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같은 건 의미 없어. 내가 바라는 건 다 과거에 있거든.” 영화 ‘치코와 리타’는 쿠바 출신의 두 재즈 음악가 치코와 리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갖고 뉴욕으로 향한 리타가 가수로 성공하고 뒤이어 뉴욕에 도착한 치코도 피아니스트로서 빛을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리타는 인종 차별에 저항하다가 영영 공연에 서지 못하게 되고, 치코는 자본가의 계략에 의해 뉴욕에서 쿠바로 추방된다. 몸은 멀어졌지만 한평생 간직했던 둘의 사랑처럼, 치코의 자작곡 ‘릴리’로 대표되는 그들의 음악 또한 라틴 음악에 오랜 시간 동안 새겨져 있다.

    ‘치코와 리타’는 라틴 재즈의 전신인 아프로쿠반 재즈가 태동하던 1940년대의 쿠바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런타임 내내 정열적이면서도 때로는 감성적인 쿠바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쿠바 음악은 아프리카의 전통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아 발전해왔기 때문에 ‘아프로(Afro)’라는 접두사를 붙여 ‘아프로쿠반 음악’이라고 불린다. 아프로쿠반 음악에서 시작된 라틴 재즈는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장르이다. 아프로쿠반 음악이 독자적인 매력과 대중성을 갖추게 된 데에는 1940년대 쿠바 사회의 복잡하고도 독특했던 정치적 상황 및 역사적 배경의 영향이 있었다.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의 중앙에 위치한 카리브해 제도 중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로, 남미 대륙의 길목에 위치한다. 지리적 특성 덕에 쿠바는 여러 문명의 접점이 되었고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쿠바만의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본래 쿠바의 인구는 토착 원주민들인 타이노, 시보네이, 카리브 인디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 원주민들의 노동력이 광산, 공장 건설 등에 강제로 사용되는 등 착취와 탄압이 행해졌다. 스페인에서 유입된 천연두가 퍼지면서 쿠바 원주민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원주민 인구가 대폭 감소하자, 스페인은 대규모 농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백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끌고 온다. 그렇게 쿠바는 스페인의 오랜 식민 지배와 노예 제도 시행으로 인해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스페인계 백인과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 사이의 혼혈을 뜻하는 ‘물라토(mulato)’는 쿠바 인구의 절반을 넘게 되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아프로 쿠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프로 쿠반 문화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 문화를 상당 부분 계승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나이지리아, 콩고, 앙골라, 다호메이, 수단 출신 종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프로쿠반 음악의 특징
    쿠바의 음악에는 아프리카 음악의 특징이 녹아 있다. 돌림노래, 다중 박자, 다중 리듬을 비롯하여 펜타토닉 스케일, 수많은 타악기를 활용하는 연주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타악기는 쿠바로 끌려온 노예들에 의해 일상적인 물건들로부터 재창조되었다. 농기구, 프라이팬, 나무 상자 등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악기가 되었다. 노예들은 음악과 춤을 통해 억압된 일상에서 탈피하여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기의 악기들은 다음 세대들에 의해 지속해서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그 덕에 아프로쿠반 음악은 색다르고 화려한 퍼커션을 비롯하여 아프리카의 색채가 묻어나는 악기 구성을 자랑한다. 다양한 퍼커션들로 경쾌하게 연주되는 리듬은 쿠바의 민족적이고 원초적인 색깔을 잘 표현해낸다.
    아프로쿠반의 대표적인 악기로는 트레스, 봉고, 마라카스, 구이로, 마림불라와 보티하, 팀발레스, 콩가 등이 있다. 트레스는 스페인 기타에서 유래한 조금 작은 형태의 기타이다. 두 줄이 하나를 이루어 총 세 쌍으로 구성된 6현 기타로, 강한 타진법을 사용해 리듬상의 특성을 살려서 연주한다. 봉고는 대표적인 타악기로 추임새를 통해 선율 악기와 대화를 이어 나가는 역할을 한다. 봉고는 장르마다 연주 방식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특징으로 볼레로는 부드럽게, 룸바는 강력하게, 즉흥 연주곡에서는 음색 혼합을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마라카스는 라틴 음악의 이미지를 나타낼 때 많이 떠올리는 악기이다. 구슬, 씨앗 등을 호롱 박 모양의 용기에 넣어 손잡이 부분을 잡고 흔들어 연주하는 퍼커션이다. 구이로 역시 특이한 퍼커션으로, 조롱박의 등줄기를 가는 나무 막대로 긁어서 연주한다. 손 스타일의 음악에서 필수적인 사운드를 낸다고 한다. 마림불라 등의 베이스는 선율 악기, 팀발레스와 콩가는 퍼커션이다. 콩가는 크기에 따라 다른 음을 내어 다양한 종류가 있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쿠바로 처음 유입되었을 때에는 제사 의식에 쓰이던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다. 종교적 음악에서 기원한 장르인 룸바는 클라베라는 리듬을 기반으로 한다. 룸바는 아프리카 음악의 특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음악으로, 타악기가 연주하는 복잡한 다중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춘다. 클라베는 룸바뿐만 아니라 여러 쿠바 음악 장르에서 중요한 기능적 역할을 담당하는 엇박자 리듬이다. 전반적인 쿠바 음악에서 춤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클라베의 핵심인 봄보와 폰체의 기능 모두 퍼커션으로서 선율과 춤을 유도하는 것이다. 한편 단존, 차랑가, 차차차는 유럽 춤곡에서 기원한 쿠바 음악의 장르이다. 군악대의 연주로부터 발전해온 춤곡이 점차 아프리카의 색채를 얻다가 1880년대 미구엘 파일데에 의해 단존이라는 춤곡 장르가 확립되었다. 단존에서 관악기 대신 바이올린이나 더블 베이스, 피아노 등이 사용되면서 차랑가라는 장르가 만들어졌고 여기서 또 차차차가 창조되었다. 특히 차차차는 20세기 중반에 세계 무대에 등장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현대 쿠바 음악 중 대부분의 원류인, 손도 빼놓을 수 없다. 손은 영어로는 ‘rhythm’을 의미하는 단어로 쿠바 서민층의 춤곡이었다. 현대에 국제적으로 유행한 살사와 맘보, 파창가, 송고 등이 손에서 기원하였다. 이처럼 아프로쿠반 음악은 문화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수많은 장르가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다.

쿠바의 음악은 어떻게 재즈가 되었나
    19세기 말, 쿠바 아바나 항에서 미국이 메인호 사건을 구실로 미서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곧이어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한편,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쿠바에 거주하던 많은 흑인이 미국으로 이주하거나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 아바나와 가까운 미국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스로 많은 이민과 왕래가 이루어졌고 그 흐름에는 쿠바의 아티스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즈의 발원지인 뉴올리언스에서 쿠바의 아티스트들은 세련된 미국 재즈 선율을 접했고, 뉴올리언스 재즈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색깔을 입힌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국 출신 재즈 대가들과의 협연 등 쿠바 음악가들이 펼친 여러 노력을 통해 아프로쿠반 재즈는 점차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0년대 초반에 마치토가 이끄는 쿠반 밴드가 마리오 바우자 작곡의 ‘탕가(Tanga)’를 연주한 것이 아프로쿠반 재즈의 첫 등장이었다. 마치토와 바우자를 시작으로, 많은 쿠바 출신 음악가들이 아프로쿠반 음악의 악기나 스타일을 재즈와 융합해냈다. 뉴올리언스 재즈, 스윙, 비밥 시대에 이르기까지 쿠바 음악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다가 비밥과의 만남으로 쿠바 음악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쿠바 출신 콩가 연주가 차노 포조와 비밥의 대가 디지 길레스피의 만남이 아프로쿠반 재즈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디지 길레스피는 대표적으로 ‘Manteca’, ‘Cubana Bebop’ 등의 음악을 통해 아프로쿠반 재즈를 재즈 신에 각인시켰으며 쿠바 연주자들이 미국에서 활동할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프로쿠반 재즈의 흥겨운 멜로디가 궁금하다면 디지의 두 곡을 통해 직접 느껴 보길 추천한다.
    아프로쿠반 재즈가 상승세를 타던 중, 1959년 카스트로에 의해 쿠바 혁명이 발발한다. 혁명으로 인해 모든 방송국과 음반사들이 국유화되었고 음악 활동, 특히 미국에서 들어온 재즈 연주에 제약이 커지자 많은 음악가들이 쿠바를 떠나게 된다. 또한 1961년부터 미국과의 국교가 단절되었고 이는 2015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쿠바 음악가들은 재즈 장르에 더욱 집중했다. 한편, 쿠바 내부에서는 국가의 틀 안에서만 음악 활동과 교육이 이루어졌고 1990년대에 와서야 자유롭게 국내외를 오가며 음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프로쿠반 음악의 현재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직후를 제외하고, 주요 음악 수출국이었던 미국과의 국교는 오랜 기간동안 단절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쿠바의 음악은 2000년대 초반에 세계적으로 유행했고 그 배경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다. 쿠바 혁명 이래 미국과 쿠바의 국교가 오랜 시간 끊겼고 쿠바의 문화가 세계 무대에 제대로 소개될 기회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통해 세계는 다시 아프로쿠반 음악에 주목하게 되었다. 음악 활동에 대해 제한적이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가진 노래에 대한 빛나는 열정이 세계를 감동하게 한 것이다. 쿠바 전통 음악이나 대중음악과 더불어 아프로쿠반 재즈에서 기원한 라틴 재즈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아프로쿠반 음악이 재즈라는 장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변화와 발전을 거쳐 현대의 세계적인 재즈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최근의 아프로쿠반 음악가들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국교가 단절된 기간에도 디지 길레스피는 쿠바 연주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길레스피가 1977년에 발견한 뛰어난 실력의 트럼펫 연주자 아투로 산도발은 현재까지도 활동 중인 세계적인 재즈 스타이다. 아프로쿠반 재즈를 살려서 활동 중인 연주자들로는 추초 발데스, 곤잘로 루발카바, 로베르토 폰세카 등이 있다. 아프로쿠반 음악의 꽃인 타악기 연주자로는 잭 코스탄조와 티토 푸엔테가 대표적이다. 아프로쿠반 음악은 특유의 격정적이고 흥겨운 리듬과 인상 깊은 선율로 현재까지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뜨겁다 못해 타들어 갈 듯한 폭염이 계속인 이번 여름, 정열적인 아프로쿠반 음악과 함께 더위를 이겨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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