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했던 한 국사 수행평가는 나에게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두만강 북부에 있는 간도의 영유권과 관련하여 자신의 주장을 쓰는 논설문 수행평가였는데, 사실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논설문’ 수행평가보다는 국사 선생님이 주입한 의견을 외워서 풀어놓는 ‘암기’ 수행평가에 가까웠다. 당시 나의 국사 선생님은 한국의 간도 영유권을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시던 분이었고,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는 교과서와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많이 나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런 국사 선생님의 논설문 출제 의도는 뻔했다. 내 생각은 국사 선생님과 달라서 많이 고민했지만, 국사 선생님이 원하시던 것은 나의 의견과 반대였기에 어쩔 수 없이 국사 선생님의 의견을 따라서 글을 써서 제출하였다.

 사실 국사 선생님이 간도 영유권을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데에는 한국 국사 교과서의 방침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국사 교과서부터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사 교과서는 간도 영유권을 무슨 근거를 들어 주장하고 있을까? 또한 그것은 합당한 주장일까?

미래엔 고등 한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대한 제국은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였다’고 하며, ‘일제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면서 ‘현재까지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고 한다. 간도 영유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한 근거로는 ‘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한 점’과 ‘백두산정계비문’을 들었다. 백두산정계비문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을까? ‘백두산정계비’은 숙종 38번(1712년) 백두산에 세운 비석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를 표시하였다.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여기서 논란이 된 부분은 ‘토문강’이다. 미래엔 고등 한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토문강이 쑹화 강의 상류이므로 간도가 틀림없는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였다.’라고 한다. 즉, 쑹화 강의 상류 아래 지역에 있는 간도는 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사 교과서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는 부분이 있다. 대한제국이 1903년에 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한 것은 실질적인 영유권 주장으로 해석될 수 없다. 조선이 만약에 간도를 자신의 땅으로 계속 인지하고 있었다면, 간도 관리사는 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파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정계비문 건립 이후 조선이 간도에 행정관리를 파견했다는 기록은 이범윤 파견을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청의 요청으로 3개월 만에 간도 관리사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에 간도 관리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반면 청은 간도 지역에 1677년부터 봉금령을 내려 만주족 이외의 거주를 금지하였으며, 이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후 더 강력하게 시행된다. 청은 간도 지역을 지속해서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정부는 ‘토문강이 쑹화강의 상류이므로 간도가 틀림없는 우리 영토’라고 항상 주장하지는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자. 숙종실록 52권, 38년의 3번째 기사를 보면 홍치중의 상소가 나온다. 홍치중의 상소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해야 하는데 청과 조선의 불분명한 처리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왕에게 알린다.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라는 구절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정조실록 2년 1월 13일에 의하면 ‘대개 압록강 두만강 두 강의 근원은 다 같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나라의 경계입니다’라고 하며, 정조실록 7년 12월 8일에는 ‘두만강 이북은 곧 우리 땅이 아니므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를 봐도 정부가 압록강과 두만강이 조선의 경계임을 인식했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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