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어떤가? 양측의 의견 차이를 상정하는 정치와 절대적인 무언가를 표방하는 올바름의 조합이 어색하기도 하고, 정치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단어쯤으로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 들어 이 개념을 두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고, 대부분의 논쟁은 대중에게도 익숙한 갈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이번 기사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의 정의를 역사적인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 변천을 살펴보며, 대중문화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소, 동지

(ⓒ이수연 기자)

정치적 올바름의 기원을 찾아 역사를 되짚어보면 1930년대에 도달하게 된다. 정확한 사실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시 레닌 좌파나 중국 마오 공산주의자들이 당의 노선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는 뜻으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는 곧 좌파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강경함을 아이러니하게 표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당시의 좌파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일삼는 동지에게 교조주의적인 당의 성격을 환기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 표현은 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소, 동지”

하지만 용어 자체가 아닌, 의미적으로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과 유사한 개념이 등장한 계기는 다르다. 지금 사용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은 되려 1789년의 프랑스 시민혁명과 제2차 인권운동인 68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민권을 주장한 시민혁명의 수혜는 오로지 서구 백인 남성 기독교인에게만 돌아갔다. 이러한 사회운동은 소수자들을 뒤로 남기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 나갔다. 사회운동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소수자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전 과정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으로 대두된 소수자 집단의 실업 문제는 수정자본주의나 사회보장제도의 확대 논의를 낳는다. 이렇게 남겨진 소수자에 주목한 진보주의자들은 다양성, 다문화주의 등의 개념을 사회적 정의와 연결 짓기 시작했다. 이에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 정의와의 연결을 거부하고, 주류집단의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 없는 소수자 집단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 비판한다. 이렇게 정치적 올바름을 사이에 둔 전장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전장은 저항운동과 그에 대한 반동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순환되었다. 상단의 도표의 윗부분은 피지배 집단이 평등의 삶을 확보해 가는 과정에 나타난 저항과 관련된 사건들이고, 아랫부분은 그 저항에 반동한 사건들을 나타낸다.

 

정치적 올바름, 문화의 영역으로

전근대 사회에서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 비슷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내 동네는 국가로 대체됐고, 같은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비슷한 믿음을 공유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들은 같은 국가에서 살고 있어도 그가 속한 집단에 따라 불평등을 겪고 있음을 인식한다. 공적으로 같은 국가와 법의 자장 아래에 있어도, 피부색, 성별 등의 사회, 문화 공간의 차이를 이유로 차별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소수자 집단은 법, 정치라는 추상적 공간에서 벗어나 사적인 공간에서의 실질적인 평등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소수자들의 인식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 조금 더 확대된 논의로 발전했다. 명목적인 자유와 평등의 원리보다 사회·문화 집단 간의 차별이나 편견 해소를 위한 실천적 담론에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 실천적 담론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충돌을 가져왔다. 공사의 구분이 흐려지며, 다문화주의자들은 공적 영역 개념이 소수자 집단의 사적 영역과 공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의 사적 영역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1980년대의 미국 대학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당시 많은 미국 대학은 스피치코드의 도입을 검토했고, 결국 대다수의 대학이 이를 제정했으며, 다른 기관으로도 확산되어 나갔다. 스피치코드는 인종, 종교, 성,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특정 학생을 낙인찍고, 희생하게 하는 혐오 발언이나 행위를 처벌하는 언어표현수칙이다. 지금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조리로 형성된 무언의 스피치코드를 어기면, 그 사람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알트만은 시민들의 조리와 무관하게 스피치코드가 가진 정치적 함의를 분석했다. 그는 괴롭힘 방지 규정과 스피치코드를 구분 지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규범적, 도덕적 개념과 잘 조응하지만, 스피치코드는 규범적 시각과는 반대되는 인종적, 성적, 동성애적 시각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피치코드는 ‘언어적 괴롭힘을 중립적 시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는 소수자나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가 잘못되었다는 시각 없이는 불가능한 전제이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중립적인 행위는 옳고 그름을 유보하는 것에 가깝다. ‘중립적인’ 당국은 스피치가 나쁘거나 미흡하다고 해서 스피치를 규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치코드는 그 정합성과는 관련 없이 정치성을 교묘하게 탑재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과 예술의 조우

예술은 사람이 사는 세상 바깥에서 홀로 고고히 숨을 쉬는 신선이 아니다. 예술이 사람이 가본 적 없는 무릉도원이나 지옥을 묘사하더라도, 근본적인 관심사는 결국 휴머니즘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다분히 불가분적이다. 하지만 로저 킴볼은 그의 저서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견해로 예술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미술비평은 예술을 비예술적 어젠다에 종속시키려는 결연한 노력이라면서, 예술을 본질적으로 비미학적이고 탈미학적인 소품 따위로 전락시켜버린다고 주장했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적 재생산에서의 발전이 예술의 대상과 그 독특한 ‘아우라’로부터 정치적 변화의 도구로서의 예술로 관심을 이전시켰다는 주장을 펼친 적 있다. 그에게 예술은 정치와 아주 밀접한 관련에 있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예술의 정치화는 곧 모든 문화적 실제 행위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형성되며, 어떤 문화적 실제 행위도 이론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의미로 발전한다. 

하지만 로저 킴볼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해체성을 언급하며, 벤야민의 시각을 미술사를 정치의 부속품 따위로 취급하는 주장이라 강하게 비판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언어가 자의적인 구성물이고, 실체화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주장들에 의존하는 붕 뜬 개념이라면, 예술을 접할 때 가질 수 있는 판단 기준은 자신의 정치성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 문화적 태도는 어떤지 정도밖에 남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사실이라는 인식론적인 기반을 포기하고, 정치적인 담론에만 의지하는 미술 비평은 곧 예술을 언어의 바다로 익사시켜 버린다. 예술과 문화 간의 활발한 교류는 되려 예술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특질과도 같다. 로저 킴볼이 경계한 것은 그 교류 자체가 아니라, 예술 비평이 정치적 장광설로밖에 남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로저 킴볼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써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좀 더 직접적으로 목도할 수 있는 것은 미술비평보다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대중 문화 조류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이 공개될 때마다, 정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디즈니는 흑인 배우를 인어공주 역으로 캐스팅하며 다문화주의에 대해 지지를 표현했다. 또한, 많은 독립영화는 최근 들어서 그동안 외면되어왔던 성소수자나, 여성 간의 연대를 스크린에 담아내고 있다. 대중 문화는 가장 빨리 보편적 다수의 공감대를 포착해 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이야말로 예술과 정치적 올바름의 조우를 가장 잘 방증한다. 혹자는 예술을 접할 때마저 정치적인 공론장으로 내몰린 듯한 피로감에 난색을 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혹자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치를 존중해, 인제야 막 시작된 이러한 대중문화의 변화에 반가움을 표할 수도 있다. 어느 편에 서든, PC한 예술 앞에 섰을 때, 그것이 담고 있는 이념과 그 정치성을 재고해본다면 좀 더 능동적인 대중문화의 소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여전히 두 가지 뜻으로 읽힌다. 어딘가 모순적이고 교조적인 단어 같기도 하고, 어딘가 당연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단어 같기도 하다. 그 어느 쪽으로 읽히든지 간에, 아니면 아직 입장을 못 정했든,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온 개념임은 확실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정의는 역사 속에서 계속 변해왔다. 오늘날의 건강하고 격렬한 논의를 통해 조금은 다른 뜻을 지닌 단어가 된다면, 그 방향이 어느 쪽일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미래에 이 단어가 가질 정치성과 예술의 조우는 또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게 될지에 대한 질문 또한 환기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정치적 올바름 논쟁과 시민성>, 이종일, 교육과학사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로저 킴볼, 베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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