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김창대

갑자기, 그녀가 생각났다.
연애에 대한 망상을 즐기고 있던 중이었다. 난 왜 없을까를 주제로 때로는 개그콘서트를, 때로는 무한 도전을, 때로는 시라노 연애 조작단을 찍어 온 것이, 어지간한 모태솔로도 따라오기 힘들만큼 방대한 분량이 되었다. 사실은 왜 없을까를 논하며 외로움을 즐기는 것일 게다. 생기고 나면 이걸 못하니, 재미는 덜하겠다 싶기까지 하다. 어쨌든 오늘은 끝장토론이다. 진지한 성찰과 혼잡한 고성이 뒤섞이다, 패널 한 명에게 카메라가 집중된다.
“여자친구가 생기고 싶다면, 쪽질을 그만 둬. 만약 여자친구가 생긴다 해도, 네 쪽질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만 둬.”
쪽질은 “학교 쪽문 근처에서 이루어지는 교우 관계 유지 및 증진을 위한 활동”을 의미하는 말이다. 뭐, 나만 빼고 모두가 “쪽문 근처에서 여자를 만나는 행위”로 알고 있긴 하다. 대학교랍시고 정문 앞에는 지천 하나 흐를 뿐이라,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다들 쪽문 근처에서 하는데도, 유독 내가 하는 것만 “쪽질”인 것도 이런 연유다. 내가 여자만 만나는 것도 아닌데다, 소중한 친구들을 대상화하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진 않는다. 허나, 여초 현상이 극심하다는 기독교 동아리에조차 남자가 훨씬 많은 KAIST에서, 남자보다 여자인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랍기는 하다. 어쨌든, 이미 잘 짜둔 정신 승리용 필살기를 꺼냈다. “쪽질을 하면 연애가 어려워지지만, 쪽질을 안 하면 여자를 안 만나니 연애가 불가능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패널이 설문 조사 결과를 들이민다. “쪽질이 요한이의 연애 시작을 방해한다고 보십니까?” 90% 찬성, “요한이가 연애 시작 후에도 쪽질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90% 반대. 오늘은 만만치 않군.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이 했다던 사고실험을 도입하기로 했다.
먼저 가상의 여자 친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렸다. 여자로만 골랐다. 여자 친구가 내가 그 친구와 만나는 걸 싫어한다면? 아니, 신경 쓰인다고만 해도 당장 그만 만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와 밥 한 번 먹겠다고 떳떳하게 말해볼 수 있다. 스스로 찔릴 것도 없거니와, 여자 친구의 의견을 따를 준비도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쪽질을 그만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휴우. 됐다. 아, 이 위대한 역설이여.
그런데 이 때, 그녀가 생각난 것이다.
혼자 밥 먹기 싫을 때, 네 번째쯤 문자를 넣어보는 친구다. “밥먹자”, “가자”, “노노”(No, No)도 쓸 것 없이 그냥 “ㅂ”을 보내면, “ㄱ”이나 “ㄴ”이 왔다. 계산할 때면 말없이 더치했고, 아무 이유 없이 사기도, 얻어먹기도 했다. 캔음료를 나눠 마시는 데도 거리낌 없었고, 오늘은 생리통이 심해서 못 나오겠다는 말에도 스스럼없었다. 게다가 10년차다. 이제 모든 경험주의자는 남녀 간에 친구 사이가 불가능하다는 이론을 엎어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니 이 친구가 목록에 들어있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 친구와 밥 먹으러 가겠다고 하는 게 찔렸다. 분명히 바람일리도 없고, 바람 일래야 일수도 없을 터, 그런데 마음에 걸렸다. 이 친구를 만나면, 전자레인지에 30초쯤 데운 흰 우유를 마시는 것처럼 편했다. 날 위로할 줄도 알았다. 본디 징징거리길 잘해서 위롯말을 참 많이 듣고 다니지마는, 고맙다면서도 내심은 마음에 들지 않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끓여놓은 지 한 시간은 넘은 따뜻할 리 없는 죽 같은 위로만 주는데도, 그게 참 꿀떡꿀떡 잘도 넘어가는 것이다. 보통은 삽시간에 가시방석이 되고 마는 정치, 종교 이야기를 한참이나 떠들어대도, 어긋나는 톱니 하나 찾기가 힘들었다. 툭하면 “각자 어서 결혼해서, 그만 만나도록 하자.”라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 쪽질만큼은 그만두기 싫다는 생각과 마주했다. 그리고 내가 창제한 빌어먹을 역설은, 그러니 이것만큼은 그만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순간, 살짝 데운 흰 우유이던 그녀가, 스틱 커피 트리플샷으로 변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부쩍 예뻐진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짧은 머리, 뽀글 머리였던 시절에도 곱상했지만서도, 요즈음은 Y염색체만 있다면 가슴이 두근댈 긴 생머리를 팔락이고 있었다. 살쪄서 미웠던 몸매인 적도 없었지마는, 특히나 요즘은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상반신 몸매까지 훑는 건 너무 남사시러우니 넘어가자. 그리고 여전히 민낯에도 고운 피부를 유지하지만, 화장은 또 어찌나 잘하는 지. 내 부끄러운 소년 로망에는 세수만 해도 아름다운 로션 모델을 최고로 꼽지만, 그녀의 화장에만큼은 소년이 성장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패션이 완성이요 화장의 근원인 얼굴을 빼놓을 수 없지. 그런데 내 나쁜 기억력에 10년이란 세월은 마치 평생 같아서, 그녀의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마치 우리 엄마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제 아무리 눈 높은 이가 본대도 못생겼단 말은 못할 얼굴이기도 하지, 암.
얼씨구. 그렇다고 그녀라니. 야동 보다 들킨 것 같은 죄책감과 함께,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별 생각을 다 한다며 헛헛댔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이러한 생각이 처음이 아님을 고백한다. “내가 이런 여자 놔두고 어디 가서 누굴 찾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 심심찮게 해왔다. 다만 그 친구는 성지였다. 나같이 미천한 것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갑자기 인간극장이 시작된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들 1편. 화창한 봄날 그녀는 캠퍼스에 서 있다. 옆에 서있는 건 나다. 열 발자국쯤 떨어진 자리에서 복학생 몇 명이 수군거린다. “야, 쟤 예쁜데~” 물론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 중 한 명이 불쑥 다가와서 때 아닌 동아리 홍보에 열을 올렸고, 그녀는 그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지는 건 흔하디 흔한 복학생과 신입생의 사랑 이야기다. 군대에서 푹푹 삭혀 온 복학생의 끓는 청춘은 두어 달 타오르더니 갑자기 이별을 통보해버렸다.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흔한 이야기가 흔해진 것은 그것이 정말로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함의로, 그녀는 그 오빠를 사랑했었다. 그러면 뭐하나. 그 오빠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고, 그 후 몇 달간 그녀의 어두움을 대면해야 했던 건 나였다. 때때로 “나 지금 울고 있어”라는 메신저 대화창을 먹먹한 가슴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것도, 나였다.
인간극장 2편이 시작된다. 세월은 불쑥 흘러 27세가 된 그녀. 연구실 선배가 소개팅을 시켜주기로 했다며 좋아하고 있다. 소개팅남이 음식점에서 직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에 마음이 흔들려버린 그녀는 이내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친절은 밖으로만 향했다. 핸드폰 케이스를 흙탕물에 떨어뜨려 못 쓰게 되었노라고, 맨 핸드폰을 몇 날 며칠이고 들고 다녀도 신경도 안 쓰더랬다. 한참을 기다리다 꾹꾹 눌러 참고 하나 사달라고 졸랐더니, 핸드폰 살 때 끼워줄 법한 케이스를 툭 던져주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의 다른 남자들에게는 그리도 관심을 가졌다. 매 끼니를 누구와 먹는 지 보고해야 했고, 이윽고 모든 술자리가 연구실 회식이 되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내가 전해들은 이야기도 여기까지, 그 남자가 “술 취해서 몸 못 가눌까 걱정되어” 찾아 헤맨 그녀가 교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걸 발견한 날부터는 연락 한 번 없었다. 몇 달 뒤, 늦은 퇴근에 피곤한 발걸음으로 집 앞에 막 당도했을 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 즉시 발걸음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새벽 4시쯤엔가 집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간극장은 어이없게도 내 독백으로 마무리되었다. “차라리 나를 만나지는, 왜 그런 남자들을 만나 고생을 하니. 나보다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할 거 아냐!” 외치는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만난다면? 인간극장 3편은, 내 이야기로 이어졌다.
풋풋한 대학교 1학년 시절. 가을학기 물리실험 수업에서 여학생과 실험짝이 되는 흔치 않은 기회가 왔었다. 실험도 실험이지만 보고서도 쓰려다보니 만남이 잦아졌고, 도서관에서 만나다보니 굳이 헤어질 필요가 없어서 만남이 길어졌다. 공부하다 슬몃슬몃 바라본 실험짝은 화장기 없는 뽀얀 얼굴과 아담한 손에 살짝 긴 손톱을 가지고 있었고, 늘 단정한 남방을 입고 첫 번째 단추는 풀어 두었다. 내 두근거림을, 내 친구 그녀가 먼저 눈치 채 버렸다. 잘해보라는 그녀의 말에, 난 그저 공부를 같이하는 친구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매일 새벽 3~4시까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던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고 첫 토요일, 습관적으로 찾은 도서관엔 실험짝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단둘이 파스타를 먹으러 갔고,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로 영화관을 찾았고, 나올 때는 손을 꼭 잡은 상태였다. 그녀는 “결국 그리 될 줄 알았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나는 군대에 가겠노라고 여자친구에게 통보했다. 군대에 다녀올 동안 기다려 준다면 결혼까지 생각해 볼 심산이었는데, 여자친구는 헤어지자고 했다. 그 때의 나는 어렸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4편은 내 대학생 시절 마지막 학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 때, 나는 연애가 하고 싶었었다. 꽤나 친하던 동아리 후배 한 명을 찍었다. 널 좋아하겠노라고 했다.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놀이동산도 갔다. 동아리 엠티 날엔 다른 일정을 핑계로 둘이서만 따로 기차를 타고 엠티 장소로 향하기도 했다. 이러기를 4개월 째, 몇 달 동안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넌지시 그만 두기를 권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후배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 뒤로도 반년이나 더 후배를 쫓아다녔고, 후배는 끊임없이 만나주면서도, 받아주지는 않았다. 내 마음과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참으로 고맙게도 나를 확실히 차준 날, 나는 그녀를 술집으로 불러 오만 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오늘 계산은 네가 해줘. 난 마실게.” 그 밤, 그녀는 술도 안마시고 별 말도 하지 않았다. 소주 세 병에 맥주 두 병을 마셔댄 나를, 다른 친구를 불러다 방까지 바래다주었을 뿐이다.
어느덧 인간극장 마지막 편. 바로 올해의 이야기이다. 혼기가 차가려니, 한 달이 멀다하고 소개팅이 들어왔다. 급기야 서너 개의 소개팅이 동시에 들어오기도 했다. 모든 소개팅을 거절하면서도, 나는 한 명 한 명을 참 깊이 있게도 고민했다. 그녀와 함께 말이다. “이 여자는 이런 직업을 택한 것 보니 나랑 가치관도 잘 맞을 것 같고 존경할 만도 한데, 사는 곳이 너무 멀어서 연애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 “이 여자는 괜찮기는 한데 우리 엄마가 꼭 전문직 여성하고 결혼해서 맞벌이하라는데, 어쩌지?” “이 여자는 진짜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 좀 덜 예뻐. 어떡하지? 외모만 따지면 안 되는데... 정 들고 나면 예뻐 보이지 않을까?” “이 여자는 페이스북은 안 하나봐. 열심히 찾았는데, 안 나와. 알 수 있는 게 없네.” 지루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표정을, 나는 보지 못 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서 했던 두어 번의 소개팅마저 별 소득 없이 끝나버리고, 드디어 마지막 장면. 내가 풀죽어 말한다. “나 이제 더 이상 소개팅 안 하려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래라.”고 쏘았다.
아아. 내 참 병신 같은 20대를 보내고 있었구나. 그녀가 아직 날 친구로라도 곁에 둔 것만도 은혜로다. 내 종교만 없다면 그녀를 위해 새로이 경전을 써도 모자라겠구나. 그녀는 나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건만, 나는 그녀에게 한갓 미물일 뿐일 터, 그녀는 역시 내 입버릇대로 “나보다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하겠구나.
입술을 빼쭉거리며 발밑의 이불을 들어 올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갑자기 그녀의 배불뚝이 바나나 우유가 떠올랐다. 며칠 전 함께 밥을 먹고 들어오는 길, 배불뚝이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마셨다. 헤어질 쯤 그녀가 “버려줘”라면서 불쑥 내민 빈병을 난 대뜸 받아들었다. 돌아서서 무심코 바라본 빨대 끝이 빨갰다. 바닥에 얇게 남은 바나나 우유가 정말 맛있어 보였었다. 정말로.
그녀가 이따금 페이스북에 올리던 시들도 생각났다. 읽을거리가 하도 넘쳐나서 140자짜리 트위터도 위의 스무 글자나 읽어대고 넘겨 버리기 일쑤인 세상에, 그녀는 가만히 시 한 구절 감상할 줄을 알았다. 번잡한 하루의 끝에도 그녀 무릎 베고 누우면 시 한 수에 마음이 차분해질 것 같은 느낌. 코털이 삐쭉한대도, 아름다우리라.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페이스북 메신저 친구 목록에 그녀가 항상 상위에 떠있다. 연락은 다른 방법으로 해 와서 페이스북 메시지는 언제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말이다. 어떤 순서로 뜨는 거지? 혹시 그녀가 나와의 대화창을 자주 눌러보는 건 아닐까?
몇 주 전, 그녀는 누가 소개팅을 시켜주기로 했다는 얘기를 했었다. 듣기로는 남자가 괜찮아 보인다는 얘기 끝에, “그런데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어”라고 붙였다. 왜 굳이 그 이야기를 했을까? 맥락도 안 맞게시리. 또, 지난 주 교회에서 목사님이 옆 사람과 손을 잡고 기도하라고 했을 때, 날 깍지 손으로 잡은 것도 생각났다. 은연중에 날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의식적으로라도 말야. 게다가 엊그제는 “올해 남자 만나서 내년쯤 결혼할 거야”라고도 했다. 이미 소개팅은 엎어진 뒤였다. 혹시나 싶어 “누가 소개라도 시켜 준대?”라고 물어보았지만, 한숨만 쉬었다. 혹시, 나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닐까? 그 때는 나를 만나고 있었잖아!
하아. 다 오해와 왜곡인 거 안다. 큰 기대 안 한다는 건 그저 스스로의 평이고, 손을 잡으라고 하니 잡으려다 방향이 같으니 자연스레 손가락이 교차된 것이고, 그녀도 나처럼 그저 결혼이 하고 싶어 툴툴대는 것임을, 모르는 것 아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싶었다. 내 심장은 내 가슴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 낮에 인터넷을 보다 이름도 낯선 연예인의 스캔들 기사를 제목만 보고 지나친 게 미안해졌다. 그 기자도 나름의 노력이 컸을 텐데.
생각해보면 나름의 잘해준 것도 없지 않다. 대학교 1학년 때 프로그래밍 과목의 숙제를 도와줬었다. 컴퓨터를 전공하러 대학에 왔기에 엄청 기대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공통필수과목이라 어쩔 수 없이 듣는 것이었다. 다른 과목 숙제는 기한을 넘겨 내기를 밥 먹듯 했던 나지만, 그 과목만큼은 미리미리 했다. 그러고 나면 꼭 그녀에게 문자가 날라 왔었다. 그래봤자 예비 전공자인 내가 그다지 뛰어날 리는 없었고, 같이 헤매고 실수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꼬박 꼬박 나에게만 묻곤 했다. 내가 만만해서였을까? 아니면 같은 눈높이라 설명이 쉬웠던 걸까? 어찌됐건 몇 시간이고 채팅으로 설명 해주다 보면 동이 트기 일쑤였고, 그러고도 모자라 다음 날도 그랬다. 그런 날엔 나는 아침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지만, 그게 미안해서 더 이상 안 물어볼까봐 그 사실을 꽁꽁 숨겼다. 아잇. 맞다. 마지막 숙제는 나도 쩔쩔매니까 결국 다른 컴퓨터과 선배에게로 갔었지. 김빠지네. 하긴, 내가 50점 밖에 못 받았었으니 내가 도와줬으면 그녀도 변변치 못했겠구나. 다행이다.
또 생각났다. 내가 제대하고 돌아온 첫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9시쯤인가 배가 출출하여 매점에나 다녀오자고 문자했더니 뜻밖의 응답이 왔다. 점심께 발목이 접질려 깁스를 하고 왔다는 것이다. 화장실에도 겨우겨우 다녀오는 처지라고 했다.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니 아침에 나간 룸메이트마저 소식이 없어 방에 굴러다니던 과자 쪼가리나 몇 개 주워 먹었다고 했다. 냉큼 전화를 걸어 혼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말을 할 것이지! 화장실에 갈 수 있다니 기숙사 앞까진 나올 수 있겠네! 지금 당장 나와!” 그리고 후배에게 자전거를 한 대 빌렸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그녀가 보였지만, 여자 기숙사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앞까지 온 그녀의 이마엔 땀방울마저 송글송글했다. 내가 남자인 걸 원망했다. 그래도 밥은 먹여야겠다 생각하며, 자전거 안장에 그녀를 앉혀 놓고, 손잡이는 내가 잡았다. 그녀는 때 아닌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했고, 나는 멸치볶음이 밑반찬으로 나오는 고기 집으로 자전거를 끌었다.
그 밤은 그녀의 어머니를 처음으로 뵌 날이기도 했다. 자기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은 걸 혼 내켜 연락을 드렸더니 그 길로 달려오신 것이다. 한참이나 고기를 굽다 보니, 기숙사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차가 옆으로 섰다. “어유~ 얘는 이렇게 다쳤으면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냐!” 속상함을 담아 아프지도 않게 딸을 몇 대 때리고서야 어머니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정말. 그래도 우리 딸이 친구는 잘 뒀네. 타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하지만 나는 빌린 자전거를 끌고 가야했고, 그녀만 어머니 차에 타고 갔다. 금방 어머니가 오실 수 있는 걸 괜히 끌고 갔다 싶었다. 그녀만 힘들게 말야. 차는커녕 자전거 하나 없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전거를 타면 금방인 거리를, 나는 걸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 날로 휴학계를 냈다. 그녀에게 고기를 구워주며 했던 얘기가 생각나 머쓱했었다. “오전엔 같은 건물에서 수업이 있으니 내가 데려다줄게. 점심은 돌아오는 길로 같이 먹으면 되겠고, 오후엔 너 수업 좀 일찍 가. 내가 너 데려다놓고 내 수업 가게.”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다른 도리가 없으니 잠자코 듣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나도 참 괜찮은 인간이구나. 히힛. 그녀도 이만한 남자 드물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쁜 남자는 아니니, 그녀가 손해 보는 건 아니지 않을까? 어머니께서도 좋게 봐주실 테니 말이다. 불쑥 손에 묵직한 것이 잡혔다. 뱃살이었다. 이러다 뽈록 나오겠다며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두어 달 된 것 같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면서, 바로 그 입으로 우걱우걱 먹는 것도 그녀는 보았을 것이다. 보다 못해 “이제 운동 좀 해. 배 꽤 나왔어.”라고 말해준 것도 한 달이 넘었다. 그 때마다 “응! 이제 할 거야!”라고 말했던 것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이딴 의지력으로 그 누구의 남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핸드폰을 스윽 보니 벌써 새벽 네 시다. 9시면 출근하는 그녀는 네 시간쯤 후면 자리에서 일어날 거다. 나는 또 정오나 되어서야 눈을 비빌 테지. 그리고 잠을 깬다는 명목으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보며 한 시간은 뒹굴 거릴 것이다. 이리도 게으른 나를 좋아할 리가 없구나. 그럴 테지.
그래도! 이제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와도 이는 꼭꼭 닦고 나서 눕지 않는가! 몇 달 전 그녀와 밥을 먹고 온 후 부터였다. 그 때 음식점 TV에서 치과보험 광고가 나왔는데, “남성분들, 회식 끝나고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냥 자버리는 경우, 많으시죠?”라는 멘트가 나왔다. 속으로만 뜨끔했다고 생각했는데, 표정에도 드러난 모양이다. 그녀가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는 좀 닦지이!” 그 후로는 술만 마시면 그 말이 맴돌아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치약은 묻혔다가 잔다. 어때? 이런 발전가능성은 그녀가 잘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휴우, 발전은 무슨. 남들 다 하는 거, 뒤늦기만 했지...
그래, 내가 무슨 여자친구냐. 때려치우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이왕 만든 가상의 여자친구와 연애나 즐길 심산이었다. 우리는 종이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들고 다정하게 걸었다. 한 모금 살짝 마시고난 여자친구의 컵에 립스틱이 묻어 있다. 그녀의 배불뚝이 바나나우유가 생각났다. “오빠! 우리 내일이 300일인데 뭐해?” 여자친구가 물었다. “글쎄... 찐한 멜로 영화나 보러 갈래?” 그녀와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아니면... 놀이동산 갈래? 왜, 요번에 새로 꾸몄다는 데 있잖아.” 그녀와 놀이동산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에너지 보존 법칙과 구심력 따위에 대해 열렬히 논했었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목소리를 높인다. “오빠. 뭐야, 미리 생각 안 해놓은 거야?” 삐쳤나보다. 어떡하지... 그녀에게 물어볼까... 아차.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만나고 싶으니까, 그녀만큼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자꾸 생각나니까, 그녀만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이미 내 모든 부분이 그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다시는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면,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면, 오히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나를 받아달라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모든 사랑은 끝난다. 다만 이별이냐, 사별이냐가 다를 뿐이다. 내가 그녀에게 손 내미는 것은, 어차피 다가올 이별을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다. 아니면, 아니면, 이별을 사별까지 미루거나.
사실은, 이별을 그녀에게로 미루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너와 떨어지기 싫으니 네가 판단하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저 지금이 좋으니까, 그녀가 좋으니까, 그녀와의 이별이 싫으니까. 이걸 사랑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방법은 있을까? 일단은 흔한 방법부터 떠올렸다. 일단 자주 만나는 것. 하지만 이미 일이 주에 한 번쯤은 밥을 먹고 있는 걸. 좀 더 세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미 몇 번 봤네... 아예, 술을 마시자고 할까? 근데 그것도 이미 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평소처럼 예뻤고, 평소처럼 다정했고, 평소처럼 즐거웠다. 친구로서.
아니면, 먼저 뱃살부터 빼는 건 어떨까? 멋진 식스팩을 만드는 거다. 그리고 이참에 그녀를 제외한 모든 쪽질을 끊어버리는 거다. 그녀와는 지금처럼 자주 만나면서 말이다. 어느덧 멋있게 변해있는, 그리고 그녀에게만 집중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나면, 날 다시 보지 않을까? 그런데, 내일은 연구실 회식이 있는 날이구나. 메뉴는 된장벌꿀삼겹살이라고 했다. 술에 훅 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기는 충분히 먹어두어야겠지. 그리고 모레는 또 치킨을 사랑하는 친구와 야식을 먹기로 해두었다. 약속이 줄줄이 생각났다. 라면, 막창, 돈까스, 그리고 열에 아홉은 여자와의 약속. 풋. 아서라. 다이어트는 무슨, 쪽질을 관두는 건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느 때처럼 그녀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것이다. “나 요즘,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가 있는데, 좋아졌어. 잘 되고 싶은데, 어쩌지?” 그러면 그녀가 아주 아주 좋은 방법을 말해주겠지. 그것도 자기에게 제일 좋은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면 바로 그걸 그녀에게 하는 것이다. 처음엔 티 안 나게 조심조심, 하지만 결국엔 그녀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겠지. 그러면 그 때 사실은 널 사랑했노라고, 네가 가장 원하는 걸 해주고 싶었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친구겠지. 별빛에 안기고픈 밤들과 햇빛이 짓누르는 낮들에 우리는 항상 친구였다. 군대에 가서 두어 달에 한 번쯤 통화할 때나, 과제를 하느라 며칠 밤을 함께 샐 때도 그랬다. 그녀가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나, 무궁화호에 나란히 앉았을 때도, 10년의 세월을 뚫고, 우리는 항상 친구였다. 한 번도 어긋난 적 없이. 어쩌면 우리는 이미, 누구보다도 뜨겁진 않지만,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 어쨌든 그녀가 나를 남자로 볼 리는 없겠다. 그러니, 머지않아, 모든 게 끝날 거야. 영원히, 이렇게, 가슴에 남겠지만.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난 누운 자리에서 또 한 명의 여자에게 차여버리고 말았다. 벌써 몇 명 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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