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은 1810년 3월 1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폴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쇼팽은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후반생을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중학생 시절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주목받았으며, 그의 스승이었던 지브니는 더는 가르칠 게 없다며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쇼팽은 일생 대부분을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쇼팽은 다양한 피아노 소품을 남겼는데, 특히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이 즉흥 환상곡이다. 죽을 때까지 출판을 허락하지 않고 항상 악보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즉흥 환상곡을 아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조국을 사랑한 음악가
쇼팽은 죽을 때까지 폴란드의 흙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조국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1830년 11월, 폴란드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쇼팽은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이를 만류하며 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쓴다. 결국, 쇼팽은 폴란드 혁명에 참여하지 않고 혁명은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된다. 이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 작곡한 것이 오늘날 <혁명 에튀드>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혁명에 직접 참가하진 않았지만, 강렬한 선율과 웅장함을 담은 이 격정적인 작품으로 폴란드의 위상을 높이게 된 셈이다. 쇼팽은 연주회로 번 돈을 폴란드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했는데, 무엇보다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의 작품이 폴란드인의 애국심을 흔들었다고 한다.
인연이 없었던 쇼팽의 연인들
쇼팽은 항상 여인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1836년, 쇼팽은 친구의 동생인 보진스카와 교제했고, 관계는 약혼까지 진전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이 때문에 결국 파혼에 이르렀다. 그 해, 그런 그에게 다가온 여인이 바로 여류문학가인 조르주 상드였다. 쇼팽보다 6세나 연상인 그녀는 쇼팽의 지병을 정성으로 간호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약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1846년,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두 사람은 끝내 헤어지게 된다. 그 후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1849년에 폐결핵으로 파리에서 사망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쇼팽의 심장은 조국 폴란드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음악에 새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폴란드의 민속 음악인 폴로네즈를 예술 음악으로 끌어올린 그의 공적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의 음악가 안톤 루빈시테인은 쇼팽을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마음, 피아노의 넋'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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