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서운 것을 싫어한다. 선혈이 낭자한 모습에서 오는 끔찍함도 싫고 쫓고 쫓기는 관계에서 오는 조마조마함도 싫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생 때 제일 좋아했던 책은 <과학이 밝히는 범죄의 재구성> 시리즈였으며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범죄를 다룬 책과 스릴러 영화, 드라마를 섭렵했다. 무서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아가며 힘겹게 섭렵해냈다.

화나는 일이 많은 시기였다. 어린 시절의 분노는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럴 때 복수를 꿈꾸면 마음이 괜찮아지기도 했다. 그때 내가 상상한 복수는 나를 화나게 하는 대상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붙잡히지 않은 채, 죗값을 치르지 않고 살고 싶었다. 거기까지가 나의 복수였다. 나는 성공적인 복수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마주친 박찬욱 감독의 복수 삼부작은 복수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바꿔주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복수는 나의 것>은 너무 무서울 것 같아 보지 못했다.) <올드보이>의 우진과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는 모두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복수를 해냈다. 그러나 복수를 마치면 통쾌하고 편안해질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복수를 마친 후 그리 시원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큰 복수를 위해서는 큰 원한이 필요했고, 이미 큰 원한에게 잡아먹힌 후인 그들에게 복수의 성공 여부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것이 ‘복수를 하지 말자’일까? 그것은 알지 못한다. 아무튼 나는 복수를 멈출 수 없다. ‘복수했다’라고 느꼈을 때에야 비로소 분노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복수 삼부작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으니 나는 복수 전략을 바꾸었다. 완벽한 복수가 아닌 쉬운 복수를 하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최대한 빠르고 간단하게 해버리는 것이다. 복수 대상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완전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꼼꼼히 계획하고 오랫동안 준비하는 대신, 그냥 그 순간에 대충 처리하기로 했다. 큰 원한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함이다.

요즘에는 복수할 때 선택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억울하게 당했다고 느끼는 것과 자비를 베풀었다고 느끼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난폭운전으로 나의 안전을 위협한 운전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해당 자동차의 번호를 소리내어 세 번 외친다. 언젠가 번호를 기억했다가 더 크게 복수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저승사자가 된 마음으로 이 행동을 한다. 길거리에서 나를 쳐다보거나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을 보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적대적인 표정으로 그 사람을 째려본다. 물론 지금껏 실제로 암기하고 있는 자동차 번호는 하나도 없고, 째려본 눈길이 상대와 마주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복수를 했고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화나는 일이 뭐가 그렇게 많냐며, 그런 일까지 복수를 하고 싶냐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런 사소한 복수가 무슨 복수냐며 조소할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큰 일을 당했는가가 아니라 복수가 나의 마음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다. 복수하는 일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 되갚아주겠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마음이 때로는 삶의 동력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전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복수는 나의 힘’ 동호회 회원들에게 전한다. 복수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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