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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혼란 딛고 과학한국의 중심으로
[346호] 2011년 03월 12일 (토) 김선린 기자 kimsr0511@kaist.ac.kr

<편집자 주>
1973년 92명의 석사과정 학생만으로 시작한 한국과학원은 1970년대 말까지 1000여 명의 학생을 교육시키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이공계 대학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설립 초기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선진 교육연구기관을 우리나라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정치적 격동기와 맞물려 한국과학원도 큰 변화를 맞고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원, 즉 KAIST로 거듭나게 된다. 이번 연재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논란과 어려움이 많았던 80년대 우리 학교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전국적인 통합 열풍, 한국과학원도 예외 아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계엄 확대로 정권을 잡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시도했다. 이때 과학기술 개혁의 하나로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하나둘씩 통합되기 시작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은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자원개발연구소와 종합에너지연구소는 한국동력자원연구소로, 한국선박연구소와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한국기계연구소로 통합되었고, 이외에도 많은 연구기관들이 통합되거나 사라졌다. 이런 가운데 1966년 설립되어 타 연구기관의 모델이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이하 KIST)와 한국과학원과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홍릉의 한국과학원과 이웃하고 있던 KIST는 한국과학원이 설립되기 전부터 우리나라 유일의 응용연구기관이었는데, 설립 초기부터 재미 과학자들을 초빙해 연구원을 충원해왔다. KIST는 과학기술인력의 부족을 체감하고 KIST 부설 이공계 대학원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1969년 경제과학심의회에서 부결, 계획이 무산되었다가 한국과학원이 설립되면서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80년대에 들어서 ‘통합 바람’이 불면서 K IST와 한국과학원이 통합의 대상이 되었다.
 

정치적 이유로 KIST와 통합

하지만,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KIST와 한국과학원의 통합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었다. 먼저 두 기관은 통합의 대상이 될 만큼 문제가 많지 않았다. 한국과학원은 한국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우수한 응용과학기술인재를 성공적으로 길러 내고 있었고, KIST도 정부출연 연구기관 중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KIST의 문제로 통합이 결정되었더라도, 그 대상은 한국과학원이 아닌 연구소가 되어야 했다는 의견도 팽배했다. 교육을 주요 목표로 하는 한국과학원보다는 당시 통합에서 제외된 한국표준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 여타 정부출연 연구기관과의 통합이 보다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등장한 정부가 부자연스러운 통합을 추진한 이유에 대해 <한국과학기술원 사반세기>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사회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KIST와 한국과학원이라는 두 기관을 통합함으로써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통합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밀접해 있다는 것도 두 기관을 통합하는 데 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KIST를 근처에 위치한 한국과학원과 통합함으로써 과학기술처가 지향했던 효율성을 얻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또한, 70년대 말까지 과학기술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군 인맥, 특히 육군사관학교 출신 인맥이 두 기관의 통합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도 있다. 결론적으로 KIST와 한국과학원의 통합은 정치적 이유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 한국과학기술대학 개교기념식 거행 / 홍보팀 제공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한국과학기술원

논란 속에 통합된 KIST와 한국과학원은 1981년 1월 5일 한국과학기술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이하 KAIST)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범했다. 이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KAIST’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합된 KAIST는 초대 이주천 원장 아래 구 과학원에 해당하는 학사부 담당 부원장과 구 KIST에 해당하는 연구부 담당 부원장을 두는 이원적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는 통합의 정신을 살리지 못하고 두 기관을  물리적으로 합쳐놓은 것에 불과해 내부의 불만만 늘리게 되었다.


KAIST 학부생, 1986년부터 입학 시작

새로운 KAIST가 출범하던 80년대 초, 한국산업기술대학이라는 또 하나의 기관이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동부가 추진한 한국산업기술대학 설립안은 최신 첨단기술분야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검토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되었다. 이는 공업고등학교 출신인 전 대통령이 기능공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전임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과학원을 설립했던 것처럼 자신도 과학기술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자가 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KAIST에서도 기존의 석, 박사과정 외에 학부과정을 설립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과학영재교육과정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고급인력을 더욱 수월하게 공급받고, 속진 교육을 강화해 20대 박사를 배출하기 위해서였다. 문교부의 추진으로 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해 1983년 경기과학고등학교, 1984년 경남, 대전, 광주과학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이렇게 과학고등학교와 이어지는 조기졸업 연계과정과 무학년제도를 통해 석사과정 진학을 앞당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한창 통합 열풍이 거세던 당시에, 한국산업기술대학안과 KAIST에서 제시한 과학영재교육과정안은 제5공화국 정부에게 중복투자로 비춰졌다. 따라서 이 두 계획은 ‘한국과학기술대학(이하 과기대)안’으로 통합조정되어 1984년 3월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두 계획이 통합되기 전 먼저 계획된 한국산업기술대학은 벌써 공사가 시작되어 있었기에 과기대 설립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과기대도 KAIST에 통합되었고, 1984년 12월에는 과기대 설치를 위해 한국과학기술원법이 개정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대통령령으로 과학기술대학의 조직과 학사 운영에 관한 규정이 발표되었고, 10월에 첫 신입생을 선발했다. 그리고 1986년 3월 3일 과기대의 역사적인 첫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KAIST라는 간판 아래 구 한국과학원와 구 KIST, 신설된 과기대가 공존하는 ‘한지붕 세가족’시대가 시작되었다.

   
▲ 한국과학기술원 건설 기공식 / 홍보팀 제공

끊임없는 반발에 KIST 다시 분리독립

한편, 졸속으로 통합된 KIST(연구부)와 한국과학원(학사부) 세력 사이의 골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한국과학기술원 사반세기>에 따르면 당시 항간에서는 이 두 세력을 ‘물과 기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1986년 부임한 이정오 원장은 임관 전 원장이 시행한 조직 개편을 포기하고 원래의 이원 체제로 환원시키며, 뿌리와 기능이 서로 다른 두 부처 사이의 완전한 결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특히, 연구부의 불만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 여러 경로를 통해 학사부와의 완전한 분리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1986년부터 꾸준히 계속되어 마침내 1988년 초 노태우 당시 대통령 당선인에게 연구부 소속 책임연구원들의 서명이 담긴 진정서가 전달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연구부가 내세운 분리독립의 필요성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통합 당시에 비해 한국 과학기술계가 현격한 변화와 발전을 이룩해 연구부가 독립적으로 기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연구부가 독립하면 수많은 산업체가 밀집해 있는 경인지역의 중추적인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산업체와의 협동연구를 더 심도 있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지난 7년간의 동반관계를 청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1988년 한 해 동안 진행되었던 학사부와 연구부의 분리는 단순히 과거의 한국과학원과 KIST로 회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진행되었던 대덕으로의 확대 이전 문제와, 이미 대덕단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과기대와의 관계 설정이 더해져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된 것이다.

또한, 새롭게 탄생하게 될 기관의 명칭이 골칫거리로 남았다. 분리작업이 진행되면서 양측은 통합 이전의 명칭으로 분리독립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했지만, 한국과학기술원 특별법이 제정되어 연구부가 KIST로 다시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KIST를 하나의 정부출연연구소로 만들어 독립시키기로 하고 명칭을 종전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대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으로 결정했다. 학사부 또한 종전의 명칭인 ‘한국과학원(KA IS)'으로 환원하면 한국과학기술원 특별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특별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명칭 변경 없이 그대로 ‘한국과학기술원’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재학생 수 증가로 캠퍼스 이전 결정해

KAIST의 대덕단지 이전 과정도 큰 논란이 되었다. 대덕단지의 조성 배경을 살펴보면, 70년대 경제개발 성공에 자신을 얻은 박정희 정부가 일본의 쓰쿠바 시나 미국의 연구단지 등을 모델로 하는 과학기술 전문연구단지의 조성을 계획하고, 대상지로 대전 대덕군을 선정했다. 이는 국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차 행정수도의 이전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1973년 1월 박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지고 1년 만인 1974년 3월부터 공사에 착수해 1978년 4월에는 표준연구소, 화학연구소, 선박연구소 등이 입주해 우리나라 최초 과학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편, 70년대 눈부신 성공을 거둔 한국과학원은 재학생 수가 날로 증가해 서울 홍릉캠퍼스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캠퍼스의 한계를 서울에서 극복하고자 인근 임업시험장을 광릉으로 이전시키고 그 부지를 사용하는 방안, 대전으로 이전한 ADD 건물을 확보하는 방안 등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부의 수도권개발 억제정책과 대상기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고, 한국과학원 내의 부지는 공원녹지지역으로 묶여 개발도 불가능했다. 이 결과 나온 대안이 대덕으로의 이전인데, 80년대 초 정치적인 격변기를 맞아 잠시 주춤했던 이 계획은 84년 4월 다시 등장했다. 이후 과학기술진흥협의회에서 KAIST의 대덕이전을 확정, 보고했다.


높은 반발에도 대덕단지로 옮겨

정부는 연구부가 독립한 뒤 서울에 남아 국책연구를 수행하도록 하고, 학사부는 대덕으로 옮겨 과기대와 통합, 학사-석사-박사로 이어지는 영재교육을 담당하도록 결정했다. 그러자 서울을 떠나 대덕으로 이적해야 하는 학사부 교수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교수협의회에서 1988년 4월 27일 발표한 ‘대덕이전과 과학기술대학 통합에 관한 의견서’, 같은 해 7월 작성된 ‘한국과학기술원 연구, 학사기능 분리, 독립 추진계획(안)’ 등은 전면적인 대덕으로의 이전에 관한 반대의견을 담고 있다. 교수들은 재학생의 80%가 서울 출신인 만큼 우수한 학생과 교수진의 확보가 용이한 서울캠퍼스를 연속 운영해야 하며, 대다수 교수들의 생활권이 서울에 있어서 연구활동에 지대한 낭비가 예상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89년 2월, 전학제 원장의 후임으로 이상수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이 제6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대덕단지로의 이전은 점점 가시화되었다. 이상수 원장은 결국 1990년 3월 신학기부터는 대덕캠퍼스에서 교육을 시행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1990년 1월부터 대덕캠퍼스에서 원장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3월 2일에는 현판식과 신입생 입학식이 대덕캠퍼스에서 열렸고, 4월에는 서울에 있었던 많은 부서가 대덕으로 이전해 본격적인 대덕캠퍼스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러나 서울 홍릉의 시설과 장비를 대덕으로 완전히 이전하는 데에는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80년대 KAIST, 과학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다

이러한 행정적인 문제가 80년대 내내 끊이지 않았음에도 KAIST 학생들은 묵묵히 학업과 연구를 수행하며 한국 과학기술계 곳곳에서 활약했다. 1978년에서 1980년까지는 30편에 불과했던 한국과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의 외국학술지 게재 논문 수가 1990년 한 해 동안 264편으로 증가했고, 1979년 107건이었던 연구계약 실적이 1990년에는 794건으로 증가했다. 또한, 80년대 에 KAIST 교수들은 국내외 100여 건의 산업재산권을 등록했고, 1990년에는 졸업생의 절반이 넘는 수가 산업체에 취직하며 산업발전에 필요한 연구를 수행한다는 KAIST의 설립 취지를 확인시켰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에는 금지약물복용 검사 연구, 올림픽 전산화 종합시스템 개발 등 올림픽 지원사업을 진행해 과학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한국과학기술원 통합의 역사
80.12.31 기존의 한국과학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함
82.1.9 제2대 원장에 임관 박사 취임
83.5.4 연구부와 학사부를 8개 학부로 통합
84.1.13 과학기술대학 설립방안 검토
84.3.29 전두환 대통령, 기존 산업기술대학 설립 사업을 KAIST 영재교육과정과 통합해 한국과학기술대학(가칭)으로 변경
85.8.1 최순달 박사, 한국과학기술대학 초대 학장 취임
86.2.27 한국과학기술대학 제1회 입학식 거행
86.6.16 한국과학기술대학 개교 기념식 거행
86.7.25 제32회 임시 이사회, 학사부와 연구부의 재분리 결의
87.3.25 한국과학기술원 대덕 캠퍼스 건설 기공식
88.5.11 제5대 원장에 전학제 박사 취임
89.2.22 제6대 원장에 이상수 박사 취임
89.7.1 KIST,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분리, 독립
89.7.4 과학기술원과 과학기술대학의 학사 규정 통합, 일원화
90.1.15 이상수 원장 대덕캠퍼스에서 집무 개시
90.3.2  대덕 캠퍼스 현판식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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