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해가는데 시나 끄적이냐, 미친놈의 헛소리다.” 작품을 연재하면 독자들의 항의 편지가 빗발쳤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는데 대항해 싸우지 않을망정 글이나 쓴다고 쓴소리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뚜렷한 이념이나 목적 없이 좋은 작품이나 써 보자며 만들어진 모임의 이름은‘구인회’였다. 약 3년이라는 짧은 활동 후 사라졌지만, 이들은 순수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높은 예술성의 작품을 배출했다. 친목 도모를 위해 모인 아홉 명의 문인이 어떻게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글을 써 내려간 걸까.

 

구인회의 탄생

1925년 8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이하 카프)’이라는 이름의 사회주의 문학단체가 결성되었다. 김기진, 임화, 이상화, 박영희 등으로 구성된 카프는 뚜렷한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하 프로문학)을 지향하며, 정치성을 짙게 띠었다는 데에서 다른 문학 단체와 구별된다. 카프에게 문학은 독자적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 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1931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려던 의도를 들켜 카프 조직 맹원이 모두 검거되었다. 이를 계기로 카프가 점차 붕괴하며, 사람들은 사회의식을 배제한 문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1933년 봄, 소설가 이종명과 영화감독 겸 연극 연출가 김유영, 매일신보사 학예부 기자 조용만은 청진동의 한 술집에서 자주 만나 예술 모임의 창단을 의논했다. 조용만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카프에 대항하는 단체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카프와 반대로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특히 여러 집필자가 자유롭게 어느 신문에나 투고할 수 있도록 각 신문사의 학예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모임을 구성해 나갔다. 모임을 한 달에 한두 번 모여 작품 평이나 새로 읽은 책 이야기를 하는 친목 단체로 규정하자는 합의 하에, 9명의 문인이 구인회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구인회는 카프에 맞서자는 의견의 이종명, 김유영, 조용만 등과 카프의 비난을 무시하자는 의견의 정지용, 이태준, 김기림 등으로 나뉘어 발회식 때부터 분열을 겪었다. 이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입회했으며, 1935년 전후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김유정과 김환태가 입회해 9명의 회원 수를 유지했다.

 

문학 활동의 시작

구인회의 문학 활동은 모임의 활동과 문인 개인의 활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전자보다는 후자의 활동이 훨씬 두드러졌다는 평을 받는다. 이는 구인회가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외에도 여러 문학 잡지의 지면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또 조직 활동을 중요시한 카프와는 달리 개인의 문학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탁월한 문학적 감수성과 개성을 지닌 구인회 동인들이 수준 높은 작품들을 왕성하게 발표했다는 점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구인회의 첫 활동은 월평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제1회 월평회는 1933년 9월 15일 오후 6시에 열려 이무영의 희곡 <아버지와 아들>, 이태준의 소설 <아담의 후예>, 이종명의 소설 <순이와 나>, 김기림과 정지용의 시 등을 합평하는 자리가 되었다. 구인회가 제1회 월평회에서 시와 소설뿐 아니라 희곡 작품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은 단체 활동에서 다루는 장르를 시와 소설로 한정한 후기의 활동과 비교하면 예외적인 일로, 당시 구인회가 일정한 활동 방향을 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후 안정기를 찾은 구인회는 월평회에서 나아가 공개 문학 강연회를 갖는다.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다룬 강연회에서는 이광수, 김동인 등 선배 문인들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문학관을 확고히 다지다

구인회의 집단적 문학 활동은 1934년 1월 조선일보가 기획한 칼럼 <1934년 문학 건설 – 창작의 태도와 실제>를 통한 문학관의 표명에서 주목을 받았다. 칼럼 연재의 첫 주자를 맡은 이태준은 <작품과 생활이 경주 중>이라는 글을 통해 소설가로서 자신의 창작 태도를 반성했다. 이종명은 구인회를 결성한 주역답게 <문학 본래의 전통>이라는 글에서 문학이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유치진은 <철저한 현실 파악>을 통해 작가는 공허한 이론을 배격하고 실생활에 입각된 현실을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4년 문학 건설> 특집에 구인회 회원만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구인회 동인들의 글은 사회의식이 아닌 작품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구인회의 문학적 특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구인회의 의사 표명은 같은 해 6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이라는 기사에서 정점에 달했다. 필자가 모두 구인회 회원인 이 칼럼에서 동인들은 이광수, 현진건 등 선배 문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문인들을 향해 문학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했는데, 이는 다른 직업을 버리고 문학의 현장으로 돌아오라는 뜻을 지닌 동시에 신문 연재소설을 쓰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구인회 문인들은 신문 연재소설을 쓰는 것이 생계를 위해 저널리즘의 상업성과 야합하는 행위이므로 문학이 아니라 주장했다.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은 구인회가 생각하는 문학의 본질이 창작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작품의 완성에만 몰두하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제시했다.

구인회의 문학 활동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1936년 3월에 창간된 회원 작품집 <시와 소설>의 발간이다. 조용만의 구인회 회고담에 의하면 <시와 소설>의 창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이상이다. 김유영, 유치진, 김환태를 제외한 구인회 동인들은 모두 시인이나 소설가였으므로 작품집도 자연스럽게 시와 소설을 주로 싣게 되었다. <시와 소설>은 구인회가 대중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문학의 예술성에 대한 소신을 드러내는 장이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상은 차차 분량을 늘려가며 <시와 소설>을 계속해서 발간하고자 했으나, 다른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아 창간호만 나온 채로 폐간되었다.

 

이른 분열, 그리고 해체

구인회가 창단 이후 벌인 활동들은 구인회가 언어와 문학의 방향성을 두고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카프 문인들이 구인회의 활동을 끊임없이 논평했으며, 구인회가 그 논평에 예민하게 반응해 구인회와 카프는 충돌을 빚었다. 카프의 백철은 구인회를 ‘현실적으로 존재할 아무런 의의를 갖고 있지 못한, 의지와 방향을 잃고 있는 존재’라 비난했다. 또 문학이 저널리즘의 상업성에 복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구인회 동인들의 작품은 독자의 기호를 고려하지 않아 연재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이태준은 많은 논란을 빚었던 이상의 <오감도>와 박태원의 <청춘송> 연재 당시 조선중앙일보사의 학예부장이었는데,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사표를 품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결국 <청춘송> 연재가 중단된 1935년 5월경 퇴사했다. 이 두 장애물에 부딪힌 구인회는 활동이 활발했던 이상이 동경에 간 1936년 10월 이후 해체되었다. <조선신문학사조사>에 따르면 이무영이 구인회 동인 간 작품 경향의 불일치를 지적한 것이 구인회 분열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순수문학의 계승자

1930년대 한국문학은 다양한 사조가 탄생하고 사라지는 변화의 장이었다. 1925년부터 약 10년 남짓 한국 문단을 장악해 온 프로문학의 최고봉이었던 카프가 193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붕괴함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를 배제하는 대신 예술성을 추구하는 문학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특히 구인회가 결성된 1933년에는 프로문학이 와해해 기존에 문단을 지배했던 목적주의 문학을 대신할 새로운 문학 양식이 요구되었고, 구인회는 한국문학의 계승자로서 소신 있게 순수문학을 강조했다.

구인회의 중심인물로 끝까지 남았던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의 소설은 1930년대의 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한 위치를 점유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문학적 특징은 김동리, 최명익 등 1930년대 후반의 작가들에게 전해져 한국문학의 줄기를 형성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중점을 두었던 카프 단원들과 달리 구인회는‘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작품의 형식적인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은 문학이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 예술이라 믿었던 문학관에서 비롯되었다. 문학이 계몽이나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는 주장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구인회의 최대 업적은 문학의 본질을 되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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