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아무개 씨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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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아무개 씨를 위하여
  • 박재균 기자
  • 승인 2019.09.11 0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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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와 아무개로부터 선망을 받는 대상, 누구나 범상과 비범의 경계를 오며 가며 살아갑니다. 평범과 비범의 구분은 바로 범(凡)에 있습니다. 다수 속에 아무렇지 않게 섞이는 사람에게 평범이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하지만 평범은 평범으로부터 도망치려 애씁니다. 누군가 빅뱅의 <How Gee>가 가장 좋아하는 힙합곡이라 할 때, 그건 힙합이 아니라고 괜히 눈살 찌푸리거나, 누군가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색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괜히 아키 카우리스마키나 김기영 얘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조금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조금은 그런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프랑스의 사회학자는 이러한 평범의 자기혐오, 내지는 선 긋기가 취향을 계급화하면서 문화적 자본의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한 적 있습니다. 

평범은 왜 죄악시될까요? 평범은 비범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평범은 언제나 조금 더 높은 곳을 꿈꿉니다. 하지만, 선우정아의 노래 쌤쌤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내가 바란 그 미래는 누군가의 위층’일 뿐입니다. 한 평범한 아무개의 위층에 입주하게 되면 비범의 펜트하우스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꿈꿀 아무개의 위층은 남아있습니다.

비범한 펜트하우스에서 있었던 은밀한 부정과 도덕적 해이는 평범을 분개하게 합니다. 내심 바라던 자리였던 만큼 더더욱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말 기초적인 상식마저 그 자리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 허탈감과 실망 후에도, 평범이 딛고 있는 땅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열심히 자신이 살고 있던 층과 선을 그으며 한 층 한 층 열심히 올라온들, 정말 바라던 곳이 바라던 곳이 맞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비범의 부정이 평범의 동인을 와해시키는 이 비정한 건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도의적인 조리 따위가 아니라 건축 규정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생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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