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 KAIST 자문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행정관

 영화 장르 가운데 공포영화의 역사는 대체로 영화의 역사와 비슷하다. 기술발달에 힘입어 서양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던 초창기부터 공포영화는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100년 가까운 공포영화의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공포의 주인공이나 내용, 수준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영화 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장르 중 하나다. 매년 국내에서도 수십편의 공포영화가 개봉된다.

  공포영화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기를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세계와 삶 그리고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 감정이다. 공포는 개인의 삶을 파괴하기도 하고 생동감 넘치게도 하는 인간 내면의 핵심적인 변인(變人)이며 같은 문화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의 집단적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스크린이기도 하다.

  예컨대 상처나 피해의식이 많은 개인이나 집단은 공포가 많을 수 밖에 없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은 물에 대한 공포가 있다. 2차대전에서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패전한 일본인들은 원폭에 대한 공포가 큰데 이 공포가 일본 공포영화에 그대로 녹아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공포영화는 공포의 주인공이나 내용, 수준이 매우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공포의 주인공이 귀신이든 사람이든, 서양귀신이든 동양귀신이든, 영화를 이끄는 주요 갈등인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관계에서 예외 없이 ‘불통’(不通)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불통, 즉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공포가 시작된다는 얘기다. 서양의 고전적 공포영화인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큐라’는 인간이나 신에게서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인간과 소통을 거부한 채 공격성을 드러낸다.

  미국 헐리우드의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류의 잔혹한 살인마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아예 소통 자체를 거부하고 전기톱이나 온갖 흉기류를 휘두른다. 전세계를 전율케 한 일본 공포영화 ‘링’과 ‘주온’ 등에 출연하는 긴머리 여자귀신들은 인간이 아무리 소통을 하려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받아주지 않는다.

  귀신이나 살인마가 인간과 소통하려 하는 때는 귀신이나 살인마가 최후의 순간을 맞는 때이며 공포와 갈등이 해소되는 국면이다. 공포영화의 ‘뻔한’ 결론 중 하나다.

  소통 부재에 의한 공포가 꼭 공포영화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과 불안, 공포의 원인은, 잘 살펴보면 바로 소통부재에서 출발한다. 부모와 대화하지 않는 자녀,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는 청소년, 직장에서 동료나 상사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회사원, 이혼으로 치닫는 부부 등이 갖고 있는 불안과 공포의 공통적 특징은 바로 소통부재다.

  개인의 일상 뿐 아니라 현실속의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정부들어 촛불시위가 크게 늘고 사이버 상에서도 정부에 대한 비판이 많아진 것은 정부와 국민간 소통부재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국민들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정권은 이를 들으려 하기 보다는 누르려 하니 불안과 공포는 자꾸만 커져간다.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맡고 있는 한국의 언론이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일부 언론은 국민의 여론을 있는 그대로 듣고 적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왜곡시켜 보도하는 바람에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불안과 공포가 더 커져가기도 한다. 최근 부쩍 한국 언론이 국민들에게 지탄받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소통이란 일방적 의사 전달이나 홍보가 아니다.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인정은 소통의 바탕이다. 그 위에서 제 생각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고 솔직하게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상대방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은 소통의 절반이다. 오해마저 받아들이는 적극적 포용의 자세가 있으면 소통은 완성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고 힘든 과정일 수 있어도 소통을 위해 참고 기다려야 한다. 소통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을 공포영화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팝콘과 콜라같은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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