연호를 사용한다. 이는 모두 천황의 연호로, 현재는 2019년 즉위한 나루히토 천황의 연호인 레이와 시대이다.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쇼와 천황이 인간 선언을 하며 메이지 시대부터 지속되어온 신격화된 천황제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천황은 일본 통합의 상징, 국가 정체성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여 상징천황제를 통해 살아남는다. 쇼와 천황 이후 즉위한 아키히토 천황의 반전주의, 평화주의적 행보를 통해 상징천황제는 일본 국민 마음 속에 뿌리내리게 된다. 이처럼 일본 근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천황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이 기사에서는 천황의 존재가 근대 일본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그리고 당시 사회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메이지 유신과 천황제 성립

    에도 시대, 일본은 에도 막부가 중앙정권을 잡고 여러 다이묘(영주)에게 번(영지)의 지방통치를 맡기는 봉건제 사회였다. 당시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로 각종 정책과 제도를 승인하는 역할을 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근대화를 거치고 강력한 무기와 함대를 갖춘 서구 열강과 마주하며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에도 막부는 동인도 함대를 이끌고 온 미국에 저항하지 않고 불평등조약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는 천황의 칙허도 없었고 번들의 지지도 얻지 못한 조약 체결이었다.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쇄국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구 열강 세력에 극심한 불안감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존왕양이 정신’이 일본 사회 전역에 퍼지게 된다. 결국 당시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 등이 힘을 합쳐 막부를 공격하며 에도 막부는 몰락하게 된다. 새롭게 즉위하며 강력한 권력을 위임받은 메이지 천황은 일본을 근대 사회로 탈바꿈하는 메이지 유신을 진행한다.

    메이지 초기, 서구 세력의 힘을 이미 실감한 메이지 정부는 무작정 서양을 배척하기보다는 서양으로부터 배워서 빠르게 같은 수준의 힘을 길러 불평등한 관계에서 탈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도 시대 250여 년 동안 정착된 일본의 봉건적 사회성을 타파해야 했다. 일부 지식계층과 권력가를 제외한 국민에게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인식하는 국가정체성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보다는 어떤 번에 속했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심지어는 천황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효율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려면 중앙정부에 권력이 집중되어야 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신격화하고 천황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교육 제도를 개편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천황은 일본 국민들에게 서서히 국가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한편, 일본 사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불평등한 외교 관계로 인한 불안감으로부터 일본 사회를 지킬 정신적 방어선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그 방법을 일본 고유의 신화에서 찾았다. 고대 문헌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을 연구하며 유교, 불교 등 타문화를 배제하고 오로지 일본 고유의 정신을 연구하는 국학이 주목받는다. 국학에 따르면 일본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성혁명이 없는 만세일계 천황이 통치하는 국가다. 천황은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자손이며 일본의 정체성은 바로 이 천황에게 있다. 그리고 신에게 선택받은 국가, 일본은 신국이며 국민들은 신민이라는 것이다. 즉, 서구 세력이 들어오고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저항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지닌 천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후 천황제는 일본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치, 조세, 경제, 산업, 사회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개혁이 이루어졌다. 먼저, 정치 개혁으로 봉건제가 폐지되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도입되었다. 1869년, 메이지 정부는 각 번을 다스리던 다이묘로부터 영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판적봉환을 시행한다. 이후 1871년, 다이묘의 영지인 번 체제를 폐지하고 중앙정부에 직속되는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을 시행한다. 마지막으로 1876년, 사무라이의 특권이었던 봉록제를 폐지하고 공채를 지급하는 질록처분을 시행하며 천황에게 거의 모든 권한과 권위가 집중된다.

    두 번째로, 메이지 정부는 대대적인 조세 개혁을 단행한다. 1873년부터 1877년까지 다이묘가 반환한 토지에 대해 농민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지가(토지의 가격)에 입각한 세금을 화폐로 납입하는 지조개정을 추진한다. 정부는 토지조사를 통해 지가를 결정하고 풍흉에 관계없이 지가의 3%를 세금으로 정해 농작물이나 다른 현물이 아닌 화폐로 납부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서양을 모델로 삼아, 경제 개혁과 산업혁명을 달성한다. 근대적 은행제도와 주식회사 설립제도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산업보호책, 철도, 통화 제도를 도입했다. 주로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이 진행하는 방식으로 산업이 성장했다. 이때 작은 선박회사에 불과했던 미쓰비시는 메이지 정부에 무상 선박을 지원받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미쓰비시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후 전범 기업이 된다. 전후 대대적인 재벌 개혁으로 해체되었던 미쓰비시는 1964년 여러 차례 합병하며 부활에 성공해 현재까지도 일본의 대표적인 대기업으로 남아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신분제를 폐지하고 징병제의 도입과 학제 반포 등의 개혁이 시행된다. 1873년 반포된 징병령은 현역 3년과 예비역 4년으로 구성된 의무복무제로 훗날 일본이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군사력을 마련하는 토대가 된다. 학제 반포를 통해 시행된 의무 교육은 국민의 교육 수준 향상이라는 표면적인 목적 이외에도 애국심을 함양하고 충효, 도덕심을 길러 천황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는 1890년 반포된 <교육칙어>를 통해 드러난다.

    메이지 정부는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천황제 사상을 국민 전체에게 주입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 국민들은 민간 신앙인 ‘신도’를 믿어왔다. 신도는 지역마다 그 방식과 모습이 조금씩 달랐고 특히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불교와 결합되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정부는 신도를 불교에서 분리하고 천황과 결속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천황의 존재를 각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메이지 천황은 1868년에 <신불분리령>을 제정한다. 본래 불교를 탄압하려는 목적은 없었으나 불안정한 시대 상황 속 불만을 표출할 곳이 필요했던 민중에게 확대 해석되어 사원, 불경, 불상 등을 훼손하는 폐불훼석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정부는 대교(천황교)라는 국가신도를 토대로 일본을 신정일치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1870년 반포된 <대교선포의 칙>은 이러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대교는 국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불교계, 지식인, 언론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결국 신교자유와 정치, 종교의 분리라는 시대적 요구에 메이지 정부가 1882년 신관을 공무원직과 분리하며 대교 확립은 무산된다.

    메이지 정부가 천황을 내세워 정권을 다지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국회 개설을 촉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이 시작된다. 이 운동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인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원로로서 민선의원 개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애국공당을 결성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질록처분 등의 정부정책으로 위축되던 사무라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1878년부터는 지조 경감을 요구하는 지주, 부농들이 참가하며 자유민권운동이 확대된다. 1880년에는 국회기성동맹을 조직하고 정부에 국회개설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이 계속된다. 이듬해 오쿠마 시게노부는 정부에 영국식 내각제를 주장했으나 축출되었다. 정부는 지속되는 이러한 움직임에 1890년까지 국회를 개설하고 헌법을 반포할 것을 약속한다. 메이지 정부는 헌법제정과 국회 개설은 약속하는 한편, 자유 민권 운동은 탄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75년 참방률과 신문지조례를 제정하여 자유민권주의 언론을 탄압하고 1880년에는 집회조례를 통해 집회 및 결사를 제한한다. 1889년, 일본이 <대일본제국헌법>을 발포하며 아시아 최초 헌법 국가로 거듭나게 되지만 헌법의 실상은 자유민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헌법은 국가 주권을 신성불가침한 천황에 있다고 규정하고 국가의 모든 권한을 천황에게 부여하며, 국민에게는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권리만 부여했다. 결국 메이지 유신 시대의 자유민권운동은 천황제 중심의 헌법이라는, 본래 취지에 다소 부합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진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그리고 천황의 군대 황군

    청일 전쟁은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청일 양국이 벌인 전쟁이다.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일본은 ‘이익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인다. 이익선이란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주장한 것으로, 일본이 완전한 독립과 자유,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일본의 영토인 주권선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주권선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이익선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때 이익선은 한반도를 가리킨다. 청일 전쟁은 당시 정당과 정부, 지식인, 그리고 민중까지 일본 열도 전체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일본 개화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 전쟁을 문명(일)과 야만(청)의 전쟁이라 표현했으며 일본 개신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는 정의로운 전쟁이라 표현했다. 일본은 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그 결과 청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 열도를 할양받고 배상금 3억 엔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진출을 우려한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한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게 되고 이 사건은 러일 전쟁의 발판이 된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넓혀간다. 하지만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며 친러 정권이 득세한다. 러시아는 친러 정권을 통해 산림벌채권 등의 이권을 얻는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이 강해지자, 일본에서는 위기감과 반러정서가 고조된다. 한편, 1900년 청에서 외세 배척 성격의 의화단운동이 전개되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연합국은 군대를 파견한다. 일본도 이때 최정예부대를 파견하며 서구 열강으로부터 극동의 헌병이라는 별칭을 얻고 국제 사회에서 그 지위를 인정받는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이래로 줄곧 목표로 삼았던 자주적인 국가의 위상, 서구 열강과의 동등한 지위를 달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의화단을 진압하는데 성공했지만, 러시아는 연합국에 속한 나라 중 유일하게 군을 철수하지 않고 만주에 군대를 주둔하며 남하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미국과 함께 차관을 제공했으며 일본은 두 제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한다.

    당시 나온 풍자화에서 러시아는 거인, 일본은 소인으로 표현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는 일본보다 강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영미 양국의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 발틱 함대를 무너뜨리고 승기를 잡는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장기화된 전쟁으로 국력이 손상된 상태였고 러시아 역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내부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양국은 1905년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청일 전쟁과 달리 일본이 배상금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할린 남부, 여순과 대련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남만주철도도 양도받는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으나, 러시아라는 대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 큰 의미로 다가왔다. 개국 이후, 서구에 대한 열등감과 불안감이 지속되었던 일본 사회에 러일 전쟁 승리는 자부심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의 천황제 사상 주입 정책의 일환으로 반포된 <군인칙유>는 충절과 예의, 신의를 강조하며 천황의 군대라는 인식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일본군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치며 스스로를 천황의 군대인 황군이라 칭하며 천황의 권위를 드높인다. 이렇게 군대와 천황이 정신적으로 깊게 결속되는 현상은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배경이 된다. 

    러일 전쟁이 일본 국민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지만, 전후 상황으로 인해 일본 사회는 축제의 분위기를 마냥 즐길 수는 없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 17억 엔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했는데, 이는 청일 전쟁에서 투여한 비용의 약 10배 수준이었으며 심지어 배상금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은 그 빚을 전부 떠안고 채무국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측 전사자가 4만 명에서 5만 명 사이로 추산될 정도로 많은 수를 기록했다. 이에 일본 내에서는 민간이 주도하는 반전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되었고, 청일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이라 표현했던 우치무라 간조는 러일 전쟁을 야수라고 표현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천황 앞의 평등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사회에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가 세워지는 국제적 분위기 속에 일본 역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발전으로 민중이 정치적 자유와 시민으로서 권리에 대해 자각한다. 이에 각종 사회 운동 집단이 결성되며 일본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생각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0년대 후반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이 사회,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이 시기를 통틀어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1912년부터 1921년까지 재위한 다이쇼 천황의 연호를 가져온 것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마츠오 다카요시와 나리타 유키치이다. 이들은 당시 일본 사회에 대해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는 말로 표현하며 모순성을 지적한다. 일본 내부에서는 시민으로서 권리, 자유,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논의가 꽃 피웠으나, 외부적으로는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고 제국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는 많은 생각과 논의가 오갔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았던 것은 천황의 권위였다. 비록 메이지 초기에 정부가 의도했던 만큼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존재는 아니었으나, 일본이라는 국가정체성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천황의 권위와 존재를 인정했다. 즉 모든 논의는 천황이라는 존재 앞에서 이뤄졌으며 평등과 자유 등의 가치 앞에 언제나 천황이 있었다. 이때 법조계에서는 천황 기관설이 통용되고 있었다. 천황 기관설이란 국가 통치권의 소유는 국가 자체에 있고 헌법에 근거한 국가 최고 기관인 천황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천황 기관설은 의회정치가 실현되고 일본이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때 재산에 따라 제한되던 선거권을 만 25세 이상 남성들에게 일괄 부여하는 보통 선거법이 개정된다. 제한적인 개혁이지만, 일본 사회가 분명 민주주의를 향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계속된 경기 침체와 더불어 1929년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초래한다. 특히 관동 대지진과 흉작 등의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본은 심각한 사회,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논의, 정당 정치 등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상징했던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사회, 경제적 위기로 인해 보수주의와 국수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군국주의와 천황제 파시즘

    일본의 사회, 경제적 위기는 민중의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국가주의 열망으로 탈바꿈하게 한다. 동시대에 독일에서 세계 1차 대전의 패전으로 감당 불가능한 경제적 위기에 내몰린 국민들이 히틀러의 나치즘에 선동되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는 군부 세력의 천황제 파시즘이 지지를 얻게 된다. 일본 군부는 1931년 3월 쿠데타와 1936년에는 육군 청년 장교들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도모한 2.26 사건을 통해 기존 의회정치를 구성하던 정당 지도자들을 몰아낸다. 그리고 싹트던 입헌군주제, 민주주의를 신성불가침한 천황제로 누르며 정권을 잡는다. 이미 메이지 유신 이래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황은 국가 정체성이자 상징으로 교육되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천황의 권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또한 천황제는 일본이 태양신의 후손이 다스리는 신국이라는 점과 일본 국민은 모두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가족 같은 존재라는 가족국가론 등의 국가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에 내몰린 일본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와 민족에서 찾으며 개인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일본 사회 전반이 군부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로 확인된다. 1932년 5월 12일 육군과 해군의 젊은 장교들이 이누카이 수상을 암살한다. 당시 만주국 건설에 반대하고 온건주의 노선을 택한 그를 일본의 국익에 반하는 판단을 한다는 명목으로 살해한 것이다. 재판이 열리자, 재판부에는 국가를 위해 범법행위를 저지른 청년들을 지지하며 선처해달라는 탄원서가 수십만 통 접수된다. 그만큼 일본 사회는 군부와 파시즘, 전쟁에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언론 역시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유사한 국가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앞서 언급한 미쓰비시와 같은 거대 기업이 속한 경제계도 군부 세력과 결탁했다. 이로써 일본은 사회 전반의 지지에 힘입은 군부 세력의 주도하에 대외 팽창적 군국주의 정책을 펼치게 되고, 이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다.

    군부 세력은 지속적으로 신성불가침하고 절대적인 천황의 권위를 주장한다. 이는 1935년 천황 기관설을 비판하며 국체 명징 운동이 전개된 과정에서 나타난다.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잇키 기도쿠로가 주창하고 제자인 미노베 다쓰기치에게 계승된 천황 기관설은 앞서 다루었듯이 일본 법조계에서 통용되는 학설이었다. 문제는 그 내용에 다소 민주주의적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1935년 2월 18일에 열린 귀족원본회의에서 전 육군 중장이었던 기구치 다케오 의원이 미노베의 천황 기관설을 강하게 비판하며 사건이 시작된다. 그는 천황 기관설은 천황이 국가 정체성임을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우익세력과 군부로 인해 우경화된 당시 일본 사회에서 큰 이슈가 된다. 사건이 커지자 미노베는 공식적인 해명 입장을 내놓지만, 이마저도 비난받으며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심지어는 우익 인사에게 총을 맞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일본 내 분위기는 더 심화되어 천황이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자는 국체 명징 운동이 전개되고 결국 정부는 그해 8월, 천황 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 명징에 관한 정부 성명’을 발표한다.

    이처럼 군부가 천황 기관설에 민감하게 대응했던 이유는 천황의 권위가 신화적 영역에서 기인한 것이 명확하고 그가 신성불가침한 존재여야 국민 위에 군대가 서는 군국주의 국가로서 발돋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황 권위의 절정은 <국체의 본의>를 통해 실현된다. 이는 일본의 온 국민이 만세일계 천황의 권위를 다시금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기게 하고 그들을 전쟁에 총동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천황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세뇌는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오키나와 현민들의 옥쇄의 비극이나 가미카제 특공대,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로 강제 징용되었던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천황제 신화는 일본이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평등, 인권 등 사회적으로 근대 시민 정신이 각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패전이후, 천황은 그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 통합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영속패전론>에서 일본이 패전을 부정함으로써 영원한 패전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천황제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참고문헌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김후련, 책세상
<영속패전론>, 시라이 사토시, 이숲
<일본군국주의의 형성 -그 정치사회적 기원을 중심으로->, 박충석,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회과학원(EISS)

 일러스트 | 이윤지 기자
 일러스트 | 이윤지 기자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