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 기계공학전공 김동원 동문

<편집자 주>  고 류근철 박사가 생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김동원 동문은 뇌병변 2급 장애가 있다. 우리 학교 기계공학전공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미국 미시간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관련기사 본지 337호 "저와 같은 분들에게 빛이 되고 싶어요") 미국에서 고 류근철 박사를 기리는 편지를 카이스트신문에 보내왔다.

작년 이맘때, 겨울의 기운이 여전히 맴도는 어느 아침, 기숙사를 나서서 학생식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떤 노년의 신사분이 나를 불러 자기의 차에 타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신사분은 학교에 578억을 기부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자신이 가꾼 조각공원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항상 붙어 다니는 연구실 동기와 함께 내게 밥을 사주셨다. 학교 일에 관심이 없었던 난 그때까지만 해도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와 다이아몬드 안경테의 그분을 그저 돈을 많이 번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그분은 내게 연락을 주셨고 식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이 리서치하는 기분으로…’ 자신의 클리닉에 한번 오라고 하셨다. 그분이 날 기다리시는 걸 알면서도 여러 날이 지나서야 찾아갔다. 그 후 난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류근철 박사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던 그분을 그렇게 만나게 되었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난 박사님과 여러 번 식사를 같이 했는데, 매번 박사님이 식사비를 계산하셔서 한번은 박사님께 사드리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박사님은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들려주셨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독립운동을 하셔서 일본 순사들에게 쫓김과 고문을 당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셨지만, 그런 와중에도 공부를 향한 열정으로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일본에 갔던, 그리고 대학생 때까지 물로 배를 채워가며 고학했던 시절들에 대해 들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남을 돕던 어머니를 회상하며 온정의 마음을 갖게 된 이유를 들려주셨다.

박사님의 따뜻한 마음을 난 그분을 뵐 때마다 볼 수가 있었다. 박사님의 따뜻한 마음. 난 그분을 뵐 때마다 볼 수 있었다. 난 박사님을 뵙기 전에 학부식당에서 밥 쟁반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어볼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다. 박사님은 자기 일처럼 내가 쟁반을 들게 하려고 하셨다. 직접 식당에서 식판 두 개를 얻으셔서 그분의 클리닉과 내 연구실에서 연습을 시키셨다. 또 나의 구부러진 오른 손목을 펴지도록 하시려고 지지대를 얻으시곤 자신이 갖고 계신 도구로 손수 다듬으셨다. 내 몸을 조금이라도 좋게 하려고 의학서적들을 한 번 더 보셨고 높은 연세에 가쁜 숨을 쉬어가며 나를 치료하곤 하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좋아질 때면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셨다.

근 6개월 동안 박사님 클리닉에 다녔던 나날들, 난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다. 나에 대한 대가 없는 사랑뿐 아니라 그분의 어려운 사람들을 향한 마음, 지닌 생각, 지난 행적을 직접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뿐만 아니라 그 클리닉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시골에서 혹은 외국에서 온 모든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을 비롯해 온 힘을 다해 응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답례할 때면 한사코 거절하셨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박사님을 뵈는 동안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만, 박사님은 내가 품은 꿈, 의지를 아셨다. 박사님의 차를 타고 동문회관을 지나칠 때면 네가 여기서 무엇 무엇을 하면 좋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자신의 쓰라린 경험들마저 내게 말씀해 주셨고 나도 미처 생각지도 않은, 많은 사람을 소개해 주셨다. 더욱이 놀라게 했던 것은 역시 내가 생각지도 않은 것들을 나를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한국을 떠나오기 직전 그날이 기억난다. 박사님께선 조용히 집무실로 날 부르셔서 그분이 생각하신 것들을 말씀해주셨다. 그렇게 한다면 너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네가 미국에 있는 동안, 혹은 학위를 마치고 같이 궁리하고 실행해보도록 하자며……. 그리고 내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자신이 개발한 기계의 설계도도 내놓겠다는 말씀도 기억난다.

내게는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갔다. 그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았고 심하게 말하면 나이가 많더라도 혼내고 싶은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존경했다가도 그 사람들의 이면을 알게 되어 실망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때문인지 다들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한테도 난 반문을 품었고 쉽게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았다. 지금 난 사람들한테 류근철 박사님이 가장 존경하고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라 말한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분 곁에서 있는 동안 내 마음에 절로 존경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에게 많은 것들을 해주셔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박사님을 처음 찾아온 어떤 한 분이 “박사님이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 들었다”라고 말했다. 즉, 박사님께선 모든 이들을 위하셨다. 그래서 더욱더 존경하게 된 것이다.

바쁨과 나태함이 밀려들었던 어느 날 새벽, 누군가에게서 박사님이 임종을 앞두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임종하셨다는 것을 들었다. 멍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박사님이 어떤 분이신데, 꼭 일어나실 것’이란 미련한 바람뿐, 내가 그동안 박사님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분의 곁에서 가족처럼 챙겨줄 사람이 있게 해 달라는 기도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원대한 꿈을 꾸고 계셨고 실행하시던 분이었는데, 그 꿈을 지켜 드리지 못 했다. 어쩌면 막을 수 있었던 죽음, 바쁘단 핑계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 가슴을 파고든다. 저미게 한다.

“어이 김 박사, 미국 가면 최고급 차를 타는 기사가 자네를 모셨다고 친구들한테 말해.”, “김 사가 박사 따고 성공하면 날 경비로 써줄 지 모르겠네” 박사님의 위트 넘치는 말씀들이 떠오른다. 박사님과 돌 조각 공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들, 박사님 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닌 기억들이 스쳐 간다. 이른 아침 책 또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또 다른 꿈을 꾸고 계셨던 박사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보다 한창 어린 분들에게도 존대해가며 자기 뜻을 설파하시던 박사님이셨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얼마 전이었다. 부모님께서 박사님께 은혜에 대한 소정의 답례를 하셨다. 박사님은 그 답례를 들고 나를 학교 본관으로 데려가셨다. 그러시곤 임직원분들께 외치셨다. “이 학생이 학교에 기부한답니다” 신이 나서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셨다. 나는 “박사님께 드린 것인데… 박사님께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사님께선 “무슨 소리, 내가 한 것이 뭐 있다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날, “김 박사, 미국 가서도 우린 편지로 계속 리서치같이 하는 거야, 내년에 봐” 그러시곤 내 곁을 떠나셨다. 큰절할 시간을 주시지 않으셨다. 올해 초, 전화를 드렸다.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내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 되었다.

위대한 분을 알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나에겐 큰 에너지였다. 그 위대한 분을 다시 뵙고 그분의 모습과 그분의 말씀, 그분의 또 다른 꿈을 보려 이번 여름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가 없다. 더는 그분을 뵐 수가 없다. 슬프다. 그분과 함께한 시간이 단 6개월로 끝난 것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제 그분과 함께했던 6개월이 내 인생을 어디로 이끌고, 또 내가 어떻게 해야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다. 하늘이 그분을 만나게 해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며 되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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