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단비 - '남매의 여름밤'

    적은 양의 짐으로 가득 찬 흰색 다마스가 옥주와 동주, 그리고 남매의 아빠 병기를 태우고 재개발이 예정된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여름 방학 동안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자는 아빠의 말이 영 탐탁지 않은 옥주는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게 맞는지 재차 캐묻는다. 그렇게 이어지는 2분가량의 롱 테이크 장면은, 어떨 땐 흔들리기도 하고 가끔 대상이 화면의 중앙을 벗어나는 등의 통제되지 않은 촬영 방식으로 옥주네 가족의 다마스를 담아낸다. 가수 임아영이 부르는 ‘미련’이 흘러나오는 이 장면은 불안정하면서도 언젠가 겪어본 듯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는 주인공들이 평범하지만 행복하고 약간은 아프더라도 다신 오지 않을,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여름을 보내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곧이어 할아버지의 집에 옥주의 고모까지 합류한다. 다섯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며 옥주와 동주, 그리고 아빠와 고모 두 남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할아버지의 이층집이라는 낯선 공간 속에서 옥주와 동주는 각자의 방식대로 적응해 나간다. 원체 밝고 장난기 많은 동주는 금세 가족들 앞에서 춤도 추고 할아버지에게도 친근감을 느끼며 다가간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 옥주는 많은 상황을 불편해하며 모종의 불안함 때문인지, 모기장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려 한다.

    혼란스러운 마음이지만, 가족의 사랑 속에서 옥주는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할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열며 정서적으로 교류한다. 이는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가 끝난 뒤, 할아버지가 거실에서 장현의 ‘미련’을 듣는 모습을 발견하고 계단 위에서 함께 음악을 듣는 장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할아버지의 개인적인 시간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외로워하는 할아버지의 곁에 함께 하며 음악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옥주의 마음이 느껴진다.

    윤단비 감독은 연출에 있어서 최대한 인위적이지 않고 싶었다고 한다. 대사로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상황을 통해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 음악이 깔릴 때도 장면의 밖에서 편집을 통해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라디오나 거실의 전축을 통해 장면의 안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했다. 식사 장면에서는 별다른 사건 없이 인물들이 편안하고 맛있게 밥을 먹는다. 이야기의 배경이 된 2층 양옥집은 윤 감독이 두 달 동안 찾아 헤맨 장소로, 한 노부부가 실제로 살던 집이다. 배치되어 있던 오브제들을 그대로 두었고 집의 구조나 텃밭 상황을 시나리오에 최대한 반영하였다. 이처럼 윤 감독이 지켜내고자 했던 자연스러움은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어 몰입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영화 속 자연스러움은 연출뿐 아니라 배우들의 지분도 크다. 옥주 역을 맡은 최정운 배우는 사춘기 소녀의 불안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섬세하게 재현해낸다. 동주 역을 맡은 박승준 배우는 실제로 비슷한 터울의 누나가 있어서 옥주 역의 최 배우와 싸우는 연기에 잘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역을 맡은 김상동 배우는 배우가 본업이 아님에도, 실제 손주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하다. ‘나이와 숙련도에 상관없이, 모든 배우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애드리브를 잘 녹여내 준 덕에 한 층 리얼리티를 살려냈다’고 윤 감독은 전한다.

    영화 초반부의 롱 테이크 장면처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작품 전반에 걸쳐서 유지되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극적인 사건도, 엄청난 갈등도, 악역도 없다. 그저 누구나 겪을 법한 일상적인 사건들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외적인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최대한 절제하면서, 순간의 공기에 집중한다. 장면 전환을 빠르게 하지 않는 등 여백을 확보하는 촬영과 편집 방식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장면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대입하고 추억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남매의 여름밤’은 개인의 체험을 보편화하고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공감과 향수를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필자 또한, 누나와 싸우고 서럽게 우는 동주의 모습 등에서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옥주의 가족이 처한 상황은 그리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족한 부분도 있고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가족이기에 특별하고 애틋하다. 익숙한 언어로 관객에게 위로를 건네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아직 감상하지 않았다면 꼭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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