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까지, 엄격한 조성과 화성법으로 대표되는 독일 음악은 빈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음악 사조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조성 관습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존재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격변을 기점으로 전통적 조성체계를 넘어선 다양한 음의 사용과 함께 정해진 조성 없이 연주하는 무조성 음악으로의 혁신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급진적 실험정신에 기초해 불협화음의 매력을 찾으려는 반음계주의와, 독일의 전 유럽 지배에 반한 각국의 민족적 색채를 찾으려는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클로드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낭만주의의 고리를 끊고 근대음악의 길로 들어선 작곡가이며, 그의 음악은 전통적 화성으로부터 혁신까지 이르는 과정이 모두 담겨있다는 평을 받는다.

재능 넘치는 시골 소년
 1862년 8월 22일, 클로드 드뷔시는 프랑스의 생 제르망-앙-레라는 작은 마을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여느 음악가들과 달리, 드뷔시의 가문은 음악과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그의 조상 대부분은 상인이거나 농부, 혹은 피고용인이었으며, 그의 양친은 그가 태어날 무렵 그릇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드뷔시의 음악적 행운은 아버지가 프랑스 혁명에 가담하여 투옥된 1871년경, 쇼팽의 제자인 마담 모테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투옥으로 인한 어려운 생활 중에서도 마담 모테로부터 착실하게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었으며, 교습을 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1872년 열 살의 나이로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며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낸다. 입학한 후 음악원에서도 그의 피아노 실력은 두각을 나타냈는데, 12세의 나이로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쇼팽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협연할 정도였다.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당시 드뷔시의 꿈은 전문적인 피아니스트였으나, 1880년 악보 읽기 대회에서 1등 상을 수상하며 작곡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작곡과에 입학하게 된다.

자유롭고 미성숙한 영혼
 파리 음악원에서 드뷔시가 받은 작곡 교육은 철저하게 전통에 입각한 교육이었으나, 그는 전통을 뛰어넘는 해석을 자신의 음악에 적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화성은 음악원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며, 단지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가 작곡한 곡들은 음악원 원로 교수들로부터 “현란하고 난해하며 연주도 불가능한 곡이다”라는 혹평을, 평론가들로부터는 “음색에 대한 기호를 너무 강하게 강조한 나머지 형식이나 기본 법칙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다”라는 비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보인 혁신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젊은 드뷔시의 음악적 천분을 발견하고 그를 현명하게 지도해 준 이는 그의 작곡반 스승인 에르네스트 기로였다. 드뷔시가 자신의 작풍이 드러난 <숲속의 디아나>의 일부를 기로에게 보여주었을 때, 기로는 그 작품에 대해 칭찬과 함께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이런 종류의 작품은 좀 나중에 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로마대상은 영원히 못 볼 테니까.”
 기로의 비판은 드뷔시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해 전통적이고도 고전적인 가르침이 그대로 배어있는 보수적인 스타일의 칸타타 <탕자>가 만들어지게 되고, 그는 이 곡으로 로마대상 음악 부문 1등 상을 수상하게 된다. 로마대상 우승 특전으로 누리게 된 유학 생활에서 읽은 많은 외국 시와 산문들, 작곡가 리스트가 권해서 듣게 된 랏수스의 다성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경험들이 드뷔시의 음악에 반영되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듣게 된 인도네시아의 전통 기악 합주곡 가믈란과 글랑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등을 포함한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작품들은 드뷔시 자신의 확고한 음악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유학에서 돌아온 후 말라르메가 새로운 예술을 토론하기 위해 만든 ‘화요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상징주의 시인들과 나누었던 교류는 훗날 그가 음악에 미술과 문학 등 다른 예술을 접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드뷔시만의 음악을 찾다
 베토벤의 음악이 그다음 세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바그너의 음악과 낭만주의 사조에 크게 압도되어 있었다. 젊은 날의 드뷔시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실제로 그의 많은 초기작은 바그너의 조화로운 화성과 관현악법을 차용했다. 그러나 바그너적 성향이 짙은 작품 속에서도 으뜸화음을 통해 통일적으로 움직이는 기존의 화성체계가 아닌, 화음을 사용하지 않은 독립적인 진행을 관찰할 수 있다. 그 후의 작품에서도 그는 조성에 기초하지 않은 비화성적 음악을 끊임없이 시도했으며, 결국 바그너 음악에서 탈피하여 드뷔시 본연의 음악적 색채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엄격한 화성 규칙을 따른 작품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당시의 관념에도 불구하고, 드뷔시는 1893년 발표한 <현악 4중주>를 통해 자신의 이름과 음악적 성향을 대중에 알리게 된다. 이듬해 파리 국립협회에서 초연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청중들로부터 앙코르를 받았으며, 1901년 초연된 <야상곡>과 1902년 초연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의 대성공은 프랑스에서 그의 음악적 위치를 확고히 하며 이후 많은 작품들을 발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조성에 기초를 두었으나 고전적인 전개 과정을 엄격히 지키지 않은 자유로운 선율이 청중들 앞에서 처음 연주되었으며 이후에 출현하는 드뷔시 본인 그리고 후대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시도는 그가 생을 다할 때까지 한층 더 성숙해지고 세련되어졌으며, 이후 작품들 속에서도 계속 나타나게 된다.

형식주의 음악을 탈피하다
 드뷔시는 비화성적 음악을 시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음악에 미술과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음악적 원근법’을 고안해 음량을 단계적으로 조절하거나 지시어 사용, 음역을 이동하는 등의 방법으로 음악에 내재한 거리감과 깊이감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선율의 윤곽으로 대상을 직접 그려내기도 했다. 피아노 모음곡 중 첫 곡인 <물의 반영>에서는 선율의 윤곽선이 반원형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물 위에 떨어진 나뭇잎으로 인해 생긴 파문의 형태를 그려낸 것이다. 프렐류드 <아마빛 머리의 소녀>에서는 변덕스러운 소녀의 마음을 암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는 선율을 사용했으며, 프렐류드 <가라앉은 사원>에서는 시작과 절정을 거쳐 끝맺음하는 아치형 구성으로 선율 위에 대사원의 건축물을 그려냈다.
 문학과의 결합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드뷔시의 음악은 대부분 표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 시대에 성행한 표제음악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했으며, 자신이 붙인 제목은 ‘음악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나타낼 뿐 듣는 이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의미는 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드뷔시는 자신의 프렐류드 악보 첫머리가 아닌 마지막 장 괄호 속에 표제를 적어놓았다. 또한, 기존의 직접적인 지시어가 아닌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고뇌에 찬 마음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슬픈 후회를 가지고’와 같이 간접적인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연주가가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인생도, 음악도 불협화음
 1900년대 초반은 드뷔시의 작품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때였으나, 그의 사생활 또한 격동적으로 요동치던 시기였다. 1899년 드뷔시는 의상 디자이너 로잘리 턱시에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1904년 그의 제자의 어머니인 엠마 바르닥과 사랑에 빠지면서 아내를 떠나게 되었다. 이 일로 그의 아내였던 로잘리는 자살을 기도했으며, 1908년 바르닥과의 결혼은 음악적, 정서적으로 교류했던 친구들이 실망하며 그의 곁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바르닥의 삼촌이자 재정적 후원자였던 오시리스는 드뷔시와의 스캔들을 이유로 바르닥의 재산권을 박탈했으며, 이로 비롯된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드뷔시는 그 후 7년 동안 원하지 않는 여러 나라로의 연주 여행을 강행해야만 했다. 또한, 재혼한 지 1년도 채 못 돼서 발병한 직장암의 고통을 잊기 위해 복용한 다량의 모르핀과 코카인은 그의 신체와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드뷔시의 마지막 관현악 작품이 되어버린 <유희>는 1913년 무용가 니진스키가 제작한 발레 안무에 맞춰 시작되었다. 이 곡에 나타난 음악적 언어의 난해함으로 인해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다가 프랑스의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를 비롯한 후기 세대들에게 20세기를 여는 중요한 음악으로 재발견, 재평가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서히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선율이 두 번 이상 반복되는 구간이 없을 만큼 자생적이고 비순환적이며, 이전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조성적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기 때문이었다. 
 급격히 악화된 건강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때문에 1910년대에 들어선 후 그의 작품활동은 급격히 감소했으나, 독일의 무력 앞에 무너져가는 프랑스를 보며 자신이라도 독일의 음악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지로 다시 작곡에 몰두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 곡의 소나타는 ‘소나타’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독일적 음악과 거리가 먼 프랑스 음악 특유의 간결함을 그만의 언어로 결합하여 나타내고자 했다. 
 1917년 5월, 드뷔시 자신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맡은 두 번의 공연을 끝으로 그의 음악 활동이 끝을 맺었다. 1918년 1월 25일, 전쟁이 채 끝나지 않았던 그 시기에 드뷔시는 10년 동안 고통받아 온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젊은 드뷔시의 전통적인 바그너적 음악에서부터 다른 예술과 접목하고자 한 다양한 시도를 담아낸 전성기를 거쳐 죽음을 앞두고 작곡한 현대음악의 무조성적, 불협화음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후기까지, 드뷔시의 인생사는 낭만주의를 탈피하는 음악사와 매우 닮아있다.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로 평가되는 스트라빈스키나 쇤베르크의 무조성적인 음악과 비교했을 때 드뷔시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서정적이고 질서정연하게 들리며, 그의 음악 속에 조성적 요소가 남아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드뷔시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를 통해 자신의 음악에 비화성적 요소를 도입했음에도 당시 청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첫 번째 작곡가이다. 그는 전통적인 조성체계의 원리들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자신이 담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냈고, 자신의 음악에 화성성과 비화성성을 모두 녹여냈다.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에 비해 드뷔시가 보인 전통에 대한 도전은 덜 파격적이었지만, 그의 음악적 사고만은 누구보다 혁신적이었다. 그가 남긴 말은 드뷔시의 사후에도 남겨져 후배 음악가들이 추구할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했다. “나는 음악에 자유를 바라고 있다. 음악은 자연과 상상력과의 만남 위에 성립되는 것이므로 어느 예술보다도 아마 자유를 숨 쉴 수 있을 터이다.” 
 

 

참고문헌 | <20세기 작곡가 연구 1>, 20세기작곡가연구회, 음악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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