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은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과학적 성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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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은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과학적 성취들
  • 박진현 기자
  • 승인 2010.06.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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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쿤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이해하려면 그의 패러다임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패러다임은 한 시대의 과학 분야 체계를 이루는 동시에,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분해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이란 보편적인 인식의 틀이다
패러다임의 개념이 확립되는 데는 ‘구조’ 출판 전 쿤과 사회과학자들과의 교류 또한 한몫을 했다. 자연과학자들과 달리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는 그 분야의 근본 개념이나 방법론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며 끊임없는 논쟁을 일삼지만, 자연과학에서는 그러한 논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근본적이고 심오한 문제, 즉 연구 방법이나 기본 개념에 대한 논쟁 대신 구체적인 문제 풀이에 집중하는 것이다.

 쿤은 풀이에서 탁월성을 보이는 구체적인 문제를 퍼즐이라고 불렀다. 그런 퍼즐과 그 퍼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제시해 주는 보편적으로 인정된 과학적 성취들로 구성된  인식의 틀이 바로 패러다임이다. 쿤에 의하면, 한 시대의 특정 과학 분야는 바로 그 분야를 주도하는 패러다임으로 규정되며 한 분야에는 단 하나의 패러다임만이 있다.

 패러다임의 개념이 나온 이후 다른 분야의 학자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과학과 같은 방식의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 골몰했다. 하지만, 이것이 쿤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쿤은 여전히 자연과학만을 과학의 모델로 생각했다.


과학혁명,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하다
그의 패러다임 개념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패러다임 전환으로 알려진 과학혁명에 대한 견해이다. 과학에서는 한 패러다임이 주도하는 시기인 정상과학(normal science) 시기가 때때로 균열을 일으키며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때가 있다. 이러한 때를 보통 혁명의 시기라고 부르며, 흔히 쿤의 과학관은 오랜 정상과학의 시기들이 때로는 짧은 혁명 시기에 의해 중단되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학관이 논쟁의 초점이 된 것은 쿤 자신이 다음과 같은 함축을 이끌어내면서이다. 혁명 이후에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어서며 이는 이전 패러다임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이후 패러다임이 이전의 것보다 낫다고만 할 수는 없다. 과학 교재나 이전 철학자들이 그린 대로 과학은 점점 옛 업적 위에 새 업적이 쌓이면서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패러다임에 상대적이다. 패러다임과 무관한 어떤 영원불변의 진리, 모든 과학의 진보가 향하는 진리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은 비교 우위를 논할 수 없다
 이러한 함축은 과학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를 불편하게 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같은 분야 연구의 연속선상에서 가장 멀리 나아갔다는 확신을 얻기를 바란다. 우리는 예전보다 진리에 훨씬 가까이 있으며 쿤의 비판자인 물리학자 와인버그가 꿈꾼 대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 입자에 대한 최종 이론이 임박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목적을 향한 과학의 진보를 쿤은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쿤은 뉴턴 역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보다, 상대론이 뉴턴 역학보다 진보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 대답의 근거가 보통 과학자들 생각과 매우 다르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상대론과 같은 최근의 패러다임은 이전의 패러다임이 풀지 못하던 많은 문제를 더 유효적절하게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퍼즐 풀이 능력의 향상이 과학의 진보를 이루는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시공간에 대한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상이한 견해나, 물질과 운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물리학의 차이는 진보를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또한, 어떤 과학자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처음부터 의도하고 과학 활동을 하지 않는다. 패러다임 없는 과학 활동은 없으며 모든 구체적 문제 풀이는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기존 패러다임에서의 퍼즐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패러다임 밖에서 기존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을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없으며, 새 것이 낫다는 판단은 단지 사후적인 정당화일 뿐이라는 것이 쿤의 주장이다.


쿤의 도전, 그 논쟁은 계속된다
물론 쿤의 이러한 견해는 매우 논쟁적이며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통찰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는 것일지 모른다.

 쿤은 과학의 본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과학의 실제 역사에 대한 탐구에 의해 뒷받침되며 만일 여기서 이끌어낸 함축이 귀에 거슬린다면 과학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맞받아칠 것이다. 아무튼 과학이 합리적으로 진보하며, 객관적 진리를 보증하는 탐구 방식이라는 기존의 견해에 대한 쿤의 도전은 21세기 과학철학이 여전히 씨름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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