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근대 교육 받은 신여성층 연구할 새로운 창을 제시하다

인문사회과학부 이상경 교수가 일제 강점기에 근대식 교육을 받은 여성을 상대로 발간했던 <신여성>과 그 전신인 <부인>을 상당수 발굴해 그 실체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부인>의 경우 이 시기 발행된 여성잡지의 전신으로 알려졌으나, 그동안 발견되지 않아 다양한 추측만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연구로 근대의 급변하던 여성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일제 강점기 근대 여성잡지의 표지. 1922년 6월 1일자 <부인> 창간호(좌), 1931년 6월 1일자 <신여성> 제36호(우)

이번 연구 결과는 <부인>과 <신여성>의 영인본으로 편찬되었으며, 근대서지학회에서 펴낸 <근대서지>에도 게재되었다.


부인, 남성 중심적 현모양처주의 반영

<부인>은 여성이 올바른 부인의 역할을 다하도록 계몽하고자 1922년 6월 창간되었다. 잡지를 읽은 여성이 독립운동을 하는 가장을 뒷받침하고 자녀를 잘 가르치면 민족의 해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남성 편집진의 생각이었다.

편집진 중 한 사람이었던 박달성은 “아무리 지식 없는 부인이라도 쉽게 알아보도록 재미있고 유익하게 만든다”라고 적었다. 천도교 여성의 대표자였던 주옥경도 “우리 부인을 위해 양처현모주의로 <부인>을 발행하니, 이는 참 우리 부인계를 위해, 아니 우리 민족을 위해 치하할 일이다”라고 밝혔다.
<부인>은 과거의 발행 사실 자체만 알려져 왔으며, 잡지의 현존과 그 내용은 이번 연구에서 처음 공개된 것이다.
 

양성평등쪾여성독립 열망에 신여성 창간

그런데 <부인> 편집실에 여성 독자의 불만이 빗발쳤다. 잡지 수준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을 겨냥한 <부인>이었지만, 정작 잡지를 구독하는 독자층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부인> 편집진은 고민 끝에 신여성들의 글을 싣고 부인기자(여성기자)를 보강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적 변화는 독자층의 요구를 충족하기에 부족했다. 창간 이듬해 8월 결국 <부인>은 폐간되고 그 다음 달에 <신여성>이 창간되었다. <신여성>의 지향점은 잡지의 제호에서부터 드러난다. <부인>에 이어 <신여성> 창간을 주도한 박달성은 “본래의 여성 자유요 평등이요 존귀요 독립이요, 무한히 발달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그 성을 그대로 발휘하자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돈화도 “경제문제와 생식문제의 해결은 남녀 간의 사랑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여성이 투쟁해 사회제도를 개조해야만 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신여성>은 1926년 휴간된 뒤 5년 후 속간되어 1934년 4월 폐간되었다. 이번 연구에서 <신여성>은 최초 공개된 3개 호를 비롯해 총 17개 호가 발굴되거나 편찬되었다.
 

자유로운 삶을 향한 고민, 시대를 초월해

개화와 근대화, 천도교 전파 등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들은 1910년대 말부터 여성 민권의 향상을 지향했다. 이 시기의 제1세대 자유주의적 신여성은 여성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양성이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제도와 법률의 지배를 받는 사회를 추구했다. 이어서 192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제2세대 사회주의적 신여성은, 진정한 여성 해방이 남성으로부터의 금전적 자립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해 양성의 동등한 경제적 권리를 요구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제3세대 민족해방적 신여성이 등장해, 식민 지배라는 우리 나라의 현실이 여성 개인의 자각과 계급의 철폐를 제약한다고 주장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신여성의 외침은 국내 최초의 여성 해방 운동이었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운동은 시대를 초월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 교수는 “어떤 것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인지, 당대 사람들은 여성이 받는 억압을 어떻게 타파하고자 했는지를 여성잡지를 통해 자세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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