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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역사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다
[459호] 2019년 03월 12일 (화) 류제승, 유신혁 기자 ryjs9810@kaist.ac.kr

 1919년 3월 1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마다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독립의 열망과 기쁨을 목놓아 외쳤다. 이윽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들의 함성이 경성 시내를 가득 메웠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린, 3·1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2019년, 3·1운동은 100주년을 맞이한다. 독립운동의 치열한 순간에서 100년이 지난 지금 그 의미와 역사를 다시금 되짚어본다.


100년 전, 전국을 울린 함성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일제는 무력과 강압을 앞세운 무단 통치를 원칙으로 가혹한 정책을 펼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억누르기 위해 헌병 경찰제도를 시행하고 토지조사정책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수탈도 자행하였다. 수년간 이어진 가혹한 무단 통치는 일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인들의 반발심과 독립 열망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 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다. 각 민족집단의 정치적, 사회적 자결권을 이야기하는 민족자결주의 사상은 한민족을 비롯한 많은 피지배 민족의 독립운동을 부추긴다. 이를 접한 여운형, 신규식 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파리로 한국 대표를 급파하지만 무산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만주 지린성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담 14개 조를 알리며 무오 독립선언의 기초를 마련한다.

 파리 강화회담이 열린 지 사흘 후인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급사한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통치에 분노한 사람들은 고종 독살론을 제기한다. 많은 사람이 고종 독살론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국내외 여론이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무오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이어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이 발표된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일던 추모의 물결과 함께 민족대표 33인과 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종의 장례식은 3월 1일부터 7일까지, 국장으로 치르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천도교, 개신교, 불교 대표들은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 발맞추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한다. 그렇게 결성된 민족대표 33인은 기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탑골공원에서 낭독하기로 계획한다.

 3월 1일 당일, 민족대표 33인의 거사는 유혈사태를 우려하여 애초 계획과 달리 태화관에서 이뤄졌다. 33인 중 29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기미 독립선언식이 열렸고, 그들은 자진해서 이 사실을 종로경찰서에 알린다. 한편, 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있던 탑골공원에서는 경신학교 출신 정재형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3·1 만세운동이 시작된다. 시위대는 몇 갈래로 나누어져 서울 전역으로 행진했고,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모인 사람 중 대다수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수십만 민중의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일제 헌병의 진압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다가 오후 6시 자진해 해산한다.

 3월 1일의 만세운동은 서울을 포함해 전국 7개 도시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근 지역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만세운동은 북부에서 남부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퍼져나간다. 시위는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절정을 이뤄 매일 50~60회에 이르는 시위가 일어날 정도로 폭발적인 양상을 보였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집계 주체와 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0만 명 내외에서 200만 명 가까이에 이르기도 한다.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온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헌병 경찰을 통한 강압적인 통치를 고수해왔던 일제는 만세운동의 폭발적인 확산에 크게 당황한다. 폭력적인 진압과 학살 사건이 수차례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다. 이는 일제에 긍정적이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과 해외 지식인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또한, 한국인들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조선총독부는 이전까지의 무단 통치 방침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문화 통치라 불리는 민족성을 말살하는 방향으로의 정책이 시행된다.

 3·1운동은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이를 한반도 전역과 해외에 알린 자발적인 운동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기미 독립선언서에서는 3·1운동의 원칙으로 비폭력주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동양의 평화 실현을 내세웠다. 이후 3·1운동에 참여했던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이 이런 정신을 계승하는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해외의 다른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다가올 100년을 희망하며

 3·1운동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날, 만세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지난 3월 1일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서 사람들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저마다의 미래를 담아 만세를 외쳤다.

 광화문광장 일대는 이른 아침부터 행사에 참석하려는 인파로 붐볐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1만여 명의 시민들은 크고 작은 태극기를 손에 든 채 행사장으로 향했다. 독립문과 정동 일대에서는 각각 광복군 서명 태극기와 김구 서명 태극기를 앞세운 만세운동 행렬이 시내를 행진해 광화문에 도착했고, 시민들은 광장 가득히 휘날리는 태극기로 이들을 반겼다. 이윽고 광화문이 열리며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5부 요인, 애국지사와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등으로 이뤄진 국민대표 33인이 군경합동의장대와 함께 입장하는 것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의 첫 순서는 독립선언서 낭독이었다. 이날 독립선언서 낭독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발표한 ‘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를 사용했다. 낭독은 동영상을 통해 참여한 사람들과 국민대표 33인이 소절을 나누어 읽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가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이어지는 순서로, 독립유공자 334명에 대한 포상과 문 대통령의 기념사가 있었다. 포상에는 유관순 열사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가 포함되었다.

 시간이 흘러 정오가 되자,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만세삼창을 진행했다. 올해 100세를 맞은 임우철 애국지사의 선창을 따라 광화문광장을 포함한 전국의 행사장에서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기리고, 독립운동의 의미와 희생을 기억하며, 앞으로 다가올 100년에 대한 희망을 담은 외침이었다. 지루하다며 부모님께 칭얼대던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행사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일상의 소음과 각종 단체의 구호로 소란스럽던 광화문광장이 오직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3·1운동의 중심에서 스러지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3·1운동과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이다. 그 상징성과 비폭력, 민주주의 정신을 기리며, 이번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가로 추서되었다.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삶과 의지를 되짚어가며, 그녀의 모교인 이화학당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이화박물관을 방문했다.

 3·1운동이 개시될 당시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었던 유관순은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교령이 내려지자, 그녀는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와 교회와 청신학교를 찾아다니며 천안에서도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한다. 조인원, 김구응 등의 협력을 얻은 유관순은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을 함께 계획하고 수천 명의 민중을 모은다. 그리고 아우내 만세 운동 당일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던 유관순은 일제 헌병에게 체포된다.

 아우내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유관순은 1심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다. 그녀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규탄하며 조선총독부 법률에 따라 재판받는 것은 부당하다며 항소하고, 2심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한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에도 옥중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심한 고문을 받는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영친왕과 일본 황족과의 국혼으로 특사가 이뤄져 형기가 1년 6개월로 줄어들어, 출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2013년 공개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는 수감 중 구타로 인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유관순 열사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는 3·1운동에 있어 그녀가 가지는 상징성, 대표성과 비폭력, 평화, 민주주의, 인권의 가치를 드높였음에 근거를 둔다. 이미 유관순 열사에게 3등급에 해당하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훈 되었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서훈 격상이다. 이는 유관순 열사의 업적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이전의 다른 견해들과 함께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화박물관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유관순 열사와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를 진행한다. 전시관 내에서 유관순 열사의 삶과 정신을 느껴볼 수 있으며,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을 교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에 들어가면, 3·1운동의 배경을 설명하는 영상과 함께 마치 역사 속 한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이 되어 새겨진 의지

 3·1운동 직후 일제는 유관순 열사를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서대문형무소에 가두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의 자유를 향한 열망이, 사무치는 한으로 스며 있는 곳이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건립된 이후 광복 이전까지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이곳에 갇혔다. 유관순 열사는 18살의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이듬해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서대문형무소는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현재는 독립과 민주주의 운동을 기리는 공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정확히 100년이 지난 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끝나지 않은 100년의 외침>이라는 주제로 기념행사가 열렸다. 역사관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사람이 기념행사에 참여했다. 

 

   
▲ (ⓒ이광현 기자)

 기념행사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 플래시몹과 다양한 체험행사 등으로 진행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가슴속으로 자유를 외쳤을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들이 태극기를 흔들었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발자국이 찍혔을 그 땅 위에서 후손들은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헌화했다.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읽으며,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형무소를 둘러보며 100년 전 그 날을 되새겼다. 

 형무소 안 사형장 앞에는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움에 이 나무 앞에서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긴 세월이 지난 후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미루나무를 바라보았다. 자유와 평화, 독립을 뜨겁게 꿈꾸며 눈물 흘렸을 독립운동가의 억눌린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문득 가슴 속에 벅찬 책임감이 느껴졌다. 이 시대와 다음 시대를 위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땅을 밟고 있는 국민으로서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독립을 누리며 살고 있는 후손으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묻혀진 비명을 세상에 알리다

 3·1운동 이전, 일제 헌병들은 민중의 대규모 저항을 맞닥뜨린 경험이 없었다. 결국, 만세 시위에 대한 진압은 폭력적으로 변모했고, 시위대와 헌병 사이 충돌이 잦아졌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시위 진압을 핑계로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벌어진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은 일제의 잔혹한 진압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열기는 3월 말 수원에 전해진다. 3월 21일 동탄면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당시 수원군 전역으로 퍼진 만세운동은 3월 31일 발안 장터 만세 시위까지 이어진다. 일본군은 발안 장터 만세 시위의 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해 나서고, 4월 5일 수촌리 일대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공격한다. 이로 인해 마을 전체 42호 중 38호가 소실되며, 이어지는 검거 작전으로 제암리를 제외한 마을 대부분에서 시위자의 검거가 이뤄진다. 4월 13일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화성 지역에 도착한 일본 육군 아리타 도시오 중위는,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의식 교육과 문화 교육이 이뤄졌던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결정, 15일 11명의 부하를 대동하여 제암리로 향한다.

 제암리에 도착한 아리타 중위는 시위 진압 중 구타한 것에 대해 사과하겠다는 명목으로 제암리 주민 중 성인 남성 20여 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은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아리타 중위는 일제 사격을 지시, 교회 안에 모인 사람들을 학살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지른다. 도망치던 사람이나 불길을 보고 달려온 사람들 또한 살해당했으며, 고주리로 이동해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일가 6명을 죽이기도 했다.

 자칫 잊힐 수도 있었던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은 캐나다의 선교사이자 수의학 교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교수의 손으로 세계에 전해진다.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담아 직접 만든 ‘석호필’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진 스코필드 교수는 3·1운동의 진행을 돕고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을 접한 그는 잿더미가 된 현장을 직접 촬영하였고,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를 통해 이를 국제사회에 전한다. 국제사회의 일제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하였고, 일제는 이를 무마하려 아리타 중위를 군법 재판에 회부하나 끝내 무죄를 선고한다.

 이 외에도 스코필드 교수는 신문에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도 한다. 그는 서대문형무소를 직접 방문하여 고문 여부를 확인하고 조선총독부에 이를 중단할 것을 호소한다. 3·1운동을 직접 보고 느낀 점들을 담은 기행문을 작성하기도 한 스코필드 교수는 해방 이후 독립운동에 미친 공을 인정받아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한다. 1970년 4월 12일 대한민국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순간을 기억하는 여행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 이외에도, 정부 각처와 지역사회가 주도하여 여러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국내외 독립유공자의 발굴 및 선양과 예우 강화를 약속했으며, 100주년 기념주화 및 기념우표도 발행될 예정이다. 또한, 100주년 국제학술포럼과 민주·인권·평화박람회 개최를 통해 3·1운동의 현대적 가치를 정립하고 근현대사를 인권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하는 특집 다큐멘터리, 음악, 영화 등의 문화 방면에서의 투자도 이뤄지고 있다.

 우리 학교가 본원이 위치한 대전에서도 여러 사업이 진행된다. 대전시는 중구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가지를 재정비했으며, 12월 신채호 선생의 탄생일을 전후하여 단재 신채호 동상을 추가 제작해 도심에 배치할 예정이다. 또한, 대전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유성구 유성장터와 동구 인동장터에서는 각각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벌어질 예정이다. 이 외에도 가까운 도시인 세종이나 천안 등에서 독립영화제 등의 문화행사가 개최되기도 한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소개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념행사가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유적지에서 진행된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체험행사부터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 문화 행사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잊고 지내던 많은 가치를 일깨워주는 이런 여행지들을 통해 잠깐의 여행에서도 색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19년, 대한 독립 만세가 처음으로 외쳐진 이후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큰 발전을 이루었고, 동시에 수많은 갈등을 겪었다. 지금, 우리가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에 얽매이거나 맹목적인 증오만을 기억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희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것도 분명 필요하지만, 슬픔에 잠겨있을 필요는 없다. 100년간의 우리를 돌아보며, 독립운동의 정신과 희생이 앞으로의 100년에 어떤 가치를 가질지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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