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인간이 달에 첫 발을 내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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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인간이 달에 첫 발을 내딛다
  • 박종건 기자
  • 승인 2019.03.13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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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은 인류가 달에 첫 발을 내디딘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태초부터 인류가 동경해왔던 달을 탐험하려는 욕망은 공학자, 기술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에게 강렬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인종, 국적, 문화의 장벽을 넘어 인간이 월면에 내딛은 첫발을 지켜보며 전 세계가 숨죽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순수한 동경이 한데 모여 고도화된 결과가 아닐까. 유인 달 탐사 50주년을 맞아, 인간이 달로 향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알아보자.


1960년, 달을 향한 도전이 시작되다

 1957년 7월에서 1958년 12월로 지정된 국제지구관측년을 기념하여,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시기에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것을 선언했다. 이에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 공산당의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던 폴리트뷰로도 바로 다음 주에 인공위성의 제작을 승인하였다. 소련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발사체는 독일이 세계 2차 대전 중 개발한 V-2 로켓을 개량한 R-7 로켓으로, 스푸트니크 로켓이라 이름 붙여졌다. 위성은 자체적으로 자세를 제어하거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능은 없었으며, 간단한 통신만이 가능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1957년 10월 4일 발사가 진행되었고, 위성이 송출한 반복적인 기계음을 통해 담당 엔지니어들은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 세계의 누구나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스푸트니크가 송출하는 기계음을 들을 수 있었다.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는 자유 진영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스푸트니크 충격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소련의 기술력이 미국을 능가하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임을 알게 하였고, 이는 본격적인 우주 경쟁의 출발점이 된다. 이후로도 소련은 연거푸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최초로 우주에 동물과 인간을 쏘아 올리며 최초로 점철된 역사를 써나갔다. 미국은 우주 탐사에 관한 한, 모든 면에서 소련에 뒤처지고 있었다.

 1960년 11월 새로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우주 경쟁에서 앞서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다. 그는 부통령 린든 존슨에게 메모를 보내, 앞으로의 우주 개발 계획에 대해 자문했다. 케네디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우리가 우주로 실험실을 쏘아 올리거나, 달을 한 바퀴 돌아오거나, 달에 착륙하거나, 로켓에 사람을 실어 달로 보낸 뒤 귀환하도록 하면 소련을 이길 수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은 유인 실험실을 쏘아 올리거나 달에 충돌, 착륙할 수 있을 정도의 로켓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달에 안전하게 착륙시킨 뒤 귀환하도록 하는 능력은 아직 양국 모두 가지고 있지 않으며 … (중략) … 큰 노력을 통해 미국은 1966년이나 1967년에는 이러한 임무에서 최초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61년 5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은 국회의 양원 합동 회의에서,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귀환할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상당히 대담한 목표였다. 케네디 대통령도 이 무모한 도전이 정치적 동기에서만 비롯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1962년 텍사스 휴스턴의 라이스 대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도전이 달성하기 쉽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폴로 계획은 단순히 소련을 이기는 것을 넘어, 인류의 도전 정신을 시험하는 역사적 과제였다.


논쟁 끝에 달 궤도 랑데부를 선택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결정이 있고 나서, NASA에서는 어떻게 달에 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의 계획은 직접 도달 방식을 고려하고 있었다. 직접 도달 방식은 말 그대로 달까지 직접 도달하는 것으로 하나의 우주선으로 지구에서 달까지 이동, 착륙한 뒤 다시 귀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직접 도달 방식을 사용하면 우주선의 크기가 상당히 커야 하므로 발사체도 매우 강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5,000~10,000t 정도의 추진력을 내는 ‘노바(Nova)’ 로켓의 개발이 필요한데, 이는 당시 로켓 개발 기술의 한계에 도전해야 하는 일이었다.

 강력한 발사체의 개발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 요원한 가운데, 지구 궤도 랑데부(Earth Orbit Rendezvous)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지구 궤도 랑데부는 우주선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발사한 뒤, 지구 궤도 상에서 조립한 후 달로 출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노바 로켓과 같은 강력한 발사체가 요구되지는 않았지만, 지구 궤도에서 두 개 이상의 우주선을 랑데부 및 도킹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넓은 지구 상공에서 두 우주선의 궤도를 정확히 일치시키고 서로 접근하여 결합하는 과정은 그 당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직접 도달 방식이 주로 고려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방식이 바로 달 궤도 랑데부(Lunar Orbit Rendezvous)다. 보우트 사의 엔지니어였던 톰 돌란은 달 궤도 랑데부라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달 궤도 랑데부에서는 우주선이 사령선과 달 착륙선으로 나뉘지만, 지구에서는 두 우주선이 하나의 발사체로 함께 발사되어 달까지 도달한다. 그 후 달 궤도에 진입하면 둘은 분리되어 달 착륙선만이 달 표면에 착륙하게 된다. 달 착륙선은 상승부와 하강부로 나뉘는데, 다시 달 궤도로 복귀할 때는 하강부를 달 표면에 남겨둔 채 상승부만이 달 궤도에서 사령선과 결합한다. 이후 상승부에 탑승한 우주비행사들이 사령선으로 이동하면, 상승부는 분리해서 달 궤도에 남겨두고, 사령선만이 달 궤도를 벗어나 지구로 돌아온다.

 달 궤도 랑데부는 달 궤도에서의 랑데부와 도킹이 요구되는 단점이 있지만, 여러 가지 장점도 있다. 먼저 임무를 수행하며 우주선의 불필요한 부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우주선을 사용할 때보다 우주선이 더 가벼워진다. 따라서 발사체도 직접 도달 방식에서만큼 강력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주선의 기능이 서로 분리되므로 달 착륙선을 좀 더 목적에 맞는 형태로 제작할 수 있고, 두 개의 우주선이 각각의 생명 유지 장치를 가지기 때문에 유사시에 대피 수단이 생긴다는 장점도 있다.

 NASA 랭글리 연구센터의 존 후볼트는 직접 도달 방식으로는 10년 안으로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없게 될 것을 깨닫고, 달 궤도 랑데부의 채택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몇 안 되는 엔지니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당시 NASA의 국장이었던 로버트 시먼스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에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는 직접 가는 방식과 랑데부를 하는 방식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 (중략) … 달 궤도 랑데부는 남은 몇 년의 기간 안에 달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미 랑데부와 도킹에 대해 여러 연구를 수행한 바 있는 그는, 달 궤도 랑데부만이 가능성 있는 해결책임을 알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62년 6월 7일, NASA는 달 궤도 랑데부를 채택하기로 하였다.

 결국 실제 아폴로 계획에 사용된 것은 달 궤도 랑데부이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보았을, 그래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달 착륙선의 모습은 어디를 살펴보아도 맵시가 유선형인 곳이 없고, 마치 거미가 다리를 네 개만 뻗은 듯한 모양이다. 이런 괴이한 모습 또한 달 궤도 랑데부가 채택되어 착륙에 유리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제미니 계획, 달로 향하기 위한 준비

 그러나 달 궤도 랑데부를 실현하려면 랑데부와 도킹 기술을 확보해야 했다. 머큐리 계획을 통해 유인 우주 비행의 기본을 연마한 미국은, 제미니 계획을 통해 우주 비행의 기술을 확보하기로 하였다. 그 기술에는 두 우주선의 랑데부와 도킹을 비롯하여 우주에서의 장기 체류, 우주인의 선외 활동 등이 있었다. 아폴로 계획의 전 단계로 마련된 제미니 계획은 10번의 유인 임무를 통해 목표를 충실히 달성하였다.

 먼저 제미니 4호의 에드 화이트가 미국 최초로 우주복을 입고 선외 활동을 하였다. 그가 세계 최초가 아니었던 이유는 1965년 3월 18일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이미 우주 유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제미니 4호는 같은 해 6월에 발사됐다.

 제미니 8호는 제미니 6호와 7호가 최초의 랑데부를 성공한 것에 이어, 미리 지구 궤도를 돌고 있던 아제나 목표 선체(Agena Target Vehicle)와의 도킹에 성공했다. 하지만 도킹 직후 제미니 우주선의 궤도 조종 추진기 중 하나에 결함이 생겨 우주선이 계속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우주비행사들은 재빨리 도킹 된 우주선을 분리했지만, 도리어 회전 속도가 빨라지기에 이르렀다. 우주선이 초당 한 바퀴 가까이 회전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사령관이었던 닐 암스트롱은 기지를 발휘하여 재진입 조종 추진기로 회전을 멈출 수 있었고, 제미니 8호는 지구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NASA는 임무 중 발생하는 사고에 대한 조사 방침과 절차를 마련하였다. 이는 나중에 발생하게 될 사고들에 대해서도 면밀한 조사를 진행하고 적절한 조처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제미니 계획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발판 삼아, 비로소 달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희생과 아픔을 뒤로 한 채 나아가다

 아폴로 우주선은 달 궤도 랑데부 방식에서 제안된 것처럼 사령선과 달 착륙선으로 이루어졌고, 새턴 V 로켓으로 발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68년에도 달 착륙선과 새턴 V 로켓은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아폴로 1호는 지구 궤도에서 새로 만들어진 사령선을 시험하는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으며, 발사체는 새턴 IB 로켓으로 정해졌다. 이미 사령선과 새턴 IB 로켓의 무인 실험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고, 드디어 처음으로 새로운 우주선에 인간이 탑승할 차례였다. 아폴로 계획의 첫 유인 임무는 1967년 2월 21일 시작될 예정이었다.

 1월 27일, 우주선에 탑승한 아폴로 1호의 세 우주비행사는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의 발사대에서 점검을 진행하고 있었다. 외부에서의 전력 공급 없이도 우주선이 자체 시스템으로 잘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점검이었다. 그들은 사령선의 해치를 닫고 가상의 발사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통신 시스템이 말썽이었다. 통신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카운트다운이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선내에서 화염이 일고 있다는 보고가 들려왔고, 우주비행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며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무전이 끊겼다. 사령선의 대기는 대기압보다 높은 압력의 순수한 산소로 채워졌고, 해치는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 긴급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령선 내부에는 가연성 물질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화염은 빠른 속도로 우주선 전체를 집어삼켰다.

 아폴로 1호의 참사로 인해 아폴로 계획 전체가 중단되었고, 대대적인 안전 점검이 이루어졌다. 선내 대기는 대기압의 질소와 산소 혼합 기체를 주입하여 일반적인 공기와 비슷한 조건으로 바꾸었고, 해치도 바깥쪽으로 여는 방식으로 교체되었다. 모든 배관과 전선은 불연성 물질로 뒤덮었고, 가연성 물질은 모두 불이 붙어도 스스로 꺼지는 자기 소화성 물질로 교체되었다. 우주복의 재질도 불에 타지 않는 소재로 모두 교체하였다. 제미니 8호 때 마련된 사고 대응 절차가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훗날 아폴로 13호는 달로 향하던 중 선체의 산소 탱크가 폭발했다. 승무원들이 생과 사를 오가는 고군분투를 벌일 동안 다행히 폭발로 인한 2차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세 명의 우주비행사들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아폴로 1호에서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던 셈이다.

 사고 조사와 후속 대응이 모두 끝난 뒤에도,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사이 달 착륙선과 새턴 V 로켓의 개발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희생된 우주비행사들을 위해 참사 당시의 우주선을 아폴로 1호, 그 전의 무인 발사를 2호와 3호로 정했다. 아폴로 4호부터 NASA는 다시 달에 갈 준비를 했다. 아폴로 4호에서 10호는, 본격적인 달 착륙을 준비하는 예행 단계로, 새턴 V 로켓과 사령선이 차례로 시험 되었다. 하지만 달 착륙선의 개발이 그때까지도 완료되지 않아, 원래 지구 궤도에서 사령선과 달 착륙선을 시험할 예정이었던 아폴로 8호가 임무를 수행하기 곤란하게 된다. 지구 궤도에서 사령선만을 실험하는 임무는 아폴로 7호가 이미 수행했기 때문에, NASA는 아폴로 8호를 달로 보내기로 한다. 더구나 미국을 쫓아 달 탐사를 계획하고 있던 소련이 9월에 이미 우주선에 거북이를 태우고 달을 공전한 뒤 귀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하여 출발했다. 급하게 임무가 변경되어 달로 가게 된,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류 최초로 지구 저궤도를 벗어나 심우주로 나아갔으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달 궤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진행된 TV 중계에서 낭독한 창세기는 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세계 곳곳에서 무력시위가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평화를 울부짖었던 1968년, 아폴로 8호는 한 해의 끝을 장식하는 완벽한 우주 쇼였다.


마침내 달 표면에 착륙한 아폴로 11호

 아폴로 8호를 뒤이은 아폴로 9호는, 마침내 달 탐사선을 싣고 지구 궤도를 비행했다. 아폴로 10호는 이를 달까지 몰고 갔다 왔다. 사령선 조종사는 사령선을 타고 달 궤도에 머물고, 사령관과 달 착륙선 조종사만이 달 착륙선을 타고 달 표면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달 착륙이 시작되기 전인 고도 15.6km에서 그들은 다시 복귀해야 했다. 최초로 달을 밟고 싶은 흥분에 젖어 우주비행사들이 무단으로 달 표면까지 내려갈 것을 우려한 NASA에서 연료를 가득 채워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임무를 무시하고 달 표면에 착륙했다면,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인간은 안타깝게도 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폴로 10호는 최초의 달 착륙을 위한 마지막 예행연습이었다.

 아폴로 10호가 무사히 귀환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인류 최초의 달 착륙뿐이었다. 1960년대가 끝나기까지 6개월 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NASA는 케네디 대통령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 번의 기회를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7월에 발사될 아폴로 11호가 실패하면 9월에 12호, 11월에 13호가 도전할 예정이었다. 세 개의 팀이 동시에 달 착륙을 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아폴로 11호는 1969년 7월 16일 발사되어 7월 20일 달 착륙선인 이글호가 달 표면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착륙 세 시간 뒤 닐 암스트롱이 사다리를 타고 달 착륙선에서 내려왔고,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달에서의 첫 마디를 내뱉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뒤따라 내려온 에드윈 올드린과 함께 그는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았다. 달을 향한 길고도 험한 여정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비록 한 번의 시도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아폴로 11호 이후에도 인간은 다섯 번이나 달에 착륙했다. 그들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던 일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특히 아폴로 15호부터 이용된 월면차는 공학자들의 집념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이었다. 차 한 대를 달 착륙선의 트렁크에 온전히 집어넣기 위해 그들은 차체와 바퀴가 접히도록 했다. 월면차로 우주비행사들은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월석은 300kg이 넘었고, 개중에는 생성 연대가 41억 년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이들은 달이 원시 지구와 화성 크기의 행성의 충돌로 생성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해 주는 등 과학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아폴로 20호까지 예정되어 있던 달 탐사 계획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예산 부족으로 17호까지만 진행되었다. 아폴로 17호의 사령관이었던 유진 서넌은 마지막으로 달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 (전략) 우리는 우리가 왔던 것처럼 다시 떠나지만, 인류의 평화와 희망을 담고,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1972년 12월 13일이었다.


 아폴로 계획은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미국의 뛰어난 기술력으로 일구어낸 실패 없는 성공처럼 보이지만 그 여정에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달에 가고자 하는 열망이 깃들어 있었다. 여러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계획이기도 했지만 가장 깊은 내면에는 결국 인간을 다른 세계로 보내고자 했던 도전 정신이 있었고, 이들이 이루어져 만들어낸 위대한 성과였다. 50년이 지난 지금, 1969년의 간절했던 염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참고문헌 | <달 탐험의 역사: 스푸트니크 충격부터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까지>, 이상원, 성우   <로켓 이야기>, 채연석, 승산

감수 |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채연석 교수   KAIST 항공우주공학과 탁민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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