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냐 외설이냐, 예술이냐 예술가냐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이연식 씨의‘예술이냐 무엇이냐’를 연재한다. ‘예술이냐 사기냐’, ‘예술이냐 외설이냐’, ‘예술이냐 예술가냐’의 주제를 갖고 예술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한국이 자랑하는 예술가 백남준은‘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을 남겼다. 예술은 품위있는 것,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라 여기고 싶은 사람에게 이 말은 매우 불편한 것이다. 게다가 미술계에서 요즘의 김연아만큼이나 유명했던 인물이 이런 말을 하다니. 어떤 사람들은“백남준 자신에게는 예술이 사기였나 보지”라며 냉소하기도 한다. 백남준이 일찍이 고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활동했기 때문에 좀 더 섬세한 한국어 표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가 예술의 고약스러운 측면을 어떻게든 강조하고 싶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술은 사기인가? 이 물음에 얼른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조금 바꿔 보자. 예술은 진실을 추구하는가? 90년대 초반에 영화화되 었던 장정일의 유명한 소설‘너에게 나를 보낸다’에는 소설가와 은행원이 예술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술과 진실

진실을 추구하는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드러나면 거짓은 저절로 부서져. 수정궁(어떤 의문과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인 세계의 은유)도 부서지지. 잘 모르지만, 난 예술이라는 게 거울을 놓는 작업일 것 같아. 거울을 잘 놓기만 하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그대로 반영될 거아냐? 수정궁이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 자신을 소멸시키게 될 거야”
 은행원의 생각은 달랐다. “예술, 그런 게 있다면 그건 거울이 아니라 렌즈여야 해. 오목이든 볼록이든 다 좋아. 확대를 하거나 축소를 하거나. 하다못해 일그러진 거울도 좋아. 왜곡을 통해서도 진실은 드러나거든. (중략) 넌 추녀가 거울 앞에서 뭘 하리라고 생각하니? 당연히 자기위장이고 합리화지. 무슨 말이냐면, 더럽혀진 세상은 스스로 자정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는 거야”
 예술은 진실의 뒤를 쫓아 따라잡을 수도 없고 진실이 무엇인지 캐서 올릴 수도 없다. 미술에서는 그렇다. 미술이 진실을 반영한다는 믿음이 어느 때보다 높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부터 살펴보자. 중세에는 교회와 영주가 고용한 기능공에 불과했던 미술가들이 르네상스 때부턴 스스로를 개성과 창조력을 지닌 존재라고 여겼는데, 이런 자부심은 자신들이 세상의 모습을 실제처럼 묘사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했다. 원근법과 해부학이 발달하면서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앞 시대 미술가들보다 훨씬 실제 같은 그림과 조각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술이 진실을 추구하는 가장 뛰어난 수단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는 갖가지 사물, 자연의 신비로운 국면을 그렸고, 그림이 실제에 가깝도록 하기 위해 자연을 필사적으로 연구했다. 당시에 시체의 해부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레오나르도가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시체를 해부했음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의 시대는 물론이고 19세기 중반까지 화가들이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움직임’을 포착하는 문제였다.

 

움직임의 문제

16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는 토끼를 마치 사진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그림을 하나 남겼다. [그림1] 그런데 사람들은 뒤러가 실제 토끼를 그린 게 아니라 박제된 토끼를 그렸을 거라고 의심한다. 죽어서 고정된 토끼가 아닌 다음에야 끊임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물을 그 자리에서 이처럼 핍진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말(馬)을 그릴 때가 문제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이 달릴 때 네 다리가 어떻게 엮여서 움직이는지는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레오나르도 역시 말을 해부하면서 말의 근육과 뼈를 연구했지만 답을 내지 못했다. 결국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은 되도록이면 말이 앞발을 번쩍 치켜들고 선 모습처럼, 순간적으로 정지한 모습을 묘사했고 진짜 복잡한 문제는 회피했다.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낭만주의 미술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 그 기폭제 역할을 했던 화가는 제리코였다. 말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제리코는 경마(競馬)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말들은 네 다리를 앞뒤로 쫙쫙 뻗고 있다. 이 시기의 화가들은 대부분 달리는 말을 이런 식으로 그렸다. [그림2] 하지만 사진이 보급되면서 1870년대에 머이 브리지라는 사진가가 말의 움직이는 모습을 연속 촬영했는데 그 결과는 사람들이 짐작 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림3]
  발레리나와 경주마 등을 그린 것으로 유명했던 화가 드가(Degas) 역시 사람과 말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골몰했다. 드가 또한 진실을, 그것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추구하는 화가였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의 모든 모습을 표현해 내는 것이었다. 자연의 움직임을 정확하고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그림4]
 하지만, 결국 그는‘진실’이란 자연과 세계의 기만성 그 자체임을 알았다. “예술 세계는 교묘한 책략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속임수로 가득한 세계다. 따라서 예술은 거짓된 수단을 동원해서 자연스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되게 보여야 한다. 뒤틀린 직선 이라도 곧바른 느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장 아름다운 그림, 가장 노력을 기울인 그림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보다는 못한 것이다. 따라서 속임수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랑스레 큰소리를 친다"
 결국 드가는 1870년대 이전에 자신이 그렸던 몇몇 말 그림을 1870년대 이후에 사진을 참조해 고쳐 그렸다.

 

 

 

속임수의 속임수

예술은 온갖 수단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해 왔지만 이따금 예술 자체가 속임수에 시달려 몸살을 앓기도 했다. 속임수인 예술의 뒤통수를 치는 속임수, 그것의 이름은‘위작(僞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은 나치 독일의 제2인자였던 괴링이 유럽 각지에서 긁어모은 미술품을 발견했고, 그 중에는 ‘진주 귀고리 소녀’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Vermeer)의 서명이 들어간 작품도 있었다. 이 작품의 경로를 추적한 결과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 1889-1947)이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독일인 은행가를 통해 괴링에게 판매했음이 드러났다. 네덜란드 당국은 판 메이헤런을 즉각 체포했는데, 네덜란드의 중요한 유산을 적국에 팔아넘긴 혐의였다. 그런데 판 메이헤런은 괴링에게 넘어간 그림이 실은 베르메르의 원작이 아니고 자기가 베르메르를 흉내 내어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1930년대 후반부터 베르메르의 그림이라며 네덜란드에 새로이 나타난 그림은 전부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했다.
 이 뜻밖의 진술에 대해 사람들은 판 메이헤런이 나치에 협력한 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결국 재판부는 판 메이헤런에게 베르메르 풍의 그림을 한 점 그려 보라고 했는데, 판 메이헤런은 이를 훌륭하게 그려 냈다.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말을 믿게 되었고, 이제는 그를 나치의 괴링을 속인 천재이자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다. 판 메이헤런이 그 동안 그렸던 위작들은 당연히 값이 폭락했지만 나중에는 비싼 값이 매겨지기 시작했고, 그의 그림을 본 딴 위작도 나왔다.
 사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가인 미켈란젤로도 위작을 만든 적이 있다. 조르조 바사리의‘미술가 열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스무 살 무렵에 대리석을 깎아‘잠자는 큐피드’를 만들었는데, 그의 친구인 발다사레가 이걸 땅에 파묻었다 꺼내서는 고대의 조각품인 것처럼 속여서 추기경 라파엘로 리아리오에게 팔았다.
 백남준은‘예술은 사기’라고 했지만 유명한 추리소설가 체스터튼은 자신의 단편소설 ‘푸른 십자가’에서 더 험악한 말을 했다. “예술작품과 범죄는 같다. 외양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술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삶의 균형을 잡는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위안을 얻기 위해 예술을 품에 안고 보면, 그 포근하고 귀여워 보이는 요망한 것이 뒤에 감추고 있던 긴 꼬리가 방문 밖까지 뻗어 나가 온갖 요사스러운 것들을 불러들이곤 한다. 예술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꾼다. 눈이 바뀌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복잡하고 위험한 질문을 던지게 되며 일상은 흔들린다. 사실 누구나 일상 자체에 불안정한 요소가 내재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그것을 느끼며 산다. 예술은 그런 불안정함을 섬세하고 교묘한 형식 속에 고착시킨 것이다. 안일한 의식과 획일화된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사회 속에서라면 예술은 범죄처럼, 사기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연식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한국 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일본의 우키요에와 양풍화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썼다. 『미술영화 거들떠보고서』『위작과 도난의 미술사』를 썼고, 『무서운 그림』을 번역했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