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는 주관적이며, 세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없다. 어떤 행위의 당위를 묻는다면, 보편의 답은 없다. 세계는 숭고하지 않으며, 인간은 존엄하지 않다. 다만 주관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행위의 개인적 목적, 이유는 존재한다. 세계를 숭고하게 보는 시선, 인간을 존엄하게 보는 시선, 모든 시선이 가능하다. 한편, 세계에는 수많은 행위가 있다. 호흡, 이동, 수면, 섭취, 대화, 경쟁, 교육 등 끝없이 나열되지만, 어떤 행위도 객관적인 가치를 향유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행위 앞에 어떤 주술적인 힘의 작용은 없었다.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객관 일반의 가치를 찾는 노력이 허무할 뿐이다. 물론 객관적 가치를 찾는 행위의 주관적 가치마저 부정될 수는 없다.

 즉, 어떤 행위의 객관 일반 가치 추구는 모든 객체가 당면한 과제가 아니다. 행동의 객관 가치를 납득하고자 괴로워한다면, 그리고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면 할 필요가 없다.


 카이스트신문을 포함한 신문을 만드는 모든 이들을 예시로 들어보자. 카이스트신문의 구성원은 모두 기자이다. 기자는 기자 행위를 한다. 기자 행위는 회의, 취재, 자료 수집, 기사 작성, 면 편집, 교열이다. 기자는 신문을 발행한다. 다수의 기자는 자신의 기자 행위가 객관 가치를 가지는지 질문하곤 한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기는 어렵다. 특히, 카이스트신문의 경우 독자가 적기 때문에 더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문 발행에 관한 가치 판단 당위가 없다. 기자가 되기를 선택했으며 맞는 일을 할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목적, 이유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문을 만든다. 예를 들어, 김선규 기자는 카이스트신문에서의 신문 제작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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