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신사의 품격>이 시청률 30%에 달하는 큰 인기 속에 종영되었다. ‘신품’ 열풍을 일으킨 이 드라마에서 말하는 ‘신사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약자를 위해 무거운 유리문을 잡아주고, 노인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며, 비 오는 날 먼저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는 이들, 게걸스러운 풍요보다 청빈함을 추구하는 이들, 그래서 ‘존경할 만한’ 중년 남성을 우리는 품격있는 신사라고 부른다.

품격은 신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에게도, 여성에게도, 청년과 어린이에게도 모두 품격이 있다. 심지어, 국가에도 품격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국가의 품격’을 국격이라고 부른다. 국격은 국가의 존재 이유와도 직결된다. 처음에는 자발적인 결사체로 생성된 국가에 불가항력으로 속하게 된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선조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국가의 존재 의미를 느낀다면 이는 품격을 갖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품격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국격이란 국제회의를 몇 차례 열었는지, 수출대기업이 2분기에 몇 퍼센트 성장했는지 등의 척도로는 결코 따질 수 없다. 그보다는, 회사가 폭력을 돈으로 구매하고 죄 없는 근로자들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때, 공권력이 얼마나 정의롭게 노동자들을 보호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무고한 시민들이 전체주의적 재개발로 하루아침에 삶터를 빼앗길 때, 얼마나 납득할 수 있도록 이들을 지원하고 위로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비판적 방송을 한 기자와 프로듀서를 마구 해고하지는 않았는지, 민간인을 사찰하고 무고한 이의 피의사실을 공표하지는 않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학에도 품격이 있을까? 물론 존재한다. 지성을 가르치고 진리를 탐구하는 시대의 등불인 만큼 고도의 품격이 요구되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의 품격 역시 국격과 마찬가지로, 모 기관의 대학순위의 어떤 부문에서 몇 계단 상승했는지로 결정되지 않는다. 대신에, 약자와 어린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감시하는 이들 앞에 얼마나 겸손했는지, 비판하는 자의 쓴소리를 얼마나 겸허히 수용했는지를 따지면 금세 드러난다.

어린 자인 학생들을 ‘네가 뭘 아느냐’며 무시하고 내쫓고, 감시하는 자인 언론인들의 정당한 취재를 막아서며, 비판하는 이들의 대자보를 철거하고 징계 카드로 위협하면서 ‘소수의 학생들’ ‘배후 가능성에 무게’ 등의 천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대학이 있다. 대학의 품격은 곧 그 대학이 양성하는 지도자의 품격이다. 대학순위와 논문인용지수에 앞서 품격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2012년, 대학의 품격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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