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시간이 무한하다고 느꼈다. 실제로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풍족함 속에서는 쉽게 익숙해진다. 앞으로 내가 살날이 아주 많다고 생각하니 극도로 여유로웠다. 억만장자들이 돈을 쉽게 쓰듯이 나는 시간을 쉽게 썼다. 오늘 못 한 일은 내일 마저 하면 그만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언제나 잠재력으로 가득 찬 어린이였고, 지금껏 딱히 이뤄낸 게 없어도 조급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은 어린 날의 경험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충동적으로 굴다가 실수를 하거나 할 일을 엉망으로 해버려도, 거기에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면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삶을 소진하고 있다는 생각은 거의 안 했다.

    그러나 아주 긴 세월은 영생과 분명 다르다. 내 삶이 유한하다는 걸 어느 순간 인지했다. 10대가 끝나던 날 나는 걱정을 시작했다. 세상에는 20대에 멋진 성과를 거둔 사람이 많았다. 김연아는 20대 초반에 밴쿠버에서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를 새로 썼다. 아이유는 스물세 살에 <스물셋>을 불렀고 아인슈타인은 26세에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내 또래의 나이에 얼마나 탁월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공부를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부터, 자기 진로에 확신을 가진 친구, 벌써 주식으로 돈벌이를 하는 친구도 있다.

    물론 삶을 10살 단위로 묶어서 나누는 건 어딘가 불공평하다. 20대의 시작과 끝 사이에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고 그동안 나는 당연히 변화할 것이다. 갓 스무 살이 되어서부터 20대를 전부 허비해 버릴까 봐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은 70억 명이 참가하는 경주가 아니기 때문에 유명한 위인들과 나를 줄 세우는 것이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막연한 공포감이 있다. 아무리 삶이 경주가 아니라지만, 나는 늘 어제랑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사는데 괜찮은 걸까? 지금까지는 '앞으로 잘하면 되지'라고 나를 다독일 수 있었지만 몇 살까지 그 말이 통할까? 언제까지고 젊지는 않을 텐데, 철은 언제 들어야 하는 걸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가장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친구들이 길을 아주 잘 찾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디로 가려면 무슨 버스를 타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며, 그 장소의 위치는 지도상에서 대략 어디쯤인지를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게 지리에만 밝은 게 아니라 그 주변에는 어떤 맛집이 있고, 재미있는 놀 거리는 뭐가 있는지까지도 꿰고 있다는 게 실로 놀라웠다. 게다가 그걸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기본적인 소양처럼 여긴다는 것에 두 번 놀라야 했다.

    반면 나는 중학교 때까지 대중교통을 잘 이용할 줄도 몰랐고 지리에는 더욱 눈이 어두웠다. 자주 놀러 나가는 성격도 아니었고, 다닐 때면 항상 가족이나 친구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어느새 다 같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렇게 대단해졌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대놓고 궁금하진 못하고 남몰래 궁금해했다. 누구한테 그 비결을 묻는 건 어쩐지 부끄러웠다. 다들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못 한다는 사실에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부단히 애쓰며 홍대나 여의도나 신촌 같은 장소가 어디쯤 있는지 외웠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중교통에 타고 내리는 연습을 했다. 허둥지둥 따라잡는 식으로 배웠다.

    한 살씩 먹을수록 '이쯤 됐으면 이건 똑바로 해야 하지 않겠어?' 싶은 것들이 늘어 간다. 최근에는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 청소년 때 길을 잘 찾는 법을 익혀야 했다면, 청년은 세상을 사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많은 자유를 가지려면 많은 걸 감당하기도 해야 한다는 걸 차차 깨달았다.

    우선 내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배웠고, 또 이제부터는 모든 행동에 책임을 다해야 함을 배웠다. 은행 계좌를 만들고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더불어 기숙사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건강과 시간을 온전히 관리한다는 것에 관해 생각했다. 밥은 스스로 챙겨 먹고, 할 일은 직접 시간을 쪼개어 해결해야 하니까. 낯선 사람들을 잔뜩 만났으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에도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장래와 꿈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택의 시간이 현실로 다가와 피부에 느껴지고 나니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고등학교까지는 대학교 입학시험만 잘 준비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가 되니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른 채 덩그러니 놓였다. 어떤 학과를 전공해야 하는지 대학교에서는 무엇을 꼭 해야 하는지 졸업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짚어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이 중에 하나만 제대로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는 앞으로 줄기는커녕 계속 늘어날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어른이 되자마자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의무감이 무겁다. 그리고 당황스럽다. 마치 셋을 세고 뽑는다던 이빨을 하나, 둘!에 당겨버린 것처럼 배신감마저 든다. 정확히 누구에게 느끼는 배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억울한 기분이다. 물론 사회로 나아가는 건 언젠가 일어나야 할 일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뒤이어 이런 걱정이 시작된다. 길 찾기를 처음 배울 때처럼 영영 남들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삶을 살면 어쩌지? 뒤처지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안주하게 되면 어떡하지, 아니면 진짜로 뒤처져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지금까지 너무 평탄하게 살아왔구나.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여태껏 힘껏 밀어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직접 헤엄쳐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아주 두렵고 불안하다.

    물론 불안함은 지나가는 감정일 뿐 결론이 될 수 없다. 이럴 기분이 들 때면 불안함과 기대감은 한 끗 차이임을 기억하려고 한다. 허둥지둥해도 결국 해내면 그만이니까, 이왕 할 거면 초장부터 불안해하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삶은 허무하리만치 짧게 느껴졌다가도, 때로는 고무줄처럼 늘어나 길고 멋진 것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패해도 기회는 늘 있기 때문이다.

    곧 대학 생활이 시작된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시작을 맞고 두려움과 싸우는 시기다. 지금의 거창한 계획들이 지켜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끝내주게 잘 해낼 수도 있고 어쩌면 죄다 망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선택이 내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고, 당장 내일부터도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 참신한 내일을 그리며 오늘도 잠이 든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