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함을 동경하는 일은 괴롭다. 내가 그래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능력을 평가받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재능의 힘을 신봉했다. 재능이 왜 필요한지 체감한 적이 없었음에도 무작정 원했다. 짧은 시간 노력하고 적은 자원을 투자하는데도 압도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높은 효율로 뭔가를 해내는 사람이 우월하다고 직감했다. 나도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나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여러 종류의 재능 중에서도 똑똑하다는 건 제일 대단해 보였다. 조금 배우고도 금세 많은 걸 외우고 이해하는 사람은 어딘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만 같았다. 어떤 문제든 거침없이 정답을 말하는 게 최고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똑똑함을 향한 집착은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왔다. 고효율을 너무나 원한 나머지 학습을 게을리했다. 공부에서도 그랬지만, 그 외에도 낯선 의견을 들으면 그걸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우선 반박하려고 했다. 확고한 주관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이 전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냉철하고 예리한 판단을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논리로써 볼 수 있는 세상은 오직 일부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가 그리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했다. 세상은 주관과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옳다/그르다를 말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때때로 논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이성적으로 설득할 수 없는 개개인의 믿음이 있다.

    논리로 따질 수 없는 일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을 수 있으니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외면하는 것은 손쉽다.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많은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한꺼번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외면하기도 더 쉬워졌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과 동물이 타인에 의해 죽고 고통받고 차별당하지만, 진부하다는 이유로 쉬이 잊힌다. 특히 권력 없는 자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면 새로운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삶을 이해하는 것에서는 효율을 찾을 수 없다. 귀 기울여 들은 만큼 포용력이 생긴다.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옳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것만이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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