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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의 아우성
사뮈엘 베케트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454호] 2018년 10월 30일 (화) 김선규 기자 seongyukim@kaist.ac.kr

 각 존재가 가진 고유한 이름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힘을 가진다. 이름에 뒤따르는 많은 서술은 괄호 속의 이름이 의미와 성질을 갖게 한다. 문장 없이 홀로 존재했던 이름은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어떤 의미를, 의미의 의미가 어떤 의미의 의미를 만드는 세계에서 의미는 무엇인가. 의미는 도돌이표 사이에 갇히고, 존재는 불안에 빠진다. 우리는 설명될 수 없는, 결정될 수 없는, 그래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붙어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나’는 자신의 이름을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나, 마호드, 웜, 우리, 그것, 창조자, 사물, 이 모두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심지어는 둥근 구가 되었다고 느끼기도 한다. 부정하고, 인정하고, 떨어지고, 다가가고, 움직이고, 정지하고, 살아있고, 죽어있는, 그렇게 계속하는 전능하고 무능한 자는 하나의 실체인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가 문장에 부여한 끝없는 쉼표는 숨을 헐떡이게 만든다. 그리고 읽는 것과 읽히는 것의 구분은 회색으로 흐려진다. 분열 속에 놓인 이 목소리는 공기를 간질이는 진동은 있으나 내용은 없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목소리는 마침표,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을 내뱉으며 자신을 소모한다. ‘나’인 상태에서만 나를 벗어날 수 있다는 모순 속에서 어쨌든 계속 말한다.

 ‘이름 없는 나’는 이질감을 준다. 그러나 사뮈엘 베케트가 설계한 반복과 분열 속에서 이질의 요소는 작아지고 ‘나’와 독자는 거의 같은 궤도 위에 놓인다. 세계에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거의 없다. 확고한 것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구축된 것은 아니다. 이 완벽하게 무력한 세계에 사무엘 베케트는 ‘나’의 목소리를 빌려 질문을 던진다. “지금은 어딘가? 지금은 언제인가? 지금은 누구인가?” 세계 내의 하찮은 존재들은 이 세 가지에 정확하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떠들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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