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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뉴트럴,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다
[461호] 2019년 04월 30일 (화) 하예림 기자 yerimha13@kaist.ac.kr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중립성을 의미하는 젠더 뉴트럴(Gender Neutral)은 젠더에 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최근에 하나의 소비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민텔은 <Hotspots: August 2018’s Top Trends Observations> 보고서를 통해 젠더를 구분하지 않는 제품은 기업에게 위험한 시도이지만, 많은 소비자가 이러한 기업의 위험한 시도를 반긴다고 관찰했다. 또한, 소비자들이 앞장서서 전통적인 성 고정 관념을 버리고 있기에, 젠더 뉴트럴은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할 전략임을 강조한다.


 젠더 프리 패션은 유니섹스의 형태로 21세기 이전에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생활 양식으로서의 유니섹스는 성 중립적인 패션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남녀의 동등 의식도 포함하지만, 1960년대에는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한 패션을 제시하는 유니섹스 패션만이 소비 트렌드로 떠올랐다. 당시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한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며 치마 대신 바지를 선택하는 여성이 늘었고,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수트가 여성 패션으로 유행했다. 김용섭 경영전략 컨설턴트는 당시의 유니섹스가 근본적인 성 평등을 이끌어내기보다 패션과 헤어스타일 등 외관적인 이미지에서의 성별 간 차이를 줄이는 데에 집중되었다고 분석했다.


성별이라는 상표를 떼어내다

 1960년대의 유니섹스 트렌드는 패션 이외의 분야로 발전하는 데에 실패했지만, 50년 후 젠더 뉴트럴의 개념으로 확장되어 돌아왔다. 성의 구분을 허물고 양성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젠더 뉴트럴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패션 업계에서는 소비자의 신체적 특징, 기호의 차이만을 고려한다. 

 패션 브랜드는 젠더 뉴트럴 마케팅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구찌와 마크 제이콥스는 남성 컬렉션과 여성 컬렉션으로 구분했던 제품을 통합했고, 자라와 에이치앤엠은 남녀 공용 의류를 만들어 고정적인 성별의 구분을 없앴다. 루이비통은 남성 모델이 기존에 여성복으로 판매했던 옷을 착용하고 광고를 촬영했다. 성별의 벽을 허문다고 해서 획일화된 의류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다. 젠더 뉴트럴 마케팅을 실천하는 브랜드에서는 레깅스나 치마 등 여성복이라 여겨졌던 옷을 성별에 따른 제약 없이 입을 수 있도록 판매한다. 그동안 성별, 체형별, 인종별 구분을 당연시했던 패션 산업에서 전통적 구분을 허물고 오로지 개인의 기호만 고려하는 것은 패션 산업의 방향에 의미 있는 변화이다. 

 뷰티 업계 역시 성별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니섹스 마케팅은 여성과 남성에게 같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며 창의적 발상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젠더 뉴트럴 마케팅은 성별과는 무관한 개인의 특성을 반영한다. 기존에는 남성용 화장품과 여성용 화장품이 구분되어 색, 향 등의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영국의 화장품 브랜드 제카, 미국의 플루이드 등 회사들의 대표 제품은 성별 구분 없이 모든 소비층을 겨냥한다. 딥티크와 조말론 등의 향수 브랜드에서도 성별의 경계가 사라졌다. 소비자들은 여성적인 향, 남성적인 향 중에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자신만의 개성을 나타내는 향을 찾는다. 롯데백화점에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남성 소비자의 색조 화장품 구매액은 지난 5년간 15% 이상 증가했다. G마켓은 2018년 1월부터 4월까지 남성 구매자의 스킨케어 제품 구매 건수가 전년 대비 122% 증가했고, 파운데이션 구매 건수는 16% 늘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소비 트렌드에 힘입어, 2018년 5월 한국에도 젠더 뉴트럴 메이크업을 지향하는 화장품 브랜드 라카가 등장했다. 라카는 같은 립스틱 제품을 남녀 모델이 동시에 바르고 나와 홍보하도록 했다. 젠더 뉴트럴 마케팅 결과로, 라카는 초기 매출에서 다른 브랜드보다 높은 20~30%의 남성구매자 비율을 보였다.

 성 고정 관념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는 것처럼, 젠더 뉴트럴 마케팅이 목표하는 바 중 하나는 개인이 주변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개성을 따르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패션과 뷰티 업계에서는 보디 포지티브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보디 포지티브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즉, 매체에 등장하는 날씬한 몸매, 멋진 외모와 같이 사회가 규정한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의 속옷 브랜드 에어리, 제약 소매점CVS 파머시 등에서는 제품 광고에 보정하지 않은 모델 사진을 이용했다. 이들 외에도 여러 브랜드에서 여러 인종과 체형, 연령대의 모델을 등장시켜 다양한 소비자의 특징을 반영한 광고를 선보이고 있다. 옷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옷을 맞추는 것, 모든 기준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두는 쇼핑이 바로 젠더 뉴트럴 마케팅의 결과이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젠더 뉴트럴 트렌드는 뮤지컬, 연극과 같은 공연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공연계에서는 성별에 구애되지 않는 배역의 기용이 급증하고 있다.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이전까지 남성 배우가 연기했던 헤롯 역에 여성 배우가 캐스팅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뮤지컬 <더데빌>과 <록키호러쇼>, <해적>, <광화문 연가> 등에서는 같은 배역에 다른 성별의 배우가 함께 캐스팅되기도 했다. 배역의 성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젠더 프리 캐스팅 이외에 연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젠더 벤딩(성별 바꾸기)도 눈에 띈다. 유리 부두소프가 연출한 <인형의 집> 3막에서는 가정 폭력 장면을 아내와 남편을 맡은 배우가 배역을 바꾸어 한 번 더 연기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을 경험하도록 했다. 잡지 <더뮤지컬>의 박병성 기자는 공연계에서의 젠더 프리, 젠더 벤딩 시도가 여성 배우의 출연 기회를 높여줄 뿐 아니라 성에 대한 편견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선을 제공했음을 강조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공연 양식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조연이나 인간이 아닌 배역에서만 젠더 프리 캐스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성 역할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배역도 많다. 지혜원 공연평론가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성 역할에 관한 관객들의 인식이나 극의 해석을 바꾸지는 못했다며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사회

 변화하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은 기업만이 아니다. 네덜란드 국영철도회사는 2017년 12월부터 역사 안내방송에서 승객을 ‘신사, 숙녀 여러분’ 대신 ‘여행자 여러분’이라 지칭하고 있다. 영국 런던교통공사 및 뉴욕 광역교통국 MTA에서도 안내방송 문구에서 성별을 언급하지 않는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성 중립적인 인칭대명사의 사용을 권고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남성, 여성 명사가 구분되어 있는 프랑스어의 언어 체계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젠더 뉴트럴이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임을 강조한다.

 여러 국가와 기업이 젠더 뉴트럴 문화의 정착을 위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독일과 캐나다,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는 공식 문서에 제3의 성을 표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특히 독일은 출생 증명 서류에 남성, 여성, 그 외의 성 중 선택하여 기재하도록 법률을 마련해,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첫 국가이다. 기업의 경우 젠더 뉴트럴 정책을 반영하는 것이 브랜드 이미지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다수의 기업이 이미 성소수자와 관련한 행사를 후원하거나 사내 성차별에 강경히 대응하는 등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젠더 뉴트럴 마케팅은 성별의 구분을 걷어내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나아가 차별과 고정 관념을 만들어내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사람 자체에만 집중하자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은 각자의 개성을 꽃피울 기회를 찾게 되었다. 젠더 뉴트럴 마케팅은 모두가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에 다다르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뿐이다. 타인을 볼 때 인종, 성별, 나이 등의 꼬리표를 떼어버리는 당신, 젠더 뉴트럴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참고문헌 | 

<라이프 트렌드 2019: 젠더 뉴트럴>, 김용섭,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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