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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대리인, 삭막한 일상을 색칠하다.
[457호] 2019년 02월 12일 (화) 류제승 기자 ryjs9810@kaist.ac.kr

 소비 시장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기체와 같다. 소비자들은 더 트렌디하고 가치 있는 소비를 원한다. 가성비(價性比)를 넘어 가심비(價心比)를 따지고, 현명한 소비 이상의 행복한 소비를 추구한다.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에 따라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은 기업의 필수 과제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트렌드 코리아 2019>를 통해 2019년 한 해의 시장을 이끌어나갈 키워드 10가지를 발표했다. 이 기사에서는 그중 한 키워드인‘감정대리인’에 대해 깊게 알아보자.


감정대리인, 내 감정을 부탁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온 세상을 둘러볼 수 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온라인으로 옮겨진 생활 공간은 무인 포스기와 같은 언택트(Untact) 기술의 발전과 함께 소비 시장에서 사람의 역할을 줄여나갔다. 화면만 켜면 엄청난 양의 정보와 그에 따른 감정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과도한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은 가짜 정보와 만들어진 감정 사이에서 어느 하나도 확신하지 못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감정표현 방식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자신의 진짜 감정을 털어놓을 곳을 찾는다. 바야흐로 결정장애의 시대, 감정대행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감정대리인은 삶에 필수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을 사람들 대신 느끼고, 표현하며, 관리해주는 콘텐츠들을 말한다. 사람들은 바쁘고 힘든 일상 때문에, 또는 표현에 서툴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감정을 감정대리인에게 외주한다. 스스로 상황에 뛰어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필요한 교류 대신 언제든 원하는 감정을 꺼내 즐길 수 있는 감정대리인을 찾는다.

 감정대리인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감정대행인’은 세세한 표현과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사람들을 몰입하게 해 감정을 대신 느껴준다. 사람들은 감정대행인을 통해 마치 본인의 이야기인 것 같은 설렘, 통쾌함, 즐거움을 얻는다. ‘감정대변인’은 본인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역할의 감정대리인을 말한다. 이는 새로운 감정표현방식임과 동시에 감정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수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감정관리인’은 개인의 상황에 맞는 감정을 찾아내어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감정관리인은 소비자들이 감정에 기반해서 더욱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원하는 감정만 골라 소비하는 사회

 감정대리인의 등장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큰 연관성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받아들이는 정보 대부분은 감정을 동반한다. 현대의 정보 과잉은 필연적으로 감정 과잉의 시대를 불러왔다. 이를 모두 받아들이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필요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 한다. 외부로부터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감정들은 너무 격하지도,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은 감정의 골디락스를 유지하게 한다. 쉽게 공감하고 빠르게 잊어버리면서 마치 한입 크기의 간식처럼 꾸며진 감정을 소비한다.

 감정 콘텐츠의 선택적인 수용은 부정적인 감정의 도태를 불러왔다. 슬픔이나 분노뿐 아니라 불편, 부담, 동정 등의 표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사람을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SNS 세상에서 타인을 만나면서 깊이 있는 감정 교류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얕아진 감정의 호수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 깊게 공감하지 않는다. 그렇게 억눌려온 개인의 감정들은 감정대리인을 통해 표출되곤 했다.


감정을 글로 배우는 사람들

 감정은 본능이지만, 모든 이에게 같지는 않다. 감정에 대한 최신 이론인 ‘구성된 감정 이론’에서는, 감정을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아닌 성장 과정에서 습득하는 일종의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부모와의 유대, 친구와의 인간관계, 성장하면서 보고 배운 모든 일이 한 사람의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공통된 가치를 공유하며 감정표현 방법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사람들이 감정을 배우는 방법도 달라지고 있다. 특히, 태어나면서부터 화면 속 세상을 마주한 젊은 세대, 디지털 원주민들은 감정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표정이나 목소리가 필요 없는 메신저로 소통하고, 불편한 접촉은 모두 피한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게임 속에서 타인을 무시한 채 놀기도 한다. 말과 행동, 표정과 분위기로 표현되는 다각적인 반응을 접하지 못하기에 감정의 폭이 좁아지는 것이다.

 정보 과잉의 시대가 디지털 원주민을 만나면 문제가 더 크게 드러난다. 흔히 결정장애라 말하는 ‘햄릿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물건의 구매 여부 이전에 자신이 그것을 정말 사고 싶어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외에도 타인의 긍정적인 면만 접할 수 있는 SNS 세상은 부정적인 감정을 거부하고 억압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들은 감정대리인을 통해 타인에게 이입하고 자신과 비교하며 필수적인 감정들을 배우기도 한다.


대리만족과 감정대행의 문화

 살다 보면 우리는 가끔 ‘사이다’를 원한다. 시원한 탄산음료처럼 통쾌하고 짜릿한 감정은 답답한 현실을 버텨내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억눌린 부정적인 감정을 한 번에 해소해줄 사이다를 누구나 꿈꾸지만, 그 후폭풍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지 못했던 말들, 참아야 했던 불만들을 대신 표출해주는 감정대행인을 찾아서 일상 속 답답하고 불편한 상황을 콕 집어내 일침을 놓는다. 감정대행인을 통해, 사람들은 타인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얼마든지 비겁하고, 지질하며, 예민해질 수 있다.

 감정대행은 ‘먹방’이나 ‘명품 하울(Haul)’과 같은 콘텐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이어트 때문에, 또는 가격 때문에 참아야 했던 맛있는 음식과 비싼 명품들이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방송인은 시청자들의 소비 욕구를 대신 해소하며 만족감을 준다.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풍경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시청자들은 영상 속 비싼 물건들을 벅찬 얼굴로 개봉하는 방송인의 모습에서 대리만족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감정대행의 역할을 하는 데는 몰입과 공감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콘텐츠 제작자들은 시청자들의 몰입을 위해 상세한 요소 하나까지 조명하려고 노력한다. 모바일 환경에 맞게 만들어진 꽉 찬 화면 구성도 강한 몰입에 일조한다. 또한, 가격이나 브랜드 같은 가치보다 자신만의 감상과 감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시청자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할 법한 이야기를 구성하며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어느새,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이 영상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타인을 통한 새로운 감정표현의 수단

 감정대변인 유형은 타인을 통한 자신의 감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나 직접적인 제스처 대신 이모티콘과 프로필을 통해 현재 자신의 감정을 공유한다. 은은히 빛나는 네온사인 감성 글귀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사람들은 감정대변인을 내세워 직접 말하기 부담스러운 감정을 다른 이에게 알린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액자형 관찰 예능 또한 감정대변인의 좋은 사례다. <나 혼자 산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하트시그널>과 같은 액자형 관찰 예능에는 출연자와 시청자 사이에 패널들이 존재한다. 패널들은 출연자들의 영상을 보며 즐기고, 슬퍼하고, 설레어 한다. 또한, 출연자들의 상황과 감정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이해하려 한다. 시청자들의 감정적 경험은 패널들을 통해 보완되며 더욱 풍부해진다.

 디지털 원주민 세대에게 감정대변인은 다양한 감정을 배울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감정표현에 서툰 사람들은 패널들의 풍부한 반응과 자신의 감정을 비교한다. 그들의 감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인정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연애를 글로, 이제는 영상으로도 배우며 연애 감정과 다양한 표현들을 접한다. 생생한 간접 경험은 인간관계에서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생소한 감정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나만을 위한 맞춤형 감정의 등장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나 모든 감정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또한, 상황에 맞는 감정을 불러내는 것은 더 풍부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고 감정을 통한 색다른 감정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감정관리인의 역할이다.

 감정관리인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감성 큐레이션을 들 수 있다. 개인의 상황이나 성향에 맞는 상품을 제공하는 일반적인 큐레이션과는 다르게, 감성 큐레이션은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내는 것으로 더 높은 수준의 소비를 유도한다. 제품의 성능 이상으로 심적 만족도를 따지는 현대의 소비자들에게 감성 큐레이터는 구체적인 상황과 이에 수반하는 감정을 제공한다.

 개인의 감정을 조절하고 소소한 공감을 끌어내는 감정 관리 산업은 ‘힐링’을 찾는 소비 세대와 맞물려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갈 곳 없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따뜻한 책 한 권으로 위로하고, 매일 아침 다른 분위기의 음악과 조명으로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감정관리인들은 개인에게 꼭 맞는 맞춤 감정을 제공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의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개념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에도 그 사람들의 수만큼 정의와 설명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람의 감정을 예측하고 다루는 일은 매우 어렵다. 감정대리인의 핵심은 개인의 감정을 섣불리 단정짓지 않고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공감을 자아내는 데 있다. 감정대리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재탄생한 감정들은, 마치 형형색색의 물감처럼 그들의 삶을 칠해줄 것이다.


참고문헌 | <트렌드 코리아 2019>, 김난도 외 8명, 미래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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