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이공계 전문대학원의 “위대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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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이공계 전문대학원의 “위대한 탄생”
  • 이민우 기자
  • 승인 2011.02.1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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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KAIST 40년, 그리고 미래 - 1. 한국과학원의 태동

올해는 우리 학교가 40주년을 맞는 해다. 1971년 서울 홍릉에서 우리 학교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이 미국의 원조를 받아 개교한지 40년만에 우리 학교는 4만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과학기술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학교는 이전까지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형태의 연구중심대학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특별기획 <KAIST 40년, 그리고 미래>에서는 이번 학기 6회의 연재를 통해 우리 학교의 40년 역사를 되짚어보고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아본다


6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된 역사

우리 학교의 역사는 1969년 1월 말, 당시 뉴욕 브루클린 공과대학의 젊은 한국인 교수였던 정근모 박사에서 출발했다. 정 교수는 미국 국제협조처(이하 AID) 처장에 새로 부임한 한나 박사를 만나기 위해 미 국무성을 방문했다. 한나 처장은 한국인의 유학이 흔하지 않았던 당시, 정 교수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준 인물이었다. 한나 처장은 자신을 찾아온 정 교수에게 미국의 개발도상국 원조정책이 교육기관투자 중심으로 바뀐 것을 설명하며 한국에는 어떤 방식의 교육원조가 필요한가를 물었다. 이에 정 교수는 ‘이공계 특수대학원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대답하고 그간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연구 경력을 바탕으로 이공계 대학원의 구상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정 교수는 이때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그 해 10월 2차 보고서를 완성해 한나 처장과 주미한국대사에게 제출했다. 이것이 한국과학원 설립의 계기가 된 보고서,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The Establishment of a New Graduate School of Applied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 )'이었다.
 

신개념 이공계대학원 설립을 계획하다

정 교수가 이 보고서를 통해 제시한 이공계 대학원의 모습은 기존 한국의 이공계 대학원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새로운 개념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이공계 대학은 전통적인 학자 양성을 위한 상아탑으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같은 대학이 아닌 한국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고급 인력을 공급하는 응용 과학기술 대학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공계 특수대학원은 교육, 연구의 유연성을 위해 독립적인 기관이어야 했다.


문교부의 거센 반대, 과학기술처로 주도권 넘어가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기존 대학 교수들과 문교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정 교수의 보고서에는 기존 대학에 대한 비관적인 평가와 함께 거액의 자금을 ‘검증되지 않은’형태의 대학원에 투자하려는 계획이 담겨 있었으므로, 교수들은 이를 기존 대학의 기득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한국과학원 설립 계획은 어려움을 겪는 듯 했으나 1970년 4월 경제동향보고회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계획의 주도권을 문교부가 아닌 과학기술처로 넘기면서 다시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김기형 과학기술처 초대 장관은 “당시 문교부장관이 대학 설립은 문교부의 고유 권한이므로 절대 양보 할 수 없다며 버텼는데, 박 전 대통령이 이 프로젝트를 과학기술처가 담당하라고 하자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가버렸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과학기술처를 중심으로 한국과학원 설립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한국과학원법(안)이 1970년 4월 국무회의를 통과해 5월에 국회에 제출, 7월 임시국회에서 의결되어 마침내 8월 7일 공포되었다.
 

터만 조사단, 한국과학원의 기틀을 닦다

한편, 설립 재원의 상당 부분을 지원해 줄 미국 측과의 접촉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김 전 장관은 AID 측에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한 교육차관 제공을 요청했고, AID 측은 한국과학원의 설립 가능성 검토와 설립 사업에 대한 자문을 임무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단의 단장으로는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로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의 명예교수 터만 박사가 임명되어, 일명 ‘터만 조사단’이 결성되었다. 터만 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정 교수는 “당시 미국 공학교육 방면에서는 터만이 가장 유명했는데, 한국과학원의 설립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여러 대학에서 교수들이 파견되었다”라고 말했다.

▲ 정근모 교수(왼쪽 두 번째)와 터만 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박민아 교수 제공

7월부터 차례로 입국한 터만 조사단 단원들은 50일 가량의 조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가 일명 터만 보고서라 불리는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보고서(Survey Report o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다. 이 보고서는 한국과학원의 필요성, 실현 가능성, 조직 및 운영의 핵심사항과 한국과학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어 초창기 한국과학원 운영의 지침서가 되었다.


미국 국제협조처 600만 달러 차관 결정

터만 조사단과 함께 한국을 떠난 정 교수는 당시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한나 처장을 찾아가 한국에서의 조사단 활동에 대해 보고했고, 한나 처장은 곧바로 한국을 방문해 김 전 장관과 교육차관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그 결과 AID측이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해 600만 불의 차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1971년 2월 18일, 한국과학원 탄생하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인 1970년 12월 한국과학원법시행령이 공포되고, 1971년 초 한국과학원정관이 완성되었다. 설립자로 추대된 박 전 대통령은 한국과학원 설립 임원을 직접 임명했는데, 초대 원장으로 당시 원자력청장에 재직하고 있던 물리학자 이상수 박사를 임명했다. 같은 해 2월 문교부가 한국과학원 정관에 동의하고 설립 등기가 완료됨으로써 한국과학원의 공식적 설립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2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과학기술처 상황실에서 열린 창립이사회와 함께 한국과학원이 탄생했다.
 

 

<KAIST 40년, 그리고 미래>  연재 순서

1. 한국과학원의 태동

2. 개교 초기 한국과학원

3. 격동의 80년대를 맞은 우리 학교

4. 벤처기업의 산실 KAIST

5. KAIST와 학생 사회

6. KAIST 40년, 미래를 말하다

 

- 한국과학원 설립의 역사 -

69.10. 정근모 교수,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대학원 설립안>을 AID에 제출

70.3.24 정근모 교수, 과학기술처의 초청으로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 자문을 위해 귀국

70.3.25 과학기술처, <한국과학원(가칭) 설립계획> 작성

70.4.6 박정희 대통령, 월례 경제동향보고회 석상에서 "독립된 과학기술대학원신설안"을 과학기술처의 책임 하에 추진할 것을 지시

70.4.28 <한국과학원법(안)>, 국무회의 통과

70.5.11 경제기획원 장관, AID에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한 장기저리 교육차관 제공 요청

70.6.29 한국과학원 설립 사업에 대해 과학기술처 장관의 자문에 응할 한국과학원 설립자문위원회 구성

70.7.16 <한국과학원법(안)>, 국회 의결

70.7.17 AID 터만조사단 선발대 입국

70.9.10 터만조사단 한국을 떠남

70.9.16 김기형 과학기술처 장관과 해너 AID처장 간에 600만 불의 교육차관 제공에 대해 합의

70.12.15 <한국과학원법 시행령>공포

71.1.5 터만 조사단,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보고서> 및 <보충보고서> 제출

71.1.12 경제기획원, 서울연구개발단지 조성계획 대통령에게 보고

71.1.27 박정희 대통령, 한국과학원 이사회의 이사장, 원장 및 이사들을 임명하고 임명장 수여

71.2.16 한국과학원 설립등기 완료

71.2.18 설립이사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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