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개최 취소의 위기까지 겪었던 도쿄올림픽이 지난달 23일 개최되었다. 현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연기되어 개최된 올림픽이자 무관중으로 진행된 올림픽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번 올림픽 역시 세계인의 축제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은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모두 발휘하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대 올림피아에서 개최되던 올림픽 정신을 계승하여 1896년부터 시작된 현대의 올림픽은 지난 120여 년간 세계인들의 화합과 교류의 장이었다. 고대 올림픽과 현대 올림픽은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가진다는 점에서 큰 뿌리를 같이 하지만 세부적인 의의와 종목, 종교적 관점 등에서 차이가 있다. 본지는 1000년 넘게 지속되었던 고대 올림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대 올림픽, 1000년의 역사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어 서기 395년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현대 올림픽과 달리 이 시기의 올림픽은 모두 올림피아라는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해당 지역은 그리스의 도시국가 엘리스에 위치하고 있었다. 초기 올림픽은 그리스의 내전을 잠시나마 멈추고 화합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엘리스는 올림픽의 개최를 알리기 위해 각 도시국가에 올림픽 정전을 선언하고 경기에 초청하는 정전의 사자 ‘스폰도포로이’를 파견했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석 달까지 지속된 이 정전 기간에는 경기에 참여하는 국가의 무기 소지, 사형 집행, 법률적 쟁의 등이 금지되었다. 

    올림픽이 열리는 장소인 올림피아는 그리스인에게 매우 신성시되는 장소였다. 그곳에 위치한 알티스 숲이 그리스의 최고 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올림피아는 상당히 외딴 곳이다. 알페오스 강 북쪽의 넓은 평원인 이 지역은 다른 지역과 동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고대 올림픽이 개최되던 당시에는 알페오스 강에 배가 다닐 수 있었으며 육로도 발달하여 많은 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평원에 솟은 크로노스 언덕은 어디서든 눈에 잘 띄었기 때문에 방문객들이 어렵지 않게 이 지역을 찾아올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올림피아에 남은 흔적과 당시 기록들을 통해 그려본 고대 올림피아의 모습은 세계인들의 축제가 열리던 장소인 만큼 웅장함을 자랑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제우스 신전’이다. 10년에 걸쳐 기원전 456년에 완공된 이 신전은 34개의 원기둥으로 지지되었으며 내부는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올림피아의 상징과도 같은 13m에 달하는 거대한 제우스 조각상이 있었다. 헤라 신전과 레아 신전도 이곳에 위치하여 당시 많은 방문객들이 각자 충성을 맹세한 신에게 공양을 바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손에 번개를 쥔 제우스 호르키우스상이 있던 ‘불레우테리온’은 올림픽 경기의 시작에 앞서 모든 이들이 서약을 하던 위원회장이다. 이들은 호르키우스상 앞에서 올림픽의 신성한 규칙을 지킬 것을 엄중하게 서약했다. 특히 선수들뿐만 아니라 심판 역시 이곳에서 서약을 했는데 특히 뇌물공여죄는 심각하게 다루어 졌다. 해당 범죄가 발생할 경우 무거운 벌금형이 선고되었고 벌금은 제우스 청동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기원전 175년 올림피아를 방문한 여행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이런 제우스 청동상은 모두 16개로 그 중 6개가 아테네로부터 징수한 벌금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외에도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 관리와 귀빈이 머물던 레오니다니온 등 여러 건축물과 조각상이 있었다. 실제 올림픽 경기가 치뤄졌던 곳은 넓은 야외 평원을 바탕으로 둔 주경기장과 선수들이 연습할 수 있는 체육관, 격투기와 멀리뛰기 경기가 이뤄진 팔레에스트라, 수영장, 전차 경주장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깨끗한 물과 가열 시설, 그리고 건조 시설까지 정교하게 구비된 목욕탕도 존재했다. 처음에는 주경기장에서 육상 경기만 이뤄졌으나 시간이 흘러 올림픽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여러 시설들이 설치되어 웅장한 올림피아의 모습이 탄생하게 되었다.

고대 올림픽의 경기 종목

    고대 올림픽의 첫째 종목은 육상이었다. 13회 고대 올림픽까지 유일한 종목이기도 했다. 이때 사용된 거리의 단위가 바로 스타디온이다. 1스타디온은 200m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1스타디온에 해당하는 스타디온 경주만 존재했으나 디아울로스라 불리던 2스타디온 경주, 돌리코스라 불리던 20 혹은 24스타디온 장거리 경주 등이 추가되었다. 스타디온, 디아울로스, 돌리코스 세 종목에서 모두 우승하여 삼관왕을 달성한 선수에게는 특별히 ‘트리아스테스’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로도스의 레오니다스는 12년 사이에 열린 4번의 연속된 올림픽에서 모두 트리아스테스를 달성하며 전설이 되었다. 로도스에서는 이를 위대하게 여기며 그를 지방신으로 숭배하기까지 했다. 일부 올림픽 축제에서는 배턴 대신 횃불을 들고 달리는 이어달리기 경주가 개막 경기로 행해졌다. 이는 현대 올림픽의 성화 봉송의 유래가 되었다. 

    5종 경기는 선수의 뛰어난 지구력을 요했다. 원반던지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달리기, 레슬링의 순서로 반나절에 걸쳐 진행되었다. 달리기와 레슬링은 개별 경기도 따로 진행되었지만 나머지는 5종 경기에서만 진행되었다. 원반던지기는 현대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원반을 가장 멀리 던지는 사람이 우승했다. 하지만 던지는 방식이 정형화돼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리스인이 운동에서 중요시 여긴 리듬과 우아함을 지키기 위해 현대와 달리 선수들이 최대의 효율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거의 유일무이하게 남은 원반던지기 기록이 파울로스가 세운 30m이기 때문이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원반던지기 금메달을 기록한 남녀 선수 모두 69m에 달하는 기록을 보여준 것을 보면 위와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창던지기는 현대의 투창법과 유사하다. 창을 귀 높이에 맞춰 수평으로 들고 표시 지점까지 달려가서 투창하는 방식이다. 멀리뛰기는 특이하게도 무게추를 들고 도약했다. 선수는 모래에 깔끔한 두 발의 자국을 남기지 못할 시 실격 처리되었다. 현대의 선수들이 해당 방법을 재현해본 결과 실격을 면하기 위해서는 하강 시 추를 어깨 위로 던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정확히 어떤 자세로 뛰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그리스인들이 이 경기를 가장 까다롭게 여긴 만큼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으로 격투기 종목에는 레슬링, 판크라티온, 권투가 있었다. 레슬링에는 정식과 바닥 두 종류가 있었다. 정식 레슬링은 상대를 3회 바닥에 눕히는 사람이 승리했고 바닥 레슬링은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레슬링과 5종 경기에서는 정식 레슬링 룰을 따랐지만 일종의 집단 레슬링인 판크라티온은 바닥 레슬링 룰을 따랐다. 크로톤의 밀론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레슬링 선수로 여겨진다. 그는 올림피아에서 5회 우승을 거두었고 그만큼 인기도 굉장했다고 전해진다. 판크라티온은 올림픽 경기 중 가장 잔혹했다고 전해진다.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진행되었기에 여러 관절기와 위험한 기술들이 시도되었으며 약간은 치사한 기술도 개발되었다. 상대의 손가락을 꺾거나 본래 금지된 물기, 발로 차기 등도 은연 중에 사용되었다. 권투는 상당히 오래된 역사를 가진 운동으로 미노아 문명에도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특히 권투는 투구를 쓰지 않고 싸우는 스파르타인들이 뛰어났다. 이들은 투구가 없는 만큼 권투를 통해 얼굴을 단련하고 피하는 법을 익혔다. 권투 경기는 손으로 행하는 거의 모든 타격을 인정했다. 그리고 굉장히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상대가 기절하거나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경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몇몇 경기는 길게 지속된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두 선수가 합의하여 서로 방어하지 않고 타격을 교환하기도 했다. 아주 드물게 경기 도중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 경우 사망자에게는 우승관을 주고 상대는 해당 경기가 열린 곳에서 영원히 제명되었다. 

    마지막으로 마술 종목이 있다. 마술 경기에는 전차 경기, 당나귀 수레 경주, 경마가 있었다. 전차 경기는 말의 소유주가 모든 승리의 영예를 차지했다. 실제 전차를 모는 기수는 주로 소유주에게 고용되었으며 이는 전차몰이가 몹시 위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수도 우승 리본을 받았으나 승자 선언과 각종 혜택, 승자 명단에 오르는 것은 말의 소유주였다. 한편 자신의 전차를 직접 몰아 승리를 거둔 이들도 드물게 있었다. 이는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당나귀 수레 경주는 엘리스인들이 당나귀에 대한 저주의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올림피아에서 단 14번만 시행된 이후 사라졌다. 엘리스인들의 반대에도 이 경기가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시칠리아 출신의 그리스 유력가들이 당나귀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경마는 전차와 마찬가지로 말의 소유주가 고용한 기수들이 선수로 나왔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안장과 발걸이가 없었으며 경마는 전차 경기 다음에 열렸으므로 바닥이 심하게 울퉁불퉁한 상태였다. 따라서 많은 기수들이 말에서 튕겨 나가고 생식기 부위와 신장, 가슴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승자의 영광과 축제
    올림픽 승자의 영광을 상징하는 올리브관은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 뒤편에 심어진 신성한 올리브 나무의 가지로 만들었다. 당시 선수들에게 가장 큰 명예와 목표가 바로 이 월계관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시상식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여러 기록들을 통해 두 가지 방식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나는 매 경기 직후 바로 시상을 하며 올리브관을 수여했다는 것이다. 고대 여행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헤라 신전 앞의 황금과 상아로 만든 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탁자는 각 경기장으로 운반되어 올리브관을 두었다가 우승자에게 바로 수여하기 위해 쓰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다른 가설은 모든 경기를 종료하고 마지막 날 제우스 신전에 모여 올리브관을 수여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우승자들은 머리, 팔 등에 리본을 묶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 올림픽에는 오직 한 명의 우승자만이 존재했다. 현대 올림픽에서 3위까지 메달을 수여하는 것과 다른 차이점이다. 마지막 날 저녁에는 성대한 축제가 열렸는데 우승자가 부유하면 축하연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또한 우승자가 비용을 지불한다면 신성시되는 알티스 숲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울 수 있었다.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티스 숲에는 수백개의 조각상이 존재했다고 한다.

고대 올림픽의 종말과 부활
    로마가 그리스를 제국에 편입시킨 이후에도 올림픽은 여전히 올림피아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레아 신전을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사당으로 개조했다. 기원전 80년에는 아예 올림픽 경기가 로마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또한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칼리굴라는 올림피아의 상징과도 같은 제우스 신상을 로마로 옮겼다. 점차 쇠퇴하던 올림피아는 서기 393년 즈음 로마의 그리스도교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교도 숭배를 금지한 이후 올림픽 개최를 중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426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은 파괴되었고 5세기에서 8세기에 이어진 다양한 민족들의 침략으로 올림피아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만다. 현대의 올림픽은 프랑스 귀족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이 추진하여 1896년 아테네에서 부활했다. 현대 올림픽은 초기에 세계 박람회의 여흥거리로 전락할 위기가 있었으나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로 발돋움하였다. 이후 1, 2차 세계대전으로 3차례 취소되기도 했지만, 1948년 이후 무사히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특히 현대 올림픽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냉전으로 인한 정치적 보이콧, 테러리즘, 재정 결핍 등으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곧 스폰서를 통해 재정을 충당하고 국제 외교를 능숙하게 풀어 내며 올림픽은 다시금 명실상부 세계인의 스포츠 대회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 올림픽이 1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올림픽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본지에서는 고대 올림픽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올림피아에는 긴 역사만큼 더 많은 일화와 이곳을 빛낸 스포츠 영웅들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 낸 열정과 영광의 역사에 흠뻑 젖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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