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 쓰는 일을 참 좋아한다. 그것이 하루의 기록이든, 여러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공지이든, 연모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애틋한 편지든 그 종류와 내용에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으레 평범한 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는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수행평가나 과제 혹은 서술형 문항에 대한 답을 적는 일처럼 글을 수단으로써 다루었을 뿐 언제나 글 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열심히 크고 있던 고2의 봄, 글쓰기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는 작은 일 하나가 있었다. 국어 시간마다 짧은 글을 쓰는 활동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 이를 귀찮아했는데, 유독 나만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아마 갈증이 퍽 났었나 보다. 철저하게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과학은 정갈하고 맵시 있었지만 무언가 퍽퍽하고 삭막했다. 반면 정감 깊은 표현을 보고 쓰는 국어 시간은 어쩌면 그 시간 속의 작은 유희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내 문체는 상당히 독특했었다. (문체라고 하기엔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그런 글을 선생님은 좋아해 주시며 매시간 친구들에게 내 글의 일부를 소개해주시곤 하셨다. 칭찬을 듣는 일은 언제나 신이 난다. 결국 나는 성적에 지대한 부분을 미치는 물리 보고서를 쓰는 일보다 국어 시간에 주어진 짧은 글쓰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야 말았다. 글쓰기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글과 관련된 활동이 비단 국어 수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필사(筆寫)도 하고, 무형의 사색을 글로 옮겨보고, 지나가다 보이는 좋은 글귀들은 모조리 적었다. 그렇게 글쓰기는 새로운 취미이자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새로운 즐거움을 알려준 선생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진심이 담긴 편지를 친구들 몰래 적어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두고 왔던 귀여운 기억이 있다. 며칠 뒤 선생님은 내게 책 한 권과 간단한 메모를 남겨주셨다. 내 짧은 글이, 그 진심을 겨우 담아낸 맵시 없는 그 글이, 선생님에게 위로였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사정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힘든 기억 하나가 있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도 내 글은 그리로 흘러갔던 것이다. 감동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가볍고 귀여운 진심이 누구에게는 철렁이는 파도가 될 수도 있구나. 나는 그렇게 글의 힘까지 배워갔다.

나는 마음을 울리는 글귀를 마주하면 망설이지 않고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그걸 그대로 옮겨적고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며 두고두고 본다. 종강이 가까워질수록, 내 방 벽지는 온통 그런 메모로 가득 차서 세상에서 가장 문학적인 벽지가 완성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우물쭈물하다 이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마음이 충분히 자라 글의 의미와 그것이 가진 힘을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 그 수 많은 글 속에서 나만의 글을 찾고 싶어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찾은 글을 다양한 모습으로 적어가다 문득 어느 날, 누군가에게 전한 진심으로 한 명이라도 행복해진다면 내가 썼던 모든 글의 의미를 그곳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만약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오글거리거나 부끄러워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낯부끄러운 글을 기고하는 사람도 있으니 당장에라도 글을 적어보자. 분명히 누군가는 함께하고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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