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영 - <녹색 커튼으로>

    어느 한 계절을 그리워해 본 적이 있는가? 가령 얼마나 어릴 적인지 가늠 못 할 기억 속에서 아버지 등에 업혀 맞던 가을바람 같은 것 말이다. 강희영 작가의 <녹색 커튼으로>는 화자 차연이 2010년 덴마크의 여름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이 회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으로 화살을 날리듯 짚어낸 과거의 장면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방식은 효과적으로 독자가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한다. 여름이라는 공통된 이미지를 투영해 차연이 마주한 것은 다민의 부재에 의한 그리움뿐이 아니었다. 차연은 사진작가로서의 커리어와 함께 불어난 고뇌로 괴로워하면서도 다민이 느꼈던 심정을 찬찬히 이해해 간다.

    차연은 외할머니께 받은 대입 축하금으로 유럽 패션 위크 시기에 맞춰 간 여행길에서 다민을 만난다. 우드 우드 S/S 컬렉션 쇼의 메인 모델로 등장한 다민은 눈을 감은 채로 서른여덟 걸음 거리의 런웨이를 걷는 묘기를 선보인다. 쇼가 끝난 후 런웨이 장소에서 둘은 우연히 마주친다. 차연이 찍은 자신의 사진이 마음에 든 다민은 차연에게 애프터 파티에 같이 가자고 제안한다. 그곳에서 차연은 사진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고 다민과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된다.

    차연과 다민의 관계를 통해 이상과 현실, 기대와 실망 등 수많은 대비와 반복을 묘사하는 이 작품은 <최단경로>로 데뷔한 강희영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한 강 작가의 포착력은 차연과 다민이라는 또다른 우리를 섬세하게 빚어낸다. 유럽의 패션 무대라는 특수한 배경을 세밀하게 그려내면서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아를 지키려다 상처 입는 보편적인 인간 군상을 따뜻하게 재현해낸 점이 인상 깊다.

    여행을 마치고 이네스의 추천서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차연은 유능한 사진작가로 빠르게 부상한다. 이윽고 잡지사의 제안으로 파리 패션 위크의 스냅 작업을 맡게 된 차연은 그곳에서 다민과 재회한다. 함께 파리를 거닐며 차연과 다민은 많은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 둘 사이의 시차는 좁혀질 수 없었다.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다민은 아름다움이라는 거짓을 꾸며내는 패션에 신물이 나 있었고, 이제 막 사진 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차연은 그런 다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차연은 다민에게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다민의 일을 돕지만, 다민은 결국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다민을 동경하며 가지게 된 예술에 대한 환상은 차연이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유행을 선도하며 복제품을 찍어내듯이 쏟아 낸 작업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차연에게 물음표가 되어 돌아온다. 때마침 그런 차연에게 찾아온 다민의 스케치북은 겹겹이 쌓여왔던 고민이 다민의 쇼를 재현하는 형태로 결실을 보게 한다. 다민 한 사람만을 기다리던 차연의 쇼는 마치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에게 ‘너의 고민을 나도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내 품에 안겨 달라’고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다민의 의도를 알아차린 유일한 인물 차연을 통해 작가는 허상에서 벗어나 곁에 있는 더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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