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은 소년 기자 땡땡과 하얀 강아지 밀루가 보물 지도를 찾기 위해 승선한다. <인디아나 존스>의 모델이 된 땡땡과 밀루는 세계를 누비는 모험가이다. 식을 줄 모르는 인기로 만화 <땡땡의 모험>이 어느새 탄생 90주년을 맞았다. 1929년에 에르제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만화가 조르주 레미에 의해 탄생한 <땡땡의 모험(The Adventures of Tintin)>은 총 24권의 책으로 출판되어 세계 각국에서 약 5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60여 개국에서 3억 부 이상 팔렸다. 유럽 가정의 과반수가 <땡땡의 모험>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땡땡과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땡땡의 전설은 잡지 한구석의 만화에서 시작되었다.

 

소년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땡땡의 모험>은 1929년 에르제가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 <20세기 소년>에 처음 연재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흥미롭게도 에르제 본인과 그의 주인공 땡땡은 많이 닮아있다. 전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문화를 습득하는 땡땡처럼, 에르제는 1921년 브뤼셀의 보이스카우트에 입단해 ‘호기심 많은 여우’라는 별명을 얻으며 많은 경험을 했다. 그의 사교성과 풍부한 유머 감각도 땡땡과 닮았다.

 에르제는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유년기에 독서를 즐겼던 그는 무성 영화, 흑백 필름, 독일 표현주의를 공부한 후 발상, 표현을 포함한 다양한 기법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영화 연출이나 소설 창작에 사용되는 기법이 적용되어 있으며, 나아가 그만의 독창적인 기술이 응용되어 있다. <땡땡의 모험>은 분명하고 간결한 외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명료한 선(Clear Line) 양식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에르제는 그림을 더욱 선명히 보이게 하려고 명암을 넣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작업 과정에서는 연필 스케치 단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 단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고 한다.

 에르제의 작품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세련된 풍자와 깊은 정치, 문화적 관점을 보인다. 이를 증명하듯 연재 후반부의 <땡땡의 모험>은 사회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달라이 라마 땐진갸초는 <티베트에 간 땡땡>이 티베트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낸 데에 감사를 표했다.

 1940년, 독일 군대가 벨기에를 점령하자 <땡땡의 모험>을 연재하던 잡지사 ‘20세기 소년’이 문을 닫았다. 그 후 에르제는 브뤼셀의 일간지 <르 수아르>에 후속편을 연재하지만, 해당 신문이 독일 점령군의 대변지였다는 이유로 해방 이후 심문을 받는다. 혼돈의 시기였지만, 작품 활동에 몰두한 에르제는 만화가로서 성공적인 도약을 한다. <땡땡의 모험> 시리즈의 <황금 집게발이 달린 게>에는 아독 선장이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전에 작업했던 흑백 원고에 색을 입히며 깔끔한 톤을 만들어냈다.

 <땡땡의 모험>은 1953년과 1954년에 <달 탐험 계획>, <달나라에 간 땡땡>이 출간되면서 새로운 장을 맞이한다. 에르제는 땡땡이 보게 될 우주가 최대한 현실적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알렉상드르 아나노프, 베르나르 외벨망 등 과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하였다. <달 탐험 계획>에 등장하는 해바라기 박사의 ‘X-FLC 6’은 로켓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이 독일과 협력해 제작한 ‘V-2’로켓을 참고하여 설계되었다. 에르제는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양의 고증과 작업이 필요해지자 에르제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보조 작가를 고용하는 등 작업 규모를 확장했다. 두 시리즈에서는 로켓의 내부 구조와 달 표면의 모습과 우주에서의 생활이 자세히 묘사되는데,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착륙하기에 16년 앞선 시기임에도 실제 모습과 유사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에르제는 만화가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에르제는 1960년대 초에 화가 루이스 반 린트에게 만화가 아닌 회화를 배웠다. 이 시기의 작품에 등장하는 회화적인 기법은 명료한 선 양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당시 자신의 회화 작품들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그의 회화는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다. 필립 고댕은 에르제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아마추어 화가라 여기며 겸손함을 유지했고, 만화와 회화의 표현 방식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만화를 선택했다고 회상했다. 에르제는 1971년 누마 사둘과 나눈 대담에서 땡땡을 포기하고 회화를 할 수 있었지만, 그의 캐릭터들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1970년대 말, 에르제는 땡땡의 마지막 모험을 구상한다. 투병 생활 중 그리기 시작한 원고의 제목은 <땡땡과 알프아르>이다. 에르제는 예술품 수집가였던 본인에게 익숙한 미술상의 세계를 땡땡 시리즈에 접목하고자 했다. 위조 작품을 사들이는 사기꾼과 대결하는 땡땡의 모험이 담긴 이야기는 땡땡이 그림 위조단에게 붙잡혀 산 채로 조각상이 될 위기에 처한 채 멈춘다. 원고가 완성되기 전 에르제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미완성 스토리보드로만 남아있는 작품이지만, 땡땡이 완성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땡땡을 사랑하는 사람들

 에르제만큼이나 땡땡을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땡땡의 모험>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작품을 공부하는 이들은 ‘땡땡주의자(Tintinologist)’라 불린다. 땡땡주의자들은 단순히 땡땡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작품의 설정이나 등장인물, 작가에 대해 연구한다. <땡땡의 모험> 시리즈별로 이야기의 배경, 발행 일시 및 번역된 국가 목록 등을 정리한 자료를 온라인에서 공유하기도 한다. 땡땡주의자 홈페이지에서 열리는 온라인 포럼에서는 땡땡과 관련된 주제로 열띤 토론이 펼쳐진다.

유명인 중에도 땡땡주의자가 여럿 있다. 프랑스의 샤를 드 골 전 대통령은 취임식 때 “나의 유일한 맞수는 땡땡이다. 그는 거인에 맞서는 소인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땡땡의 팬이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땡땡의 팬으로서 영화 판권 구매를 희망했고, 2011년, 역시 땡땡주의자인 피터 잭슨과 함께 영화 <땡땡: 유니콘 호의 비밀>을 제작했다. 영화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에르제의 그림체를 보존하며 생생한 느낌을 구현하기 위한 스필버그의 결정이었다.

 땡땡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력 있는 캐릭터였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의 표현력이나 강렬한 선 등을 탐구하여 만화의 특징을 살린 작품을 제작했다. 리히텐슈타인 자신이 에르제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밝혔으며, 땡땡을 재해석한 오마주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앤디 워홀은 에르제가 1972년이 되어서야 그를 처음 만났지만, 애니메이터 월트 디즈니보다 에르제가 자신에게 준 영감이 크다고 평할 정도로 열정적인 팬이었다. 워홀을 사로잡은 것은 에르제의 명료한 선과 색감이었다. 1977년 유럽을 방문한 앤디 워홀은 에르제를 그린 초상화를 직접 선물하기도 했는데, 에르제는 이 작품을 <땡땡의 모험>을 위한 광고에 사용했다. 


 에르제는 1983년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유럽 전역이 만화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명 일간지들 1면에 그의 죽음이 보도될 정도로 에르제의 별세는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에르제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어떤 이에게 위로였고,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었고, 사회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장이었다. 벨기에 우주 항공국은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에 에르제의 이름을 붙였고, 브뤼셀 스토켈 지하철역에는 <땡땡의 모험> 속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다.‘유럽 만화의 아버지’답게 프랑스 국립 만화 센터에는 그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에르제가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그와 땡땡이 삶에 가져온 다채로운 색을 기억한다. <땡땡의 모험>은 더는 연재되지 않겠지만, 에르제와 땡땡을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땡땡의 모험은 끝나지 않는다.


 

참고문헌 | 

<The Art of Herge, Inventor of Tintin>, Philippe Goddin, San Francisco: Last Gasp.

<Herge: Son of Tintin>, Benoit Peeter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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