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언갈 창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창한 표현입니다만 그냥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쉬운 과정은 아닙니다. 존재한 적 없던 존재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반복되는 실로와 돌파 속에서 처음이니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 일을 반복해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프로그램을 짜고, UI를 디자인하고, 모델을 구현하고. 행위와 뒤따르는 용언에 따라 조금씩 이해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충분히 ‘창조’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일련의 보조 관념들이 모두 원관념과 비슷하다면, 반대로 모든 보조 관념들에 가장 적확한 원관념이 있을 것입니다. ‘창조’라는 말은 애초에 그다지 좋은 원관념이 아닙니다. 누군가 들었을 때 명확한 구상이나 행위의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긴 고민 끝에 발견한 개념은 ‘건축’ 이었습니다. ‘건물을 짓는다’는 표면적 의미를 지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다양한 정체성이 고차원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건축은 역사상으로 가장 큰 시류 3가지(철학, 예술, 기술)를 고르게 반영합니다. 가장 밀접한 삶을 살게 될 이들의 제약과 경험을 인지하는 철학, 피조물 자체는 물론 환경 속 모든 존재에게 끼칠 가치관을 투영하는 예술, 마지막으로 그 쓰임과 의도가 정확히 구현되도록 하는 차가운 기술까지.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사회 주류의 전부에 정통해야만 완벽할 수 있다니요. 이렇게 답을 내리고 보니 모든 행위에 ‘건축하다’라는 용언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도와 비율의 차이만 있을 뿐 설계, 제작, 경험이라는 과정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본다면 무엇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매 순간 미상의 공간에 접촉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특질에 표현과 의도를 담아 정착하는 행위가 모든 창조 행위에 원관념이라는 것 또한 꽤 말이 됩니다. 

    이제 혼란하고 복잡할 때마다 건축가의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조금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매 순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골치 아픕니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천천히 곱씹으며 되고자 하는 완전한 아(我)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언젠가는 저도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게 만드는 훌륭한 피조물의 건축주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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