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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고도 잔혹한 이야기, 환상과 현실을 아우르다
기예르모 델 토로 -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462호] 2019년 05월 14일 (화) 정수헌 기자 sh.jeong@kaist.ac.kr

 늦은 밤, 으스스한 분위기의 숲속. 소녀의 가쁜 숨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윽고, 피를 흘리며 쓰러진 오필리아를 위로하듯 구슬프면서도 잔잔한 콧노래가 들려온다. 1944년 스페인,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내전은 끝났지만, 파시스트 정권과 반군은 대립을 지속하고 있다. 차갑기만 한 현실 속에서 오래전 잊혀 버린 요정들의 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필리아와 그녀의 엄마 카르멘을 태운 차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깊은 숲길을 지나간다. 정부군의 장교 비달과 재혼해 아이를 밴 카르멘은, 아들은 아버지의 곁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비달의 말에 따라 숲속 부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복통을 호소하자 차들은 멈추어 섰고, 오필리아는 주위를 돌아다니다 신비한 비석을 발견한다. 오필리아는 비석에서 나온 괴상하게 생긴 벌레를 보고 요정을 만났다며 기뻐한다. 벌레는 오필리아와 카르멘을 태운 차를 따라오고, 이윽고 비달의 반군 소탕 부대에 도착한다.

 카르멘을 부대로 부른 비달은 정작 카르멘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다. 비달은 배 속의 아이를 아들이라고 확신하며 아기만을 걱정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가문을 이을 아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산에서 반군으로 추정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잡혀 온다. 그들은 평범한 농부였지만 비달은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잔혹하게 살해한다. 그의 잔인하고 이기적인 품성은 오필리아가 겪게 될 암울한 현실을 암시한다.

 한편, 낯선 환경에 잠 못 이루던 오필리아의 앞에 그녀를 쫓아오던 벌레가 나타난다. 요정의 모습으로 변한 벌레는 그녀를 부대 옆에 있는 미로로 안내한다. 곧이어 미로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고, 그곳에서 염소의 뿔과 다리를 가진 괴물을 마주한다. 자신을 판이라 소개한 괴물은 오필리아가 요정 왕국의 공주라고 설명하며, 그녀가 공주로서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스페인의 혼란한 상황에서 잔인하고도 낯선 현실을 맞이한 오필리아는 괴이하고 신비로운 일들을 겪는다. 그녀는 엄마를 보살피는 착한 딸의 역할과 요정 왕국에 돌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공주로서의 임무들 사이에서 갈등한다. 지친 오필리아는 카르멘에게 둘만의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어리광부린다. 하지만 카르멘은 현실은 동화와 달리 잔혹하다며, 어른이 되면 자신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과 환상,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린 오필리아의 안타까운 모습은 어릴 적 읽던 동화 속 행복한 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멀다.

 가혹한 현실 속 이야기들과 그리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환상 속 이야기들은 영화 내내 함께 존재한다. 그 사이를 오가는 어린 오필리아의 감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이러한 오필리아의 감정에 동화되며 관객들은 현실과 환상 속 이야기 모두에 몰입하게 된다.

 <판의 미로>는 어릴 적 읽던 동화 속 아름다운 판타지와 다르다. 국내 첫 개봉 당시에는 배급사가 아동용 판타지 영화라고 홍보해, 어린 관객들이 상영 도중에 뛰쳐나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전해진다. 판타지가 무엇을 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이 영화는 동화를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로 한정 짓지 않는다. 이 어둡고 깊은 판타지에 열광하는 성인들은 아마 그들을 위한 동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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