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가를 걷다

진 용 진
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

 

 


1.
‘그때, 목동에 아파트를 사지 않은 것은 우리 집의 가장 큰 실수였다’

신월동 주민인 진씨와 부인 정씨 가족의 대화 속에서 나왔던 말이다. 15년을 이곳에서 살아 온 이들 가족은 같은 지역구인 목동의 부동산 가격의 성장을 바라보며 지금의 집을 구입할 때, 당시의 상황을 씁쓸하게 떠올리곤 한다. 주식과 같은 경제 산물에 관심이 많았던 진씨는 주택 평수는 비교적 적지만 성장의 여지가 보였던 목동, 화곡 사거리, 영등포 근처의 양평동의 주택 및 아파트를 구입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미국형 변두리 지역의 전원주택형의 주거환경을 갖는 것이 꿈이었던 부인 정씨는 신월3동 소재의 비교적 넓은 평수의 주택을 구입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1989년에 화곡동 전세 빌라를 처분하고 지금의 단독 주택으로 정착을 했다. 1989년 이후로 진씨 부부의 주택은 물가 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마이너스의 성장을 보였으며 그 사이의 목동의 부동산은 지속적인 부동산 안정책에도 불구하고 교육, 교통, 행정의 강세를 바탕으로 여전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의 부동산 안정 정책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교차하는 가운데도 신월동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전례에 없는 예외사례로 평가 받고 있다.

2.

진씨 부부의 장남인 그는 2005년 4월에 군 전역 후, 그들 부부가 운영하는 목동 네거리에 위치한 식당 일을 도우며 그 해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 오전에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들어오는 용역 일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인 소득원이 없던 그에게 매일 부모로부터 받는 만원을 통해 소비생활을 할 수 있었다. 타인에 비해서 시간도 많고 체력이 좋았던 그는 집이 위치한 신월동에서 부모님의 가게가 위치한 목동까지의 버스 왕복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목동 사거리와 신월동 사이를 걸어 다니기로 했다. 통상적으로 곰달래길이라고 불리워지는 거리가 그 사이를 지키고 있다. ‘달빛이 맑고 곱게 비친다‘라는 서정적인 뜻과 다르게 이 거리에는 맥양집, 오비집이라고 불리는 꽃마차들이 즐비해 있다. 예전에는 집창촌에서 속된 말로 상품성이 떨어지는 여인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지만 성매매법이 실시되고 나서 나이가 어려보이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로즈, 이프와 같이 촌스러워 보이기도 한 간판들도 보인다. 붉은 실내조명 아래, 검은색 짧은 스커트를 입고 현관 앞에 그녀들은 앉아 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현관 앞의 거울을 통해서 지나가는 행인을 관찰한다. 가끔, 나이 많은 취객이 지나가면 ‘오빠 한 상 하고 가’라고 외치며 그들을 유혹한다. 때로는 투명한 현관문 앞에 선 채로 담배를 피며 길거리에 지나가는 행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곤 한다.

그는 곰달래길을 며칠 동안 다녔다. 호기심과 욕정의 눈빛으로 흘긋거리며 꽃마차 내부를 쳐다본다. 일정한 걸음속도를 유지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관찰하고 싶어 한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궁금하다.

3.
눈이 마주쳤다. 너무 놀랐다. 몰래 그녀들의 모습을 훔쳐보았을 때의 긴장감이 아닌 충격의 느낌이었다. 투명한 현관문을 사이로 마주친 1초도 안 되는 그 시선의 교환의 상황이었던 것이 무색했다. 서늘한 눈빛.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난 너라는 사람을 잘 알아. 매일 넌 이곳을 지나다녔어. 혹시 그것이 착각이더라도 넌 남자잖아. 남자들은 날 궁금해. 내가 매일 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돈과 그에 상응하는 가치에 대해서 고민해. 아니면 아내에게 대항할 수 있는 하룻밤을 가득히 채워줄 적당한 알리바이에 대한 고민들. 모든 것이 거래야. 돈이 있다면 너는 고민하겠지. 최소 투자로 최대한의 서비스를 얻을 수 있는 곳인지를.

난 너를 잘 알아. 너 같은 사람들을 잘 알아.

그녀의 얼굴에 있어서 눈을 제외한 다른 신체 기관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서늘하고 길었던 눈빛만이 얼굴 속에 남아 있었다. 화상을 입어서 눈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물러 없어진 것처럼.

도덕적인 자책감의 발로인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이후로 그 밤거리를 걷는 것을 망설이게 했고 다른 길을 찾기로 했다. 어쨌든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돈을 아껴야 했다.

 

4.
없다.

신월동은 ‘없다’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경제적이고 가시적인 것에 있어서 없음에 국한된 것이 아닌 ‘동’이라는 공간에 있어서 허전함이다. 마을은 힘이 없다. 낮에는 사람들이 없다. 밤이 되면 하나 둘 스멀스멀 도시의 공간에서 귀환을 한다. 아이들이 없다. 활기가 없다. 무기력함과 도피가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 카드 사기 때문에 국세청을 피해 다니는 사람. 마을의 거리 곳곳에 구멍을 낼만큼 무거운 화물 트럭을 몰고 다니는 사람. 바람을 피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장애인이 되고나자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원래의 부인을 찾아 온 사람.

신월동은 소음이 ‘많다.’

남부순환도로와 경인고속도로의 가속성은 마을을 두르고 상주하는 안 사람이다. 마을을 관통하면서 이따금씩 소리를 질러 되는 비행기는 불청객이다. 안 사람과 불청객 모두, 그이에게는 불편한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곧 생활이 되기 일쑤지만 이 불편한 익숙함은 15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는 소음이 싫다.

그래서 그는 목동 네거리에서 목동 오거리 방향으로 걷다가 경인고속도로를 끼고 신월동으로 가는 거리가 싫다.

5.

어깨 위로 내려오는 가로등 불빛이 좋은 거리였다. 어떠한 외부에 대한 예민함이 없이 걷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집중은 마냥 아무 생각 없이 몸의 전진함일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고 걷는 느낌은 좋다. 또한 이것은 생각하고 싶은 것을 계속하는 행위의 안정감이기도 하다. 이것은 좋은 느낌보다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사유를 유지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다.

이 거리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그는 그냥 주택가라고 부른다. 곰달래길에서 한 블록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어지는 이 길은 목동네거리에서 화곡 전화국을 거쳐서 신월동으로 이어진다. 주택가라서 조용하다. 주택가라서 안정감이 있다. 높은 건물은 없다. 그를 내려 보는 사람들의 가능성은 낮다. 아침마다 전화를 걸어서 일 있으니 나가라고 쪼아 대는 용역회사 사장도 없다. 거들먹거리며 자신에 대한 자랑과 권력을 행사하려는 손님도 없다. 모두가 동일한 레벨에서 땅에 발을 대고 있다. 그 대상이 비록 집들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들을 통해서 위안을 구했다. 행복을 위한 자기 합리화의 일종이었다.

6.
자기 합리화를 위한 행복의 여정은 대개가 밤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낮은 현실을 느끼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신월동에서 목동 네거리로 가는 길은 여름 오후의 턱턱함으로 땀이 몸에 차오르기 시작한다. 화곡 전화국을 지나면 멀리서 서서히 아파트들의 병풍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부모는 그곳의 사람들이 식당의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에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다. 떠나는 님을 바라보듯이 아쉬움과 함께 바라보는 그들의 뒷모습은 익숙하지만 그래도 서럽다. 그에게 아파트는 님이기도 하지만 현실이기도 한다. 서서히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학수고대 속에서 무료함을 안고 님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앞치마는 오랜만에 온 그를 위해서 열심히 가무를 울리는 여인의 발이다. 기쁨 속에서 혹시라도 실수를 보일까 싶은 긴장감의 연속의 발짓이다. 기다림과 만남은 공존하는 현실이다. 님은 현실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님은 여인의 몸을 탐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십 분이 지난 뒤, 그녀에게는 허무와 슬픔만이 남는다.

1) 여기요 2)학생 3)어이 4)사장님 5)기타(눈빛, 손가락)

님들은 그를 이 오지선 답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부른다. 님은 떠나고 권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합리적인 행복이 이루어지는 밤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7.
7월 즈음해서 그는 목동에 있는 한 백화점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가게 시간과 겹치지 않는 오전 시간에 하는 일이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베이커리 매장 안에서 청소를 하고 서빙을 했다.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지만 50평 남짓 되는 매장 곳곳에 굳어서 얼룩진 커피나 케이크를 청소하는 일은 많은 노동을 요구했다. 군대에서 생긴 굳은 살로 비교적 살이 두꺼웠던 그의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아르바이트생을 홀대했던 직원들과 백화점 고객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목동에서 주변의 건물과의 조화는 고려하지 않고 새로 우뚝 새워진 주상복합 건물만큼 흉폭스러웠다. 단순히 고층 빌딩이 주변의 환경에 변화를 끼친다는 상식적인 측면의 문제 제기가 아닌 직관에 의한 것이다.

상식은 결국 이데올로기 속의 동의의 결과일 뿐이다. 직감이 통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직감이 생각으로 나아가게 하고 싶다. 적어도 그의 안에서는. 흉폭스러운 주상복합건물로 통하는 목동의 아파트들은 그에게 직관적으로 힘겨웠다. 상식 차원에서도 이미 공해로 통하듯, 그 영향력을 받지 않고 싶은 그의 직감에서도 그랬다. 같은 거리지만 낮과 밤의 유무, 방향의 차이에 따라서 그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8.
밤의 그곳은 상상이 있다.

낮 속의 모텔가는 활력이 없다. 신월동에서 화곡 전화국 사이를 잇는 거리에는 모텔이 줄지어 있다. 밤의 에너지를 멀리하고 주택들 속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모텔의 모습은 덩그렇다. 싼 대실료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연인들의 뒷모습이 밟힐 뿐이다. 활력을 잃은 거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공의 움직임뿐. 이것도 모텔의 현관을 통과하는 연인들의 뒷모습을 주시하는 아이들의 시선에 의한 간헐적인 정지로 그 호흡을 잃어간다. 모텔이라는 공간이 실제로 아이들의 교육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흐느적거리는 어른들의 모습만을 지켜보는 그들에게 동정이 들기 시작했다.

밤이 되고 그 거리에 그가 편입되기 시작하면 동정심은 발칙한 상상으로 바뀐다. 근엄함에 대한 혐오는 상식에서 요구하는 연령에 대한 도덕적 미덕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싶어진다.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그 무대의 전면에서 배재될 수는 없다. 밤이 걸어오고 그가 주택가를 걸으면 상상은 방해를 모르고 부풀기 시작한다.

9.

아파트를 등지고 신월동을 향한 거리의 방향성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목동과 화곡동을 가로 지르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남쪽에 사는 주민들을 불쌍하게 바라본다. 부엌이 딸린 단칸 방. 공동 화장실. 겨울이 되면 동파되는 수도관. LPG 가스통. 공원은 커녕 녹지라고는 볼 수 없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 노점상. 일산, 분당 신도시 개발 이후로 해서 아이들이 없어진 골목길. 불쌍하다는 단어는 섭섭하다.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지만 가끔 즐거움은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남루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패배 의식이 가득하다. 피해 의식이 가득하다. 자존심은 가득하다. 전라도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경상도 사람들은 같은 경상도가 그게 그것이 아니다.

길을 걷고 있으면 사람이 있다.

아파트는 보이 않는다.

식료품점 앞에서 막걸리를 한 잔하면서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 훈수를 두는 어르신은 항상 서서 구경을 한다. 내려다볼 때의 그 통찰력은 앉은 자들의 관찰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리어카에 두루마리를 가득 실은 아저씨의 몸이 좋다. 60대는 되어 보이시는데 온 몸이 근육으로 울퉁불퉁하다. 아저씨는 항상 오후 다섯 시 반 즈음해서 화곡 전화국과 목동 네거리 사이의 주택가에서 뵐 수 있다. 하얀 색 메리야스를 입으신다. 땀으로 범벅이 된 메리야스를 보고 있으면 끈적거림이 느껴진다. 아저씨는 이따금씩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집들을 향해 내뱉으신다. 후련함이 느껴진다. ‘억’이라고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윽’이라고 들리는 것 같다. 이 두 단어 사이의 한글 문법에서 설명되지 않는 어떤 발음을 뱉으신다. 그는 아저씨의 그 목소리가 좋다. 그렇다고 아저씨를 쫓아가지는 않는다. 내일 또 볼 수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밤이 되면 집에서 샤워를 하며 또 다른 소리를 만들 것이다.

밤이다. 모텔의 네온사인과 노래방의 간판이 어지러이 밝힌다. 그는 한 노래방 앞에 세워진 봉고차를 본다. 그 속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가득하다. 눈조차 마주치는 것을 꺼리며 전투에 나가기 전에 병사처럼 고개를 숙인 채 연락을 기다린다. 그녀들의 표정은 결연할까... 노래를 잘 부를 필요도 없다.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항상 두 남자가 앉아 있다.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모습 아니면 뒤를 향해서 무언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다. 평생 저 두 모습으로 산다면 재미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인들이 나온다. 모두가 큼직한 링 귀걸이를 한다. 무거워 보인다. 아마 한 곡조 뽑을 것이다. 후련해지자.

10.
그의 신발이 무겁다. 가게를 나서면서 그의 부모가 비가 올 것이니 우산을 쓰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무시하고 그냥 나왔다. 거리를 걸을 때, 몸은 가벼워야 한다. 가방조차 매지 않는다. 걸음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걸음에 집중하고 있으면 곧 생각을 할 수 있다. 이어서 상상이 걸어온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이따금씩 뛸 때면 가방은 신경 쓰인다. 점점 비에 옷이 젖어 몸이 무겁다.

밤은 끝이 없어 보이고 길도 매한가지다. 가로등 불빛은 어깨 위로 쏟아지다가 빗물에 같이 부서진다. 그는 시름시름 앓고 싶어진다. 그냥 주저앉고 싶다. 손님들이 먹고 남긴 소주를 주섬주섬 모아서 마신 탓일까. 가게에서 일하고 나서 그는 잔에다 술을 따르지 않고 병째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그의 부모도 특별히 말리지 않는다. 대신에 남들이 있을 때만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하신다.

상상을 할 수 없는 걷기는 운동일 뿐이다.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운동이라고 합리화하기도 싫다. 술기운에 집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두루마리 아저씨의 후련함도 아니다. 이내 후회를 하고 누가 볼치라 빗길을 뛴다. 비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기가 힘들다. 가로등만 이따금씩 흔들릴 뿐, 나머지 흔들리는 것들은 뭐가 뭔지 모른다. 괜시리 분노심만 생긴다. 관습적인 학습력에 의해서 분노심은 억눌러야 하는 것임을 알지만 쉽지가 않다. 왜라는 반문만 나온다.

남부순환도로를 건너는 육교 위에 서면 그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보인다. 그저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 어떤 사건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기억되는 분위기가 좋은 향기와 같다. 젖은 발을 바라본다. 끈이 풀려있다. 헐거운 신발의 공간 속에서 발이 놀아서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신발 끈을 꽉 맨 그는 미친 듯이 뛴다. 초등학생 때, 달리기를 잘했던 그였다.

11.
그는 얼마 전에 미국연수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나랏돈으로 가기 때문에 부모님께 상대적으로 큰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즐거움에 부풀어 있었다. 가게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미국에서 있을 생활에 대한 상상을 펼치고 있었다. 그가 가게 될 도시는 시카고였다.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자주 도감을 사주곤 했다. 그 중에는 미국 도시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는 당시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었던 시워즈 타워가 시카고에 있다는 사실에 여행 희망지 1순위로 그곳을 점찍어 놓았었다. 지금이야 남근같이 우뚝 솟은 목동의 주상복합 건물 같은 고층 빌딩을 싫어하지만 어렸을 때는 무조건 크고 높은 것이 마냥 좋을 때였다.

유년시절의 좋은 이미지 때문인지 몰라도 그에게 시카고라는 단어는 좋았다. 상상 속의 그는 이미 시카고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사실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학생

아직도 그가 학생이라고 불리는 것이 신기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모두가 그를 보면 삼촌이라고 불렀다. 군 후유증으로 그의 피부는 검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카락도 통 자라날 기미를 안 보인다. 다듬는다고 자른 머리카락은 미용사들의 횡포로 지속적인 스포츠 형 머리의 계속이다. 또는 음식점에서 통상적으로 여자는 이모, 남자는 삼촌으로 호칭된다.

그 어르신은 술에 많이 취해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사실 절름발이처럼 보였다. 어쨌든 다시 미국에서 학생신분으로 생활을 시작한다는 들뜬 마음에 학생이라는 호칭이 그에게 듣기 좋았다. 양손으로 어르신의 팔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술에 취하면 사람의 힘이 더 세진다고 누군가가 말해서 그런지 이 사람은 일어서려는 것이 아니라 중력 방향으로 몸에 힘을 주고 누르는 것 같다. 일으켜 세우면 또 쓰러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드디어 그의 몸을 일으켰다. 어르신은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학생이라는 호칭을 부른 다음에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맙다고 한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기지 바지를 입고 골프 웨어를 윗옷으로 입고 있었다.

‘원래는 이러지 않는데’로부터 시작한 어르신의 푸념은 아내가 내조를 잘 해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는 어르신을 집까지 모실 생각을 했다.

어르신의 손바닥은 무서웠다. 취객을 안전히 집까지 모셔야 한다는 도덕심은 사라졌다. 어르신은 손바닥에 가득한 칼 흉터 자국을 보여주며 자신의 무용담을 펼치기 시작했다. 칼이 날라오면 손바닥을 방패삼는다고 했다. 어르신의 전라도 말투는 점점 더 강렬해졌다. 자신의 윗옷을 까더니 배에 있는 흉터 하나를 보여준다. 맹장 수술을 한 것인지 실제로 찔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왠지 이 사람을 데려다 주다가 반대파 수행원 또는 기분이 돌변한 그의 사시미 칼에 찔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어르신은 계속 배떼기를 찔러야 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히 아저씨를 길 한쪽 구석에 세운 다음에 급한 일이 있어 가봐야 한다면서 신월동을 향해 걸었다. 어르신은 떠나는 그의 뒤를 향해서 학생이라는 호칭을 계속해서 불렀다. 원망이었다. 그는 걷는 내내 마음이 걸렸다. 그래봐야 건달 급도 안 되어 보이는 속된 말로 한 물간 퇴물이거나 양아치 급으로 보였다. 술 취한 사람이 해봐야 뭘 하겠다고. 지나가는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어르신이 절름발이였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평소에 우리의 인생이 절름발이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행복을 향해서 비틀거리고 위태롭게 걸어가는 모습이 같다고 생각했다. 일기장에는 절름발이도 꿈이 있다고 호언해왔다. 그래도 그는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직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겁내도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를 했다.

12.

학생이 되기 전에 그는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미국을 가기 위해서는 이백만원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나머지 비용은 나랏돈으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그만큼의 액수도 그에게는 큰돈이었다. 베이커리 아르바이트 외에도 다른 일이 필요했다.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하다가 관둔 학원선생 직을 맡게 되었다. 학원은 곰달래길 588종점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학원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학생들이 말을 잘 안 들으면 숙제를 많이 내주면 되었다.

평소에 그는 학생들에게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황우석 사건이 터졌을 때는 맹렬한 비난과 함께 그의 의견을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그 자신의 자질을 떠나서 어린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 진보적이어야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가끔 그는 원장 선생님의 성화로 보충 수업을 하고는 밤이 늦게 되면 학생들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하루는 신월동 부근에서 화곡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흔히 부르는 주택가이다. 학생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고 있다가 난데없이 아이가 원망조로 '선생님'이러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이 중학생을 바라보는 그였다. 학생인 아이는 선생님이라는 그에게 어떻게 선생님이 학생 앞에서 침을 뱉을 수가 있냐고 그랬다. 목동을 등지지 않고 가는 방향성에도 사람은 있었다.

13.

겨울이 되었다. 정확히 출국일이 가까워졌다. 베이커리 아르바이트는 일찍이 그만두었다. 그는 노동에 비해서 최저 임금 밖에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살짝 서글펐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는 젊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은 많다고 믿었다.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는 않았다.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학원 일도 출국 이 주 전에 그만 두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하는 학원 일을 하면서 목동에서 신월동으로 가는 길의 빈도가 줄었다. 이제 날씨도 시리다.

이제 그동안 모든 돈도 있고 해서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걸으면 50분 정도 거리가 20분 정도면 도착한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한 번 다시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관두었다. 날씨가 많이 시리다.

부모님 가게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목동 네거리가 출발점이 아닌 목동 오거리의 버스 정류장에서 탑승을 한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표정이 없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픈 얼굴이 가득이다. 신월 7동 종점에서 내려서 집이 있는 신월3동을 향해 걷는다. 경인고속도로를 지르는 고가교를 지나야한다. 서울과 경기의 경계를 표시하는 이 다리를 건너면 신월3동의 마을이 나온다. 다리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의 가속성과 빛의 화려함은 생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어릴 적 느끼던 서울인도 경기도인도 아닌 경계인이라는 분노의 감정도 없다. 이제 이와 같은 풍경이 익숙하고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다리를 건너 신월정수사업소를 지난다. 이곳은 서울시가 당초 순수한 생태공원을 만들 것이라는 계획을 엎고 간이 야구장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몇 년 뒤, 후폭풍이 몰아칠 듯하다. 그에게 있어 훗날에 대한 예측은 보류로 남겨둔다. 불안함과 기대의 뒤엉킴 속에서 그는 그냥 지난 4월부터 1월까지의 걷기를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걷기는 계속될 것 같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