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저작 <논리 철학 논고>가 탈고된 지 100주년이 되었다. 20세기에 등장한 천재 비트겐슈타인은 몇 권의 난해한 저작을 내놓으며 현대 철학을 거세게 뒤흔든다. 그는 새로운 생각으로 철학의 문제를 재해석하고, 앞으로 극복할 과제를 남겼다. 한편, 철학적 행보만큼 매력적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시, 영화, 소설 등 수없이 많은 형태로 남아 우리의 곁에 남아있다.‘왜 그가 천재로 불리는지, 그의 철학이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그의 무엇이 그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드는지’곳곳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은 비트겐슈타인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1. 논리 철학 논고 이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51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문화적, 학문적으로 격변하는 유럽 위에 놓여 있었다.

 어린 비트겐슈타인은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다. 음악적 재능을 가졌으나 맏형 한스의 천재성에 비견할 바는 아니었다. 또한, 집안의 분위기에 맞춰 기술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높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다. 어린 그는 반항하지 않았고 고집스럽게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평범하고 순종적인 소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며,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조금씩 변했다.

 오토 바이닝거는 소년의 변화에 도화선이 되었다. 오토 바이닝거는 저서 <성과 성격>을 완성하고, ‘천재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사상을 남기며 자살했다. 순식간에 빈의 화제가 된 이 사건은 비트겐슈타인의 정신을 관통하였다. 비트겐슈타인도 바이닝거와 자살하던 많은 사람들을 따라 자살을 결심하지만 실행하지 않았다.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때부터 자신의 천재성 실현을 비정상적으로 갈구했다. 1908년, 방황하던 그의 재능은 아직 꽃피지 않았고,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공학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러셀의 저작 <수학의 원리>을 접하고 철학에 빠져들었다. 그는 러셀의 저서에 큰 흥미를 느꼈고 저서의 역설을 해결하는 것에 몰두하였다. 1911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향한 열정을 확신하며 철학자 프레게를 찾아갔다. 러셀에게 배울 것을 권유받은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 도착하게 되며, 천재성은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다. 러셀은 그와의 끊임없는 논쟁 속에서 그의 철학적 재능을 발견하였다. “가장 전통적인 천재관에 부합되는,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의 예였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을 두고 한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인정을 통해 삶의 의지를 얻었지만, 러셀과의 의견 충돌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러셀은 한때 모든 철학의 문제를 기호와 논리로 환원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미 초심을 잃고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뒤를 이어, 논리적 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확장하려 했다. 극명한 의견 차이 아래 그들은 단절되었고, 그들의 세기적 만남을 성사시킨 논리학에 관해서도 토론하지 않았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독자적인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2. 제1차 세계 대전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

 비트겐슈타인은 병적으로 논리와 명확성을 추구했다. 그는 모호한 문제를 논리 체계에 도입하면 명확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논리학의 명제가 무엇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는 참인 명제, 거짓인 명제, 둘 중 아무것도 아닌 명제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다면, 논리학의 명제를 하나의 원초적 명제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위한 기호 체계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이 체계의 실현은 그에게 명확한 세계, 문제, 명제, 현상의 실현이었다.

 사색을 거듭하던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현실에 처했다. 그는 지원병으로 입대해 전쟁터에 나섰다. 그는 전쟁 때문에 고립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편지로 대화하고 그들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속에서 자기 생각을 가다듬었고,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침묵하였다. 그는 1914~1916년의 기간 동안, 언어가 세계를 그리는 방법과 이 방법을 가능하게 하는 특징에 대해 다룬 논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세계가 사물이 아닌 사실의 관계라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원자 명제, 원자 사실로의 환원을 담은 글을 썼다. 이 글을 바탕으로, 5년간의 전쟁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이하 <논고>)의 원고를 완성했다. <논고>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이 아포리즘의 형태로 담겨있다. 이 책은 명제의 논리적 구조와 논리적 추리의 성질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해, 지식론, 물리학의 원리, 윤리학, 종교 등을 논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에서 ‘원소의 역설’ 문제를 해소한다. 원소의 역설이란 개체의 양면성의 문제에서 유발된다. 모든 개체는 하나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여러 개체의 합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체의 양면성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개체가 결국 복합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복합체를 구성하는 궁극적 원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개체의 양면성 문제는 궁극적 원소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냐는 문제와 연결된다. 플라톤은 원소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형상’이라는 원소를 도입하였다. ‘형상’은 모두 본질(physis)과 결합 가능성(dynamis)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상은 궁극적이지만 다른 형상을 배척하지 않고 결합한다. 그러나 이 경우, 단순함과 복잡함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궁극적 원소를 얻으려는 노력은 무산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속성의 의존적 대상을 원소로 내세우는 사실존재론을 도입한다. 그에게 있어, 명제는 사태의 그림이고, 명제의 이름에 사태 속의 대상이 대응된다. 그는 사실존재론을 통해 존재론적 세계와 논리적 세계를 구분하는 동시에 연결 지었다. 이 구분을 통해 원소의 역설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세계 속의 원자 사실(사태)은 존재론적 원자이며, 사태 속의 대상이 논리적 원자이다. 언제나 명제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대상은 다른 대상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적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동시에, 상호 의존적인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은 결합 가능성을 가진 궁극적 원소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며, 세계의 형식이 된다.

 그의 문제의식은 원소의 역설을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사고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는 언어와 세계의 관련성을 찾으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대화하면서 서로 관찰하고 이해한 세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존재론적 원자인 원자 사실들의 총체로 보았다. 따라서 언어가 세계의 반영이라면, 명제는 사실의 그림이 된다. 동시에 원자 명제는 원자 사실과 대응되며, 복합 명제는 원자 사실들의 종합인 복합 사실과 대응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에 의해, 참인 명제, 거짓인 명제, 무의미한 명제로의 분류 방법이 만들어진다. 명제를 원자로 나눠, 모든 원자 명제가 사태에 대응되면 참, 반대되면 거짓, 사태에 전혀 대응될 수 없다면 무의미하다고 판정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판정법을 내세워, 이전의 철학의 명제들이 무의미한 명제에 속하기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며, <논고>의 대부분의 명제 또한 무의미함을 인정한다. <논고>는 세계 내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나누었으며, 세계에 대한 의미 있는 이해의 한계가 언어(명제)의 한계, 더 나아가 인간 사고의 한계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비트겐슈타인은 <논고>가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소박한 삶을 원해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을 전전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학부모, 교사들과 끊임없이 불화가 있었고, 교사 생활은 1926년에 끝난다.

 그는 1929년 케임브리지 복귀를 시작으로 다시 철학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논고>의 핵심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탐구>는 <논고>의 언어관에서 벗어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소개하였지만, 그는 <탐구>에서 일반성에 대한 집착을 제쳐둔 채 언어의 문제를 다룬다. <논고>가 그림 이론이라면, <탐구>는 언어 게임이론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전환에는 명제의 유일성에 대한 회의가 담겨있다. 그는 하나의 명제는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일반적 대화에서 언어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뜻을 담을 수 있다. 따라서 명제와 사실 사이의 일대일 대응 방식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이 문제 앞에서, 그는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언어의 사용 방법을 추구하는 대신 일상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다. 인간의 대화를 살펴보면, 대화의 구성원은 각자 주관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객관적인 정보를 다루는 듯이 보인다. 이는 언어 사용에 있어서 규칙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 사용 구성원은 어떤 어휘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음과 없음에 대한 규칙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 규칙에 의해서 어휘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 의미는 <논고>에서처럼 엄격하게 규격화되지 않는다. 어휘의 사용 범위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며, 이는 규칙과 의미 모두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휘는 언어 게임 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언어 게임이 변하게 되면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탐구>는 엄격한 규정에의 속박을 풀고, 일상 언어에 대해서 탐구했다. 이로써 그는 세계의 형식 대신에 삶의 형식에 다가갔으며,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를 관통하였다. <탐구>는 비트겐슈타인 사후에 초고를 합해 출판되었다. <탐구>에 담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일상언어학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탐구> 이후에도 철학에 관한 관심을 이어갔다, 인간의 조건에 의문을 가졌고, 죽기 직전까지 앎과 믿음, 형식에 관한 저서인 <확실성에 관하여>를 서술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논고>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성서가 되었다. 그리고 <탐구>의 내용은 일상언어학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의 철학은 20세기 철학의 언어적 전회를 이끌었으며, 그는 <타임>의 20세기 가장 위대한 10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거대한 카리스마는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정부>, 회화 <뉴욕의 비트겐슈타인>, 영화 <비트겐슈타인> 등의 작품이 세계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수도 있다. 그의 철학과 삶은 여전히 난해하고 질문을 낳으며, 분명히 매력적이다.


참고문헌 | 

논리 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책세상

비트겐슈타인 평전, 레이 몽크, 필로소픽

확실성에 관하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책세상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박병철, 필로소픽

비트겐슈타인 현대 철학의 언어적 전회, 남경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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