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평등한 존재로 참정권, 환경권, 종교의 자유 등 헌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같은 권리를 보장받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는 각자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며 성취하는 일, 조화를 이루는 일, 교육 측면에서 말하자면 협동심, 사회성을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학생이 수업에 지각하거나 친구와 무의미한 잡담을 나눠 면학 분위기를 해쳤을 때, 부적절한 언행으로 강의자를 존중하지 않는 인상을 주어 교육자 개인의 심리 상태와 제공하는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때, 우리는 그 학생에게 “잘못”까지는 아니지만 “책임”, 혹은 비난 가능성이 있다고 수긍합니다. 학생이 교육자에게 갖춰야 할 예의가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있지만, 학생이 면학 분위기를 저해했다면 어느 수위의 제재를 가하는 것이 맞는지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속된 말로 케바케(case by case, 사안별로 다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벌이 학생 제재의 적절한 수단이 되는지는 논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권리와 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목적, 수단, 각자의 이득과 손해, 상위의 가치, 이해 당사자의 과거 행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어 고의성과 책임이 있다고 간주한다면 가중 처벌, 해결 과정에서 절차, 실질적 불이익, 재발 방지와 같은 특수한 조치가 취해져야할 것입니다. 매듭을 풀고 썩은 부분을 잘라 다시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한쪽의 주장, 생각, 이익만 반영되는 일은 상대의 주장이 보편적 인권을 심하게 훼손하지만 다른 쪽은 오히려 생명, 안전 등의 절대적 가치에 기반해 사회적 미덕을 대변할 때만 허용됩니다. 전자의 경우 사회 전체의 불이익을 초래해 본인에게도 재난이 되어 돌아간다는 판단에서입니다. 매국노로 호의호식하는 삶 혹은 가난한 나라 관리의 삶은 이분법적 사고로 도출된 허상입니다. 결국 나라가 속국이 되면 이후에 쓸모없어진 매국노는 토사구팽이 될 것이며, 버려지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내놓고 생존을 위해 기력을 소모하며 얻은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삶이 황폐해질 것입니다. 위 원칙이 적용 불가능해 불가피하게 한쪽에만 편향적으로 이득인 조치가 취해진 경우에는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혹은 적절한 시기에 다른 쪽에 정당한 보상을 하는 방안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42년 아편 전쟁에 패전해 배상 책임을 물게 된 중국은 세계 무역·관광 중심지인 홍콩 지배권을 99년 임차하여 100년 후, 본래 항구로서의 가치를 훌쩍 넘긴 채로 영국으로부터 이양받았습니다. 여유를 두어 충분히 숙고하고 진행 방향만 옳게 한다면 각자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일에 시간과 비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체벌은 때로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어떻게 공존하게 된 것인지요. 2010년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체벌 금지를 명령한 지 8년 지난 현재로서는 너무나 시기 지난 담론, 논쟁입니다. 많이들 이야기하듯이 체벌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게 된 데에 군대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개인으로서도 생각합니다. 징병은 전시 상황을 대비한 군사 양성을 위해 있습니다. 복무를 마친 이가 전체 국민의 절반가량 되며 전시에 불필요한 살생을 예방하기 위해 강한 규율과 통제가 존재하는 군대 방식이 “효율”적이고 “훈육”적으로 위장해 산업과 교육 현장까지 스며든 것입니다. 하지만 군대식 규율의 본 목적인 무의미한 고통, 희생의 방지(防止)가 체벌을 통해 실현되었는지요.

 머리 다 큰 성인이 체벌을 받고 “반항심”이나 “권위에 대한 회의”를 느끼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힘듭니다. 안타깝게 10년 전만 해도 학생이 교육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교육자도 학생을 존중하지 않는 일이 당연히 항의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요. 부모가 아이 안전을 위해 유치원, 학교 공개된 장소 곳곳에 CCTV를 달 길 요청해 직원들이 사생활 침해를 호소할 정도라고 합니다. 보호자 없이 아이를 혼자 두고만 가도 아동학대로 고소되어 처벌받고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던 함무라비 시대나 지금이나 “왜 남의 귀한 자식에 손을 대냐”가 감정에 기댄 호소가 아니라 깊은 사랑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성토임을 공감 능력이 있는 모두가 알 것입니다. 현재 체벌이 학생을 옳은 방향으로 바로잡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고 있는지요. 아니라면 우리가 부작용을 심하게 앓은 지나친 효율“만” 추구의 또 다른 예시일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저항하기 힘든 약자를 상대로 한 화풀이일까요? 아쉽게 저는 그분이 아니기에 모릅니다. 그분만 아시겠지요.

 

 1942년 미국 심리학자 크레스피(Leo Crespi)는 당근과 채찍 실험을 통해 우리가 보상과 고통, 희생, 손해에 반응하고 반복 학습을 통해 뇌가 보상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조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체벌을 통해 고통을 느끼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이 아니기에 피 한 방울 더하지 않은 살을 도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합니다. 살을 도려내 고통을 주고 싶은 것인지 살이 정당한 대가인지 역시 우리는 그분이 주신 지혜와 가르침을 통해서 유추할 뿐입니다. 인권과 관련해 정확한 수단, 정당한 목적, 올바른 방향 중 단 하나라도 확실하지 않다면 실행을 유보하는 것이 지침(thumb rule)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간디가 무폭력 운동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지켜냈듯이 악에 대한 무저항을 가르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악을 갚지 않음으로서 인간을 악으로부터 해방하고 단지 인간의 어리석음과 한계를 안타까워하며 그분께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함께 사는 고양이 희야가 새끼일 때부터 한 번도 손을 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잘못을 하면 어미 고양이가 하듯 손뼉을 쳐 큰 소리를 내는 식으로 희야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그렇게 키웠어도 희야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8살 성묘가 되었습니다.

 오지랖이라고 하나요. 학생을 체벌시키면서까지 바로 잡지 않아도 됩니다. 미국인이 자주 쓰는 말인 “네 일이나 신경 써(It’s not your business)”가 생각납니다. 그건 학생과 학생의 보호자가 신경 쓸 문제니까요. 그들이 자신과 자식의 인생에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번에 실수했구나. 앞으로 일이 과거만큼 중요한 걸 잊지 마렴”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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