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가 시작되면 모든 그리운 것들이 별을 향해 떠나간다.

불어나는 찌꺼기를 내다 버릴 곳이 필요했다. 눅눅하게 상해버린 빵, 끊임없이 새로 짓고 무너뜨린 콘크리트, 물고기가 먹이인 줄 알고 대신 집어먹는다던 조그마한 플라스틱 조각, 아니면 누군가의 유해까지도. 입안으로 씹어 삼키기에는 너무나 단단했다. 마냥 덮어놓고 잊어버리기엔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매립지가 부족해진 이상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어디론가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인류는 내가 태어나기 몇십 년 전부터 우주로 쓰레기를 쏘아 보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항성에 파묻고 잊는다. 태양 대신 구태여 머나먼 별을 골라낸 이유는 녹은 플라스틱이나 대퇴골 조각이 도로 지구에 박힐까 걱정하는 심보 때문이었을까.

산 사람이 살기에도 미어터지는 지구에서 우주의 환경오염을 우려할 사람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각지에서 수거한 쓰레기를 모아다 우주에 수송하는 기사는 요즘 시대에 가장 넉넉한 월급을 받을 만한 직업이었다. 돈을 벌려면 우주선 운전이나 배워야지, 벨트에 몸이 단단히 묶인 채로 기판을 조종하기만 하면 돈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진다는데. 해야지, 해야지. 내가 눈을 감고 잠꼬대처럼 중얼거릴 때면 원리를 알 수 없는 폐회로 뒷면을 장난감처럼 만지작대던 현이 내 코를 지그시 눌러주며 웃곤 했다. 딩동. 곧이어 현의 눈꺼풀로 부스스한 앞머리가 간질거렸다. 나는 현의 불그스레한 목덜미와 뺨에 연거푸 입 맞추며 현의 장난에 응수했다. 택배 왔어요. 택배가, 좀 커요.

택배가 꽤 크긴 했다.

내가 맡은 매립지는 행성상성운으로 둘러싸인 백색왜성 H였다. 그래봤자 왜성은 거의 보이지도 않으니 경로를 설정할 땐 에메랄드빛의 가스 너울을 기준으로 삼아야 했다. 왜성의 이름이 H가 된 연유를 물으면 선배들은 귀찮은 듯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주었다. A, B, C, D, 그게 한참 지나 H라고 했다. 그럼 알파벳을 모두 쓴 후엔 어떤 이름을 붙이는 건가요. 대답은 다시 A, B, C, D, H, 누구도 매립지를 추억하지 않는다면 이름은 계속해서 돌고 돌 뿐이라고. 벌써 일 년 전에 마지막으로 피운 담배의 쌉싸름한 내음이 환각처럼 혀끝에 맴돌았다. 나는 성운으로 향하며 H에게 붙여줄 또 다른 이름을 생각했지만 언제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배송지는 매립지, 나풀나풀한 성운의 지느러미 한가운데 자리한 백색왜성 H.

사실 내게는 H의 이름보다도 중요한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그건 지구에 두고 온 동생과 현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태와 현은 어쩐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나이 터울이 칠 년은 족히 넘으면서도 서로 이상하게 천진난만하거나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든가, 허구한 날 내 일을 도와주겠다고 성화를 부려놓고 정작 정리한 것 하나 없이 어디론가 도망쳐버린다든가 하는 일들이 그러했다. 아이가 아이답게 구는 일과 달리 현의 철부지 노릇은 가끔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현의 자유로움을 못내 질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경했던 것 같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지금 지구의 계절이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한 해 전에 이사를 도와준 성태가 어느덧 장성해있었으니 걱정은 덜었지만 그런 동생이 아직까지도 현의 의미 없는 장난에 어울려줄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성태가 직장을 구하겠다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현은 어린 성태에게 꾸준히 종이비행기를 접어주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성태도 성년이 되기 무섭게 비행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언뜻 지나가며 들은 기억이 난다.

어쨌든 우주선을 몰 줄만 알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우주로 떠나는 누군가를 통하지 않고는 이곳에서 하루도 버틸 수가 없었다. 전쟁의 폭음은 없었지만 대신 지구에는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커다란 파도가 쳤다. 그렇게 파랑이 세상을 쓸어간 다음엔 꼭 이빨 사이로 찌꺼기를 청소하듯 잔해와 쓰레기가 계단을 따라 서서히 차올랐다. 그것들은 커다란 선박을 이용해 빠르게 건져지고는 곧 봉인되어 우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마음에 넘치게 슬퍼하지 않기 위해 빠르게 쓰레기를 치워버린다.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 별에 묻히고 나면 사람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본래의 궤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때때로 마지막 문명이 꼭꼭 감춰둔 허물이 궁금했다. 버려진 물건들을 솜씨 좋게 재활용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폐기 전 상자를 열어보는 것이 내 고질적인 버릇이었다. 저지대부터 차오른 바닷물에는 싸구려 비닐 포장지는 물론 염분에 잔뜩 부식된 선박 조각 따위도 섞여 있었다. 한번 그물을 펼치거나 작정하고 훌치기를 하면 표면을 떠다니는 잔해부터 심해에 가라앉아 있던 침전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이 딸려 올라온다고 했다. 재난이 시작되고 한동안 사람들의 변고가 끊이지 않을 때는 쓰레기의 대부분이 사람이었다는 선배들의 푸념도 문득 떠올랐다. 그러나 작금의 지구는 사람을 잃기엔 너무나 성숙하고 외로운 장소였다.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언젠가 잃어버린 세계의 기억을 음미했다. 비닐, 펄프, 거대한 그물, 플라스틱으로 만든 깃털, 바닷물에 푹 젖어 몇 달은 표류한 듯한 파라솔, 맨 아래에는 비행선을 쏘아 올릴 때 분리된 로켓의 잔해가 온전히 남아있었다. 고향에서는 여전히 만들고, 조업을 하고, 놓치는 것이 두려워 진짜 새 대신 싸구려 깃털을 찾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붙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모두 파도에 쓸려 바닷속으로 버려지는 것이다.

그러니 내게 이 시대의 사랑이란 파도가 치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었다.

현은 고소공포증을 심하게 앓았다. 현이 만으로 세 살이던 해, 현의 어머니가 한눈을 판 사이 현이 피아노 의자에서 떨어져 귀가 크게 찢어진 사건이 아마도 화근이었을 것이다. 가족들로부터 독립해 살기 시작한 것도 고소공포증 때문이라고 했다. 파도를 피해 고지대의 신도시로 이사하는 일이 영 내키지 않아 따로 집을 구했다는 것이 현의 설명이었다. 종일 해일주의보 사이렌이 울려대도 난 여기가 좋아. 뭐라고? 현을 처음 맞닥뜨린 스물두 살의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현의 감상에 저도 모르게 입안의 살을 씹으며 우물거렸다. 내 손에는 소금기에 푹 절은 성태의 운동화 두 짝이 각각 들려있었다. 현은 맨발로 파도를 맞으며 다시 한번 내게 대꾸했다. 나는 바다가 좋아.

너 근데, 이름이 뭐야?

그것은 현이 저지대로 온 지 사흘째의 대화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현을 아주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바다가 좋다니, 어린 성태를 두고 재난에 휘말려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이 아직도 가슴에 선뜩하게 남은 채였다. 우리 형제의 신발은 그날 이후로 하루도 제대로 마른 적이 없었다. 재난이 얼추 마무리된 뒤 고지대의 사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몰라도 저지대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늘상 같았다.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졌고, 해안가의 여름은 언제나 습하고 지저분했다. 그것은 결코 깨지지 않는 불변의 자연법칙이었다.

“누나, 비행기 접어줘.”

그래서 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현과 함께 앉아있는 성태의 꼴이 괜히 미웠다. 손마디며 팔꿈치가 매끈하게 윤이 나는 여자애와 아직 한참 어린 동생이 세상 물정 모르고 노는 모습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스포츠 가방을 툭 내려놓고 시큼한 소금 냄새가 나는 슬리퍼를 구석에 벗어두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성태가 엄지만 한 사탕을 내밀었다. 현은 성태가 나눠준 싸구려 사탕을 오독오독 깨물며 규격도 맞지 않는 파지들을 반으로 접고 있었다.

“윗집 누나는 왜 자꾸 데려와?”

“누나가 먼저 심심하다고 놀러 왔는데.”

“오지 마, 애 혼자 있는데.”

“혼자 있으니까 와야지. 너 바보야?”

현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나는 펭, 코웃음을 치며 사탕을 입으로 굴렸다. 이 되바라진 고지대 출신 여자애와 나이를 갖고 서열 정리를 해봤자 하등 쓸 데가 없었다. 대신 나는 괜히 겉옷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체를 하다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소리 내서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옛다. 비행기를 접다 말고 어리둥절한 현의 얼굴이 꽤나 봐줄 만했다.

“보모 노릇 해준 값.”

“너 이거 오늘 일당 거의 전부 아냐?”

“맞으면 어쩔래? 앞으로는 오지 말라는 이야기지.”

어느덧 조용해진 성태의 숨소리가 심기에 거슬렸다. 나는 현의 시선이 끈질기게 내 뒤통수에 따라붙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리서 일어나 말려둔 수건 한 장을 어깨에 얹었다. 오늘따라 방에서 나는 습기 어린 곰팡내가 더욱 부끄러웠다. 얼굴 조금 예쁘다고 눈치도, 염치도 없고. 볼멘소리를 웅얼거리며 수건으로 목덜미와 팔꿈치를 훔치면 찐득거리는 소금기가 겨우 가시는 듯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저 애는 내 몸에 찌든 축축한 파도의 냄새를 모조리 맡겠지. 아, 오늘도 신발이나 말려야겠다. 아까운 돈도 집어다 말리고, 이제 저 애가 돈을 다 팽개치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자 문득 동생에게도 한번 체면을 세우는 게 좋겠다는 어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길로 턱을 치켜들고 현과 성태를 훑어보며 당당한 척 연기를 했다. 시선을 따라 잔뜩 위축된 성태의 눈망울이 보였고, 그 후엔 새하얀 포말이 보였다. 현의 두 눈 가득히.

―잠깐만, 잠깐만. 젓가락으로 밥 한술을 떠먹으려던 찰나, 현의 다급한 끼어들기에 현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왜?

“너 그러고 왜 다음날 나한테 사과했어?”

“…… 너네 집 잘 산대서.”

대답을 듣기 무섭게 현이 상 아래로 내 다리를 세게 걷어찼다. 나는 정강이를 문지르면서도 익숙한 듯 소시지를 집어 현의 밥숟가락 위에 얹어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순식간에 꿀떡 밥을 삼키는 모습이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눈치를 한번 살핀 다음 현의 오른뺨을 검지로 톡 건드려보았다. 현은 여전히 뾰로통하게 눈을 치뜨고 있었다.

“정말이야?”

“농담이지. 너나 나나 오갈 데 없는 처지라 마음 쓰여서 그랬다, 왜.”

“난 네 말 전부 믿어. 네 말이 세상에서 제일 무겁단 말이야.”

“알았다니까. 얼른 먹어. 우리 등산 가기로 했잖아.”

고소공포증의 극복 및 가족 상봉. 주말마다 현을 데리고 산을 오르는 내가 내건 슬로건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봤자 해안 방향으로 절벽이 난 중턱쯤에 오른 후부터는 내가 직접 현을 업고 올라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겨우 구조된 것처럼 땀을 한 바가지로 흘렸지만 현은 꺾인 나뭇가지에 살짝 긁힌 손등을 호호 불며 엄살이나 부리기 바빴다. 지쳐 나자빠진 나에게 꼭 산에 가야 하느냐고 따져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등산을 가기 전날부터 현의 기분을 달래느라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금요일마다 현이 좋아하는 반찬거리를 사다 채워놓고, 상처가 따끔하네, 이러다 흉이 지네 투덜거릴 현을 위해 상비약 상자를 꼼꼼히 점검해야 했다. 가끔은 왜 이런 수고까지 들여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현에게 너무 모질게 굴어서? 현이 아니면 하나뿐인 성태를 챙겨줄 사람이 없어서? 무슨 핑계든 아무렴 좋았지만, 등산 일로 현과 며칠간 냉전을 벌인 뒤 내가 가까스로 내린 결론은 우리 모두 현의 비위를 맞추는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이었을까, 성태가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쩍 방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물이 찰박거리는 구도심으로부터 불과 몇 계단 높은 집에서 성태와 현을 모두 데리고 지낼 수는 없었다. 장맛비에 푹 젖은 고지서 봉투를 뜯어내고 있으면 어디서 누렇게 슬어버린 벽지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주부터 사나흘에 한 번씩 산에 오르며 먼 곳의 고지대를 염탐했다. 주말에는 현을 안고 더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갔다. 현은 빈혈 증세처럼 커다란 두 눈을 연신 감았다 뜨며 내 목을 껴안은 팔의 힘을 풀지 않았다. 나는 현이 다치지 않게 둥그렇게 구를 자신이 없어서 눈앞이 번쩍거려도 묵묵히 산등성이를 걸어갔다.

“가끔 말야. 버리면 안 될 물건이 섞이기도 하지.”

나는 곧이어 신도시의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 수험 준비에 돌입했다. 그때부터 현은 익숙지 않은 직무를 준비하느라 자신에게 신경을 쏟지 못하는 나를 매일 귀찮게 굴었다. 밤새 꼬박 채워 쓴 노트를 숨겨두거나 퀴즈를 내겠다는 명목으로 몇 시간씩 옆에서 말을 걸곤 했다. 이날도 현은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책을 편 내게 연신 무어라 종알대는 중이었다. 폐기물 처리용 우주왕복선의 운행 순서 첫째, 바코드를 이용해 수하물의 폐기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현은 언젠가 내가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쳐둔 부분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물었다. 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현이 곧바로 반문했다. 우주왕복선의 비행이 여태껏 우리와 무관한 주제였던 탓에 현이 던지는 질문들은 죄다 괜히 말꼬투리를 잡는 식이었다. 버려야 하는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은 어떻게 구분하는데?

나는 바다를 떠도는 모든 존재에게서 나는 냄새를 잘 알았다. 소금기에 부식되고 깎이며 다친 이들의 텁텁한 비린내는 바다에 하루 이틀 표류한다고 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 애지중지해가며 아끼는 것, 운 나쁘게 잠시 잃어버린 물건에게서는 그런 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애초에 빠트리지 말았어야지. 내가 미처 쓸려나가지 않았던 엄마의 손을 더욱 단단히 붙잡지 못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허술하고 바보같이 굴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와 동시에 버려지는 삶 또한 견뎌내고 있다. 내게는 언제나 바닥을 알 수 없는 파도의 물비린내가 났다. 그것은 거꾸로 말해 내가 엄마의 손을 붙잡지 못해서가 아니라 엄마가 내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 피부를 꿰어 닻을 달아두었고, 나는 바다에 반쯤 잠겨 우리를 찾아오는 모든 슬픔의 방파제로 살아가야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냄새를 옮기고 싶지 않아서 거품이 나오는 목구멍을 덮어 가렸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날숨. 토해내면 또다시 바다, 바다.

현은 나의 대답이 어느덧 성태와 부모님에게 옮겨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더 말을 않았다. 대신 내 목에 매달리고는 그다지 무겁지 않은 무게를 실어 어리광을 부리기만 했다. 현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훨씬 가벼웠고, 나는 그런 현의 태도가 고까운 한편 사랑스러웠다. 택배요, 기사님. 현아, 나 목 뽑혀. 우리는 서로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에는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내 호흡이 잠잠해질 때쯤 현이 한숨처럼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있잖아요, 택배가 너무 커요. 어깻죽지가 다 눌릴 만큼…….

쓰레기더미 사이에 파묻힌 현의 얼굴을 내려다본 순간 든 생각은 그때의 대화뿐이었다. 나는 잠시간 몸이 굳은 듯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부식된 쇳덩이며 그물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선실에 떠오르기 시작한 쓰레기를 정리할 겨를조차 없었다. 무엇에 베였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손등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스로 모든 쓰레기를 끄집어내고 현을 껴안았을 때 현의 살점에서 맡은 처량한 비린내는 내가 그토록 미워해 마지않던 파도의 냄새였다. 이제 그곳에는 파도가 칠 리가 없는데도.

나는 현이 바다에 빠져 죽게 된 경위를 상상했다. 예컨대 지구에 어떤 변고가 닥쳐서 십 년 전과 비슷한 규모의 해일이 잇달아 밀려왔다고 해보자. 우리가 늘 오르던 저지대 산의 중턱과 엇비슷한 높이까지 파도가 몰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았을까. 백번 양보해 지구는 오늘도 멀쩡하고 너는 그저 모처럼 구도심을 보러 떠났다가 운 나쁜 사고를 당한 것뿐이라고 치자. 머릿속에 얼굴조차 모르는 현의 가족들과 훌쩍 키가 큰 성태가 차례로 떠올랐다. 탓할 상대가 더 이상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나는 현의 일생이 거쳐온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어 조각해본다. 추궁하고 취조한다. 누가 현의 재해를 책임져야 했나.

“누나 말이야. 여기선 자는 동안 서른일곱 번은 족히 깰걸.”

“누가 서른일곱 번이래?”

“글쎄, 자기 생각에 그렇대.”

“자기 생각이긴. 그거 무슨 영화에 나오는 대사야.”

신도시에 이삿짐을 풀던 날, 성태는 내게 쪼르르 달려와 무슨 말을 전하더니 테이프 커터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창틀에 앉아 몸을 까딱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나는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땀을 티셔츠로 대충 문질러 닦은 다음 창문을 옆으로 밀어 활짝 열었다. 방충망 사이로 바싹 마른 나뭇잎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잠시 쉴 요량으로 가득 쌓인 상자 옆에 풀썩 주저앉자 성태가 나를 내려다보며 대뜸 말했다.

“아까 누나가 산에 가재.”

“갑자기?”

하지만 이사 명목으로 길게 당겨쓴 휴가는 한 주가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출근 준비에 쏟을 이틀을 빼면 오늘이 이삿짐을 치울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성태가 무거운 짐을 나르다간 허리를 다칠 수 있으니 모든 짐은 내가 옮기는 게 나았다. 그 대신 시간이 꽤 촉박해진 탓에 자잘한 여가나 산책에 시간을 쏟을 여유는 일절 없었다. 더욱이 현이 말한 산은 내가 비행사 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현을 데리고 올라갔던 그 뒷산일 텐데, 그곳으로 돌아가려면 물에 잠긴 지대를 피해 산을 쭉 돌아가야 해서 오가는 데에 드는 품이 상당할 터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떠나기 전에 아직도 바깥 풍경을 무서워하는 현을 위해 창틀을 따라 불투명한 시트지를 발라둬야 했다.

“다음에 네가 누나 따라서 가 줘.”

“그러니까, 형 바쁘대도 계속 고집이고.”

“그 중간에 바다로 절벽이 난 곳 알지. 거기서부터는 네가 누나 업고 가야 돼. 안 그러면 울고불고 난리다.”

꼬리를 물던 생각이 어느 대화에 멎자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다. 내가 비행을 떠난 뒤로 정말 성태는 현을 업고 산에 갔을까?

설령 성태가 내 당부대로 현과 함께 등산에 나섰다 하더라도 현이 절벽에서 지레 겁을 먹고 목을 붙든 채 이리저리 허우적거렸다면 두 사람 모두가 화를 입었을지 모른다. 그런 일을 피하려면 현의 주의를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성태는 현을 업고 내려오는 내내 현이 웃을 수 있도록 현의 가족사와 우리네 인생을 놓고 소모적이고 장난스러운 논쟁을 이어가야 했다. 등산을 다녀온 후엔 현을 어르고 달래 좋아하는 반찬을 입안에 가득 찰 때까지 먹여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손가락이 긁히기라도 하면 입김을 호호 불고 연고며 반창고를 가득 발라줘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허둥지둥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벌새처럼 뛰던 현의 심장이 가까스로 진정하더라는 이야기도, 성태는 물론 나조차 몰랐을 것이다.

나는 재난의 책임을 묻지 않으면 이 순간을 견딜 수가 없다. 현아, 누가 널 잃어버렸을까. 누가 네 손을 움켜잡지 못했어. 나는 어떻게든 손등 가득한 상처와 현의 부러진 목을 내려다보며 누군가의 실수로 절벽에서 미끄러진 현의 죽음을 상상했지만, 상상을 거듭하면 할수록 현이 작별을 결심한 순간 마지막 시야에 담긴 모습은 창에 시트지를 바르던 나의 뒷모습일 것만 같았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어떤 역사를 읽으려 한대도 내게는 현의 사인을 밝힐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영영 잃어버린 세계가, 현과 내가 창조하고 앞다투어 허물어버린 순간의 찬란함이 때때로 궁금했다. 그 책장을 파지로 뜯어 비행기를 만든 다음 내 입에 한가득 구겨 넣고 싶을 만큼….

내가 좀 더 어리고 상냥했더라면, 곰보가 된 마음을 떠안고 한달음에 매립지로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마침내 현과 함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구도심을 내달렸더라면 어땠을까. 너 근데, 이름이 뭐야? 나는 바다를 디디고 선 현이 나를 돌아보며 웃던 그 순간의 울렁거림을 머금고 공중에 떠오르는 쓰레기를 하나둘 모은다. 내 이름, 성운. 목이 메어 너를 결국 삼키지는 못할 거야. 그래서 나는 너를 혀 아래 영원히 파묻을 거야. 너의 사인은 마침내 익사가 아니게 될 거야.

나는 현이 내 몸을 꼭꼭 씹은 다음 또 다른 현을 뱉는 우스운 상상을 했다. 그 잔해에서 다시 자라난 현은 나를 닮아 고소공포증을 극복했을 것이다. 홀로 산과 들을 뛰어다니다 누군가에게 달려가 안기는 현을, 우습게도 처음부터 다시 사랑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배송지는 매립지, 바다에 잠겨 끝없이 파랑을 헤치는 성운의 한가운데 자리한 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이 서툰 사랑을 항성에 파묻고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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