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의 사실은 사회 속에 있는 개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입니다. 또한, 개인행동으로 하여금 행위자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의, 때로는 반대의 결과까지 초래하게 하는 사회적인 힘에 관한 사실인 것입니다.”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저작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개인의 활동과 사회적 변화가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개인의 삶이 거대한 이념의 충돌이나 세력 간 이권 다툼의 분출구가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개인의 결단이 사건의 흐름을 뒤바꿀 수도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정치적 진영 간의 반목과 반유대주의가 폭주한 사건으로, 개인의 행동에 다수가 크게 영향을 받은 예시이다. 본 기사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의 전개와 그 과정에서 빛난 한 언론인의 놀라운 용단을 다루고자 한다.

억울한 용의자 드레퓌스
1894년 9월,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은 독일과의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독일대사관으로 프랑스 육군의 기밀 정보를 담은 명세서가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정보국은 포병 장교 중 유일한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 대위를 용의자로 지목하였다. 자백을 유도하는 가혹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으나 명세서에 쓰인 필적의 유사성을 근거로 참모본부는 드레퓌스의 계급을 박탈하고 그를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 보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은 불공정했다. 우선 드레퓌스의 용의자 지목 과정에서부터 의문점이 많았다. 사건 조사를 담당하던 파티 드 클람 소령은 합리적 근거 없이 포병 장교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지목하였는데, 그 기저에는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드레퓌스 대위가 기소된 14가지의 혐의 중 제대로 된 근거는 명세서의 필적이 유사하다는 점밖에 없었으나, 그 필적 조사마저 조작된 것이었다. 필적 조사에서 드레퓌스가 명세서를 쓰지 않았다는 필적감정사 고베르의 증언은 참모본부에 의해 묵살당했으며, 후에 본부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필적감정사를 불러 드레퓌스가 자신의 필적과 다르게 명세서를 작성하며 필적을 조작했으나, 명세서는 드레퓌스가 쓴 게 틀림없다는 거짓 증언을 받아냈다. 재판은 드레퓌스 측 변호사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23명의 증인은 전부 프랑스 육군 본부 소속이었다.

묵살된 사건의 이면
반유대주의 성향의 언론, 가톨릭교회, 그리고 프랑스 군부의 맹렬한 비난과 ‘유대인 출신 배신자’에 대한 대중의 악감정 속에서 드레퓌스 대위는 공개된 장소에서 굴욕적인 강등식을 당한 후 비인도적 대우를 받으며 유배되었다. 그렇게 사건이 종결될 뻔했으나, 1896년 새 정보국장으로 취임한 조르주 피카르 소령이 드레퓌스가 사건의 범인이 아니며, 에스테르하지 육군 소령이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임을 암시하는 문서를 찾아내어 상황이 반전된다.
피카르 소령은 이를 육군의 수뇌인 비요 장군에게 즉각 알렸으나, 이전 판단에 대한 잘못을 인정할 생각이 없던 군 수뇌부는 증거를 은폐한다. 동시에 피카르를 사건에서 배제하기 위해 튀니지로 좌천시키고, 종국에는 그를 기밀 누설죄로 체포하였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조작되었음은 일파만파 퍼졌으며, 상원의원 쉐레르케스트너와 드레퓌스의 가족을 중심으로 에스테르하지를 재판하고 드레퓌스의 사건을 재심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진영 다툼으로 번진 재판
드레퓌스가 유죄이며 재심을 반대하는 입장의 가톨릭주의자, 귀족 세력, 군부와 드레퓌스가 무죄이며 재심을 해야 한다는 입장의 진보적 지식인, 공화주의자 세력, 공산권 운동가들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정서를 자극한 재심 반대파에 의해 다수의 대중은 드레퓌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재심 찬성파는 매국노로 비난받곤 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국론 분열의 배경에는 그 당시 혼란스러웠던 프랑스의 상황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제3공화국 시대로,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국가주의의 형태로 국민을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군부에는 시골 귀족 출신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고, 과거의 계급을 바탕으로 귀족끼리 유대와 유착을 형성하고 있었다. 독일에 복수하는 것에 열중하던 프랑스의 분위기는 이들에게 큰 정치적 지지와 힘을 실어주었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의 특권을 그리워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 

<나는 고발한다...!>
재심을 두고 각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1898년 1월 11일 에스테르하지가 무죄 선고를 받음과 동시에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 청구는 기각되었다. 이에 드레퓌스를 옹호하던 공화주의자와 지식인 세력은 격분하였다. 이전부터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5편의 글을 썼던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는 문학신문 ‘로로르’ 지에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고했다. 드레퓌스에 대한 첫 번째 군사재판과 에스테르하지에 대한 두 번째 군사재판이 부당함을 알리며 관련자들을 고발한다는 내용의 이 글은 프랑스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까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에스테르하지 소령의 무죄 판결로 서서히 식어가던 드레퓌스 재심 청구 운동이 다시 불붙은 한편, 프랑스 국내외의 수많은 지식인이 졸라의 고발에 찬사를 보냈다. 재심반대파 세력은 대중을 선동해 졸라를 비난하고 명예훼손으로 그를 법정에 세웠다. 에밀 졸라는 1898년 2월 치러진 재판에서 징역과 벌금을 선고받았으나, 선고를 거부하고 영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에밀 졸라는 19세기에 활동했던 소설가로, 빅토르 위고, 보들레르,  모파상 등 당대에 활동했던 화려한 프랑스 출신 문단의 일원 중 하나였다. <나나>, <목로주점> 등의 작품으로 유명해진 졸라는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성공한 문호 중 한 명이었다. 드레퓌스 재판 당시엔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어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1897년 말 드레퓌스 사건을 친구 문인 라자르를 통해 접하면서 졸라는 재심 찬성파의 강력한 지지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권은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고, <나는 고발한다...!> 기고 이후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하고 이전에 수여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박탈한다. 고발로 인해 치른 대가는 비단 명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벌금, 망명 비용 등은 졸라를 파산 상태까지 몰고 갔다. 졸라의 망명을 두고 당당히 체포에 응했어야 옳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나, 진실을 밝힌 죄로 가혹한 대우를 받았음은 분명했다. 

진실을 위한 희생
1898년 8월, 드레퓌스와 에스테르하지 재판에서 증거 조작을 감행했던 앙리 소령이 자살하고, 에스테르하지가 영국으로 도주하면서 <나는 고발한다...!>가 일으킨 파급력은 절정에 달한다. 결국 군부, 재심반대파, 정권은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밀려 원심을 파기하고 재심을 결정한다. 영국으로 도망친 에스테르하지 소령이 2개월 전 명세서의 주인이 자신임을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1899년 9월 법정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다시금 확정하는 한편 그에게 사면을 대가로 죄를 인정하라고 제안한다. 군부의 위신을 깎지 않으면서 재심파의 요구를 잠재우기 위한 미봉책이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결정을 비난했으나, 수년간 감옥생활을 하며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끝내 사면을 택한다. 사면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의 복권은 끝까지 군부와 대립한 공화주의자 세력의 노력으로 1906년에야 이루어졌다. 졸라는 조국 프랑스가 합리성을 되찾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02년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드레퓌스 사건, 그 후
드레퓌스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한 유대인 장교의 비극에 불과할지 몰라도, 유럽 역사의 흐름에서는 주요한 전환점이었다.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거치면서 왕정파, 귀족, 비합리적 종교주의자와 같은 과거 봉건주의의 유산과 결별할 수 있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진 충격으로 인해 프랑스 군중 사이엔 군부를 숭상하는 분위기와 국가의 힘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내셔널리즘이 만연했고, 진보적 정치인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과거를 그리워하는 세력들은 반유대주의 정서를 내세워 국민을 선동했다. 드레퓌스의 억울함이 밝혀지며 프랑스는 비정상적이던 군중의 불안감을 환기하고, 동시에 봉건 사회에 대한 향수를 청산하였다. 프랑스가 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고 근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겪었던 과도기적 사건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는 사실은 시오니즘의 등장을 불렀다. 유대인들은 차별로 인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이는 독자적인 국가 건설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과정에서 유대인에 대한 근거 없는 음모론과 증오가 비지식인 일반 민중 사이에 확산되면서 반유대주의가 더욱 구체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유대인은 근대에 들어서 유럽 사회와 동화되어 살고 있었으나, 여론전 과정에서 유대인은 민족 간에 조합을 이루어 조국과는 별개로 유대인만의 이득을 위해 활동한다는 등 음모론적 인식이 퍼졌다. 
또한,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이뤄졌다.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반유대 언론은 허위사실을 통해 군중을 선동했다. ‘로로르’ 등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진보적 언론과 ‘르 프티 주르날’을 대표로 하는 반드레퓌스 언론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때 적극적으로 여론조작에 뛰어드는 현대적 언론의 부정적인 모습이 등장했다. 학자들은 여론의 전달자가 아닌 제작자 역할의 언론의 등장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파시즘 국가가 프로파간다로 국민을 선동한 것의 전조로 해석하기도 한다.

“저는 우리나라가 거짓과 불의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저는 유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준 데 대해 제게 감사할 날이 올 것입니다.”에밀 졸라는 기고문 <배심원들을 향한 최후 진술>의 끝에 이렇게 작성했다. 1908년, 졸라의 유해는 시민들의 애도 속에 프랑스 위인이 안장되는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이장되었다. 이러한 행적은 언론의 진실성과 정치적 사안에 대한 여론 조작 문제가 끊임없이 의심되는 현대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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