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려던 룸메이트는 침대에 누웠다. 이 친구는 아까 갈배가 곧 상할 것 같다 하더니 나에게 권한다. 딱 봐도 해장하려고 샀던 듯하여 언제 샀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침대와 책상. 우리들의 몇 평 남짓한 기숙사 방에는 공존할 수 없는 이것들이 서로 붙어있다. 일과 여가는 분리되어 있다. 어릴 적에 ‘넌 공부하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던 내 친구의 말처럼, 나는 그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 불확실해 보이는 내 활동을 스스로 ‘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 나름대로는 구분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친구의 그 말을 듣고는 처음 듣는 내 모습이라 꽤 당황했었던 듯한데, 지금 생각해보니 침대와 책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룸메이트의 모습과 퍽 유사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가나 취미 활동을 즐기는 데는 대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일을 정말로 즐기면서 하는 사람도 일하는 모든 순간이 즐겁기만 할 순 없다. 자신의 능력과 환경에 적당히 타협하여 어떤 일에 종사하는 이라면, 일 자체에서 자아실현이나 에너지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취미는 하고 싶을 때에 무엇을 할 지를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반면 일은 그렇지 않다. 회사에서 일한다면 말할 것도 없고, 자영업을 한다 해도 언제 일을 쉴지를 정할 수 있는 정도다. 식당 주인이라 해도 손님이 들어오고 주문을 하면,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의지와 상관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것과는 별개로 의미와 재미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도 아직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이지만, 작년 겨울방학에 삼성 드림클래스 캠프에 강사로 참가하면서 중학생 동생들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간이 있었다. 학생 중 한 명은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 만화가를 하고 싶어 하였다. 우리 반의 한 강사분은 그 친구에게 일단 공부를 계속 열심히 하고 만화를 취미로 하기를 조언했다.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저런 말을 하던 주위 사람들을 싫어했었다. 일종의 반항심과 고집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나도 저런 조언을 해줄 것 같다. 같은 일이라도 취미로 가지는 것과, 직업으로 가지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크다. 그 학생이 만화가로서 성공하고 만족하는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가 매우 어렵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취미로서 즐기는 활동이 직업이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결과물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다. 어떤 일에 대한 흥미보다는 적성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흥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질 수 있지만, 자신의 적성은 그리 쉽게 없어지거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자신의 직업이 아닌 취미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 일에 재능이 있지는 않지만, 정말로 좋아하여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취미’의 수준을 넘어선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워라밸’이라는 말의 탄생에서 알 수 있듯이, 근래에는 일과 자기 생활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다. 각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기에 이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 진로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카이스트를 다니는 우리들은 많은 수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직에 종사한다. 그리고 연구직은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이 불가피한 직종이다. 자신의 흥미와 적성, 자아실현, 기대 소득 등 일반적으로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것들에 추가하여, 그 직업의 생활 패턴도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희망하는 일에 종사하면 하루에서 일이 얼마만큼 시간을 차지할 것이며, 일 외의 다른 것들에 얼마나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러려면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꼭 생각해볼 만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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