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균 기계공학전공 명예교수

* 정명균 기계공학전공 명예교수는 1978년 교수로 부임해 지난해 은퇴하고 현재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및 워싱턴주립대학 초빙교수이기도 하다. 난류 등 유체동역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정 교수가 보내온 칼럼을 본지는 다음 호까지 연재한다. (누리집에는 한번에 게재했습니다)

1978년 KAIST에 부임해 금년 초에 은퇴할 때까지, 32년 6개월 간 교수라는 직분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오면서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이 기회에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 문제는 다름아니라 나는 학문을 하고 있는가, KAIST 교수인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지성인인가, 그리고 박사 학생을 교육시키는 나는 과연 사회의 지도자를 기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다.

먼저 학문이란 무엇인가? 성교진 교수의 책 <학문과 인생>에서 옛날 군자는 자기수양과 자아실현을 위하여 학문을 했는데 요즘은 출세를 하고 재물을 얻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염려하면서, 학식과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먼저 학문을 통해서 순후한 심성을 길러 남에게 은혜로움을 줄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와 비슷하게 이명현 교수는 <스무살에 선택하는 학문의 길>이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자기의 몫을 다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학문 탐구는 인간 존재의 품격을 높이는 성스러운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퇴계학 연구원에서 발행한 <학문의 길, 사람의 길>에 보면 이황 선생께서는 천도와 인도가 일치된 사람, 즉 성인이 되는 것에 학문의 목적을 두고 학문탐구에 본인의 일평생을 다 바치는 한편 그 학문으로 제자들을 기르셨다고 한다. 학문은 자신의 인격을 기르고 덕행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 남의 이목을 생각하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터득하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서 남들의 평판에만 관심을 두고 명성이나 재물을 구한다고 비판하셨다. <중용>에 보면 하늘의 도는 항상 정성된 것이며 사람의 도는 그 정성을 우리의 내면에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황 선생의 학문의 길은 항상 정성되고, 엄숙한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섬기며 하늘의 뜻을 살펴 본인의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속에 욕심을 없애며 곧은 의리로 호연지기를 기르는 길이었음은 이황 선생이 남기신 퇴계집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학문과 학식의 차이다. ‘학문’은 <중용>과 <대학>의 서문에 주희(주자)가 밝힌 바와 같이 성인들의 경전을 통해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아 몸에 익혀서 자연과 이웃과 상생 공존하며 사람 가운데에서 진정한 사람을 이루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대학> 본문에는 천하에 밝은 덕을 밝혀 천하를 태평하게 하려면 먼저 스스로의 앎을 지극하게 해야 하는데, 앎을 극진하게 하는 길은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심령은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있고 천하의 모든 사물은 이치가 없는 것이 없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미진하기 때문에 사람의 앎에 부족함이 있어서 제대로 사물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므로, 옛날 대학에서는 먼저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의 모든 사물을 직접 관찰하고 이미 알려진 지식을 이용해 더욱더 궁구해서 사물의 이치의 전체대용을 활연하게 아는 경지에 이르게 해 앎을 극진히 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앎의 길, 즉 ‘학식’의 길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책에서 강조하듯이 학식으로 자신의 앎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에서 그것의 쓰임새를 넓히려면 먼저 학문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내가 과연 지성인인가 하는 의문이다. 지성인을 사전에서 아보면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지성이란 것의 정의가 사전마다 달라 무어라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지성인을 정의한다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갖추고 지인용(智仁勇)의 삼덕(三德)으로 신의 뜻과 생각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 좋을 듯하다.

이러한 지성인은 어디가나 진정한 사람의 향기를 피우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서 따르고 싶고, 함께하고 싶고, 함께 좋은 일을 계획하고 이루기를 바랄 것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니 나는 지성인과는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었고 아무리 정의로운 뜻을 세웠어도 주위의 눈치나 보면서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정년퇴임을 맞이하고 말았다. 속칭 일류대학을 나오고 괜찮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명성이 자자한 KAIST의 교수가 되어 전공분야의 이론은 나름대로 잘 알고 있어서, 박사 학생의 논문지도와 국가적 과제나 산업현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남 못지않게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나를 지성인으로 인정해주고, 나를 따라주고, 서로 좋은 관계로 나와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자신이 서지 않는 이야기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한 분야에만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인일 뿐이다. 주변에서 나를 이마저 안 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가치 없이 산 사람이 되고 만다. 참으로 두렵기만 하다.

세 번째는 내가 지금까지 공학박사를 48명이나 길러냈는데, 그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지도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교육을 했는가 하는 문제다.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라면 이 사회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일반 대중을 이끌어서 훌륭한 사회를 만들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주기를 국민 모두가 기대한다. 그런데 그런 박사를 만드는 데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참된 교육인가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 중 하나다. 그 교육의 목표가 사회와 나라마다 다르고, 한 나라에서도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통치자에 따라서 다르게 정해지고, 종교에 따라서 또한 크게 다르다. 교육에 대한 그 많은 말 중에서 내가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말이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고 하는 책에 나와 있다. 그 책에 보면 ‘교, 교인이윤상도학(敎, 敎人以倫常道學)’ 즉 교육이란 사람들을 윤상(사람으로서 떳떳한 윤리와 질서, 즉 도리)와 도학(자연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학문과 학식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즉 교육이란 사람들에게 사람의 떳떳한 도리(윤상)를 배우는 학문의 길을 열어주고, 동시에 우주 만물의 이치를 가르쳐서 넓게 지식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학문이 높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잘 알고 자연에 대한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총명하고 박식하다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에서 전공지식을 철저하게 배우고 독서를 통해 많은 세상의 지식을 쌓아 박식하다 하더라도, 학문이 낮아서 인격적으로 수양이 되지 못해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상대를 위해주고 길러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본인이 지도자로 행세하고 싶어도 주위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을 흔쾌히 지도자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단지 정자은행일 뿐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을 과연 천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단순한 재주꾼일 뿐이다. 우리 KAIST에서 그러한 재주꾼이 나올까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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